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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목] 룻기를 통해 본 이주민 인권 선교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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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556

[달라도 우리, 다문화] 룻기를 통해 본 이주민 인권 선교의 실제

 

 

룻기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살이 이후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룻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모압 여인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다가 나오미의 주선으로 보아즈와 결혼한 여성이다. 룻기는 국제결혼에 배타적인 느헤미야기나 에즈라기와 달리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서로 평등하게 자유로이 사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이방인이 하느님의 인도를 받았다거나 이방인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룻기는, 하느님의 백성은 인종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주민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국제결혼을 하여 우리 땅에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을 어떻게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된다.

 

 

룻기는 이주민에 대한 편견을 거부한다

 

룻기는 이주민의 삶의 전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사람들이 왜 이주하는지, 이주 노동자의 삶의 모습, 국제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사의 한 형태로서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는 국제결혼 이주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다 들어있다. 이스라엘에게 타민족과의 혼인은 일관되게 배타되거나 긍정된 것이 아니라 민족이 놓인 상황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룻기에서는 국제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지지하고 있다.

 

나오미는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으며 그 며느리와 일심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보아즈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 이방 여인이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 되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다. 나오미와 보아즈의 이웃들도 보아즈와 룻의 결혼을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격려한다. 룻이 아기를 낳자 이스라엘 사람은 룻의 행위를 그들의 옛 조상인 유다의 며느리로 유다의 부인이 된 다말의 행위에 견주어 축복한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반열에 세운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타적인 인종편견에 의해 국제결혼으로 이주한 여성들이 차별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 여성들이 룻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과제가 한국 교회에 있다.

 

 

나그네 보호법과 이주민의 생존권 보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에 온 룻은 생계를 위해 보아즈의 밭으로 이삭줍기를 나갔고 보아즈는 이스라엘의 전통인 약자보호법 중의 하나인 나그네 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주민 보호를 위한 약자보호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는데 추수 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 등 세 종류의 법이다.

 

이스라엘에게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이 없는 이주민,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의 보호와 하느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다. 약자 편에 서계시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렇게 율법은 소외된 이주민을 보호할 것을 법으로 규정해 놓은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레위기 25장 35절에서는 가난한 동족을 돌보기를 나그네 돌보듯 하라는 말로 하느님이 이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가난한 동족을 보호하듯이 이주민을 돌보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기 동족을 이주민처럼 잘 대우하라고 할 정도로 이주민 대우가 약자보호의 이상형으로 나타나있다.

 

룻이 나오미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하듯 오늘날 한국 땅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3D 업종이며, 한국인들이 떨어뜨린 이삭과 같은 일자리다. 보아즈가 이스라엘의 약자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했듯이 이주민의 생존권을 보호하고자 나서야 한다.

 


이주민에게 힘을 주는 위로와 격려, 식탁공동체 형성

 

보아즈는 이삭줍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도록 허용한다. 이런 보아즈의 배려에 대해 룻은 이렇게 묻는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시다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룻 2,10) 보아즈가 대답한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룻 2,11).

 

이주민들은 보아즈의 말처럼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로 왔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하느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주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일은 이주민에게 힘을 준다.

 

한편 보아즈는 이렇게 룻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식사 때가 되자 음식을 나누어 준다. 보아즈가 음식을 함께 먹도록 룻을 초청했다는 것은 더 이상 룻이 타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보아즈처럼 우리도 이주민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서 음식을 나눔으로 같은 식탁공동체를 일굴 필요가 있다.

 

 

성적 착취와 성의 상품화에서 보호

 

룻에게 이삭줍기를 허용한 보아즈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것은 그의 일꾼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꾼들이 괴롭힌다는 말은 룻에게 성희롱이나 성적 착취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보아즈의 이런 행동은 이주민의 생계를 보장함은 물론 여성의 성을 함부로 짓밟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공동체의 법정신임을 깨우쳐준다.

 

우리나라에서 이주민 여성들은 가정폭력, 성폭력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이주 여성노동자의 12%가 성폭력의 경험이 있다. 사업장 내 성폭력 경험에서는 12.1%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중 30.4%가 신체를 만지는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였고, 55.6%가 한국인 직장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였다. 성폭력은 55.0%가 퇴근 시간 이후에, 56.3%가 작업장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보아즈가 모범을 보여주었듯이 이주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일에, 이주 여성들을 성의 상품화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하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자기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도록 도움

 

룻이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하자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즈와 룻을 결혼시키려고 보아즈에게 레비르(levir) 법을 이행하도록 요청한다. 자식 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 죽은 형의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그 형의 후손과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신명 25,5-10 참조)는 ‘레비르’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룻기에서는 이 레비르 율법을 직계 형제가 아닌 집안 친척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가난한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한계가 없음을 뜻한다.

 

보아즈에게 레비르 법을 요구하며 행동에 나선 나오미와 룻의 자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저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의 자선이나 처분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권리를 인정받으려면 용기와 지혜로 나서야 함을 뜻한다.

 

인권이 무시되는 불의한 사회에서의 권리회복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서 비롯됨을 룻과 나오미가 가르쳐준다.

 

그리스도교가 이주민들을 위해 일한다고 할 때 이들의 인권이 향상되도록 법을 개정하고 국민의식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룻과 나오미처럼 이주민 당사자 스스로가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 이주민과 함께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주 여성이 자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보호하도록 법을 제정하고 이행함

 

나오미와 룻의 요청을 받은 보아즈는 나오미 집안의 유산지분으로 있는 땅을 속량시키고 이를 통해서 레비르 법을 이행하려 한다. 레위기 25장 24-28절의 속량법에 따르면 누가 가난하여 땅을 팔 경우 가까운 친척이 사서 나중에 형편이 좋아질 경우 되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아즈는 이 법에 따라 나오미의 땅을 속량할 뿐만 아니라 레비르 법을 이행한다(4,10).

 

본래는 별개인 속량법과 레비르 법을 서로 뒤섞어 적용하고 있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힘없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어떤 법보다 우선하며 또한 가난한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마저 바꿀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종교를 초월한 새날을 여는 사람들의 연대

 

교회가 이주자와 연대한다고 할 때 그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리는 그 원형을 나오미와 동행한 룻, 룻을 보호한 보아즈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하러 자기 밭에 온 룻을 돌보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권리 찾기에 나선 룻과 나오미에 응답하는 보아즈의 연대, 홀로 고향에 돌아가는 나오미를 따라나선 룻과 그 룻에게 새 삶을 열어주려고 애쓰는 나오미의 모습, 마침내 인류 구원사의 한 줄기로 서게 된 세 사람의 연대는 파트너십의 좋은 모범이 된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하려고 자기 일신상의 편안함은 물론 민족과 종교까지도 포기한다.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하는 본문 곧 룻이 자기의 신을 포기하고 나오미의 하느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삼겠다고 한 것에 대해 한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 우월주의를 내세우거나 시집을 왔으면 시집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맹목적으로 따른다거나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외롭고 힘없는 나오미에 대한 룻의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자매정신과 연대성으로 파악해야 한다.

 

여성신학자 레티 러셀에 따르면 파트너십이란 “권위를 나누는 것이고, 억압의 구조를 자각하여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약자에게 용기를 내도록 붙잡아 일으켜주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권리를 찾아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 길을 찾아주며, 그로 말미암아 새 역사를 이루도록 연대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연대란 힘을 가진 이가 약한 이의 편에 서서 철저히 자기 것을 포기하는 데서 가능하다. 세계화 시대에 고통 받는 이주민과 함께하려면 룻과 나오미가 보여준 자매애와 연대정신이 필요하다.

 

오늘날 이주 노동자와, 결혼이주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한국 교회의 대다수는 이주민의 인권 문제보다는 이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 자매애는 자기가 갖고 있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상대의 종교를 포용하고 존중하면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바람직한 선교가 아니다.

 

* 한국염 - 목사.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www.wmigrant.org) 대표. 이 글은 지난해 10월 16-17일 침례신학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제38차 한국기독교학회 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다문화 시대, 이주민의 인권과 과제” 일부를 필자의 허락을 얻어 발췌 정리한 것이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한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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