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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여명(정조 시기): 여성 신앙 공동체와 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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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6 ㅣ No.1009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여명(정조 시기)] 여성 신앙 공동체와 지가

 

 

남편의 소박을 활동할 자유로 바꾸고

 

강완숙은 천주교를 알게 된 초기부터 그 대가를 치렀다. 1791년 신해박해 때다. 옥에 갇힌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공주 감영에 수감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안건은 관청에서 직접 다루지 않고 남편에게 넘겨졌다. 당시 여성의 처벌은 그 집안의 가장이 맡았는데 그는 이 일로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오히려 이때부터 강완숙은 더 이상 먹고 입는 데 풍족하고 평범하게 사는 여성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강완숙이 서울에 정착할 때는 이벽과 이승훈 등 20대 젊은이들의 갈망으로 교회가 시작된 지 십 년도 안 된 시기였다. 그들과 연배가 비슷한 강완숙은 곧 핵심 여성 동료가 되었다. 그때는 신자 스스로 만든 ‘가성직 제도’를 북경 주교의 지시로 해체한 직후였다. 그들은 새 조직이 필요했다.

 

당시 복음은 마른 낙엽에 불길이 번지듯 퍼져 나갔고, 그들에게는 전례를 행할 장소가 필요했다. 신자들은 조촐한 ‘신당’을 마련하거나 최해두와 정광수, 조섭 등과 같이 서로 담을 이어 살면서 ‘대문과 창문이 통하도록’ 했다. 곧 세 집 사이에 일종의 종교 시설인 ‘정사’(精舍)를 마련한 셈이다.

 

신자들은 1794년 12월 중국의 주문모 신부를 국내로 모셔 들였다. 강완숙은 신부 영입 계획에 적극 동참했다. 신부는 서울 북촌 최인길의 집에 머물렀으나, 6개월 뒤 그의 존재가 밀고되었다. 신부는 피신했고 최인길과 지황, 윤유일만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옥 안에서 타살되었고 시체는 강에 던져졌다. 이즈음 강완숙은 당대 사회에서는 드문 모험을 감행하였다.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신 것이다.

 

 

성리학 사회에서 공적 소임을 맡은 여성들

 

‘헌신적인 협조자’인 강완숙을 알아본 주문모 신부는 그에게 골룸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고 ‘회장’의 직책을 맡겼다. 이로써 강완숙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전개되었다. 더욱이 이것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남편에게서 받은 품계나 궁중의 내직이 아닌 정식 직책을 맡게 된 단초였다.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여성에게도 남성들과 대등한 직책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강완숙의 집은 전례의 장소이자 교리 교육과 교회 업무를 논의하는 장소였으며, 신부의 사택도 되었다. 강완숙은 안전과 필요성 때문에 여러 번 이사했다. 그는 서울로 들어와 남창동(현 회현동 일대) 정약종의 집 근처에 정착했다. 1799년에는 인사동으로, 이듬해에는 관훈동으로 옮겼다. 곧 서울 외곽에서 시작해 신자가 많이 사는 벽동(현 한국일보사 일대)을 향해 점차 도시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한편, 강완숙이 집을 살 때 황사영을 비롯한 네 명이 각각 100냥씩을 염출하는 등 신자들이 비용을 함께 마련했다. 만일 집주인이 모자란 비용을 더 보탰다면 이 집은 400냥이 넘는다. 그 무렵 정광수의 집이 100냥이었으니, 강완숙의 집은 일반 여염집의 서너 배가 넘는 규모였다.

 

물론 강완숙의 집 주변에는 천주교를 믿는 다른 교우의 집도 여러 채 있었다. 초기 교회의 여성들은 원활하게 신앙 활동을 하고자 기존 신자 거주지의 인접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집을 공동으로 구매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김희인과 김경애는 각각 150냥과 50냥씩 분담하여 군기시(현 서울 시청 근처) 앞의 집을 매입했다.

 

이밖에도 교회의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활용하던 윤운혜와 정광수 부부의 집 등 여러 공동체가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머무르는 강완숙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지가(支家, 종가에서 분가하여 나간 집) 역할을 하는 하부 조직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성 공동체 형성과 신자들의 연대

 

강완숙의 집에는 교리 교육과 신부 보좌 등의 일을 맡은 이들이 있었다. 또한 천주교 서적을 보급하던 여성들이 의탁하던 쉼터였다. 또 부모와 남편이 죽어 의지가지없는 여성도 모였다. 그들은 역할을 나누어 맡으며, 교회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먼저, 그곳에는 동정녀로 생활하며 여성들의 교리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이 있었다. 강완숙의 딸 홍순희는 동정 처녀들과 살면서 강완숙을 도왔다. 윤유일의 사촌 여동생 윤점혜도 교육을 맡았다. 윤점혜는 과부라고 자칭하며 동정 생활을 했다. 윤점혜는 1795년에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와서 살았다. 그는 윤유일이 신부를 영입했다는 죄목으로 타살되고 어머니마저 죽자 강완숙의 집으로 갔다.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도 함께 일했다. 그는 동정을 지키려고 ‘허가(許哥)의 처’라고 자칭하며 스스로 머리를 올렸다. 정순매의 오빠 정광수는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강습하고 천주교 서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 정광수의 부인 윤운혜는 윤점혜의 동생이었다. 정순매는 이러한 이들과 연결된 일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완숙의 집에는 궁녀 출신의 문영인과 회장 김승정의 어머니인 김섬아도 머물러 신부의 시중을 들었다. 궁중에서 문서 작성을 맡았던 문영인은 주로 교리책을 필사하는 등 문서 작성을 맡았을 것이다.

 

강완숙은 또 의지할 곳이 없는 불우한 여성들을 도와주면서 이들을 입교시켰다. 부모와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어 갈 곳이 없어진 김흥년은 강완숙의 집에 5년 동안 머물며 일을 도왔다. 바느질로 연명하던 과부 김순이도 강완숙의 집에 머물면서 의복을 만들었다. 동정녀 김월임은 바느질하는 일을 돕다가 어머니가 죽자 완전히 강완숙의 집에 의탁했다. 또한 점복과 정임 등의 여종이 있었다. 강완숙의 집에는 여러 손님이 드나들었으므로 도와줄 손도 많이 필요했다.

 

이외에도 강완숙의 집에 왕래하면서각자의 역할을 감당한 신자도 많았다. 김연이와 정복혜는 강완숙과 한신애의 집을 드나들며 그들의 지휘를 받았다. 특히 김연이는 주로 궁녀 출신의 여성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선혜청 사고직 김춘경의 아내 유덕이는 강완숙의 권유로 서학서를 공부하고 전례와 교리 공부에 참여했다. 강완숙은 자기 집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도 모두 교리를 가르쳤다.

 

한편, 이들은 경제도 스스로 꾸려 나갔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생활 양식을 결정하지 못하던 시대에 이들은 살아갈 방도를 개척해 내었다. 그들은 그렇게 혈연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조선 사회에서 독립된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을 지닌 채 한 가지 사업의 수행을 위해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여성 신앙 공동체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생활은 박해기 내내 이어졌다.

 

강완숙과 함께한 여성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조선 교회의 새벽녘, 괭이와 호미를 들고 공동체를 심느라 땅을 일군 사람들이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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