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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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34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아우구스티노 (상)

 

 

1. 생애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유명한 '고백록'을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방황에서 벗어나 참 사랑이며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기나긴 회심의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그의 '고백록'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영성여정을 살펴보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실로 이 저서는 세계의 문학사에서 큰 획을 이루며 오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파스칼, 키엘케고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들 못지 않게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 중 근원에서 사유한 3대 철학자로 플라톤, 칸트와 함께 아우구스티노를 꼽는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플라톤이라면 아우구스티노는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의 신학 및 영성적 권위는 오늘까지도 우뚝 솟아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옛 세계의 문화와 융화시킨 큰 공헌자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관리였던 아버지 파트리시오와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354년 11월 13일 로마의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지금의 리비아)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례성사를 받지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16세 때부터는 카르타고 대학에 들어가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떠나 방황하게 된다. 그는 수년간 여러 종교와 사상의 요소들이 통합, 절충된 교의를 지닌 마니교에 심취되었고 나중엔 철학자 플로티노의 학설에 매력을 느끼며 전향하여 그의 저서들을 탐구하였다.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한 여정 중에 헤매지만 한가지 집념 즉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늘 그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그는 383년 카르타고를 떠나 수사학 교수로 로마를 향하여 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실망하게 되고 이듬해 밀라노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인생의 대전환의 계기를 이루게 하는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나게 된다. 암브로시오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그를 다시 교회의 품으로 데려와 큰 일꾼이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예비해 두신 사람이었다(고백록 5, 13 참조).

 

아우구스티노는 밀라노에서 지내던 어느 날 숙소의 정원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집어라, 읽어라(Tolle, lege!)'라는 신비로운 음성을 반복해서 듣게 되고 뭔가 예사롭지 않은 직감에 주변에 있던 바오로 서간집을 집어 펴서 읽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의 구절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로마 13, 13∼14).' 이 말씀에 그는 철퇴를 맞는 듯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 대목은 바로 그에게 직접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으로 영감을 받으며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도록 했다. 그의 마음 자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로 인해 개종을 결심했고 새로운 태어남을 준비하여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387년 부활 전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는 36세에 사제품을 받았고 5년 후 주교로 축성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가 하느님을 벗어나 살아왔다는 비참한 현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그 순간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전향할 수 있는 회심의 은총을 받았다. 하느님을 떠나 그토록 방황하던 그를 한 순간도 결코 포기하시지 않은 그분의 사랑과 섭리의 고마움을 가슴 저리도록 깨닫게 된 것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아들의 방황, 진리의 추구, 하느님과의 만남과 회심 등 영성여정 가까이엔 어머니 모니카의 인고와 사랑 담긴 기도, 희생의 모정이 늘 동행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모니카의 삶은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스런 기도와 희생이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 받는다는 신비를 깨닫게 해주며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바라는 때와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우구스티노는 백성을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헌신한 좋은 목자로서, 호교론자로서, 교회의 학문을 발전시킨 학자로서 그리고 뛰어난 영성가로서 40여년간 봉사하던 중,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그가 교구장으로 있던 히포를 포위한 상태에서 즉 로마 제국의 붕괴와 몰락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사유를 철학적 체계 안에 정립한 철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였으며 굵은 선의 영성가였다. 그는 '신국론', '삼위일체론', '자유의지론' 등 100여권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서간과 설교문을 쓴 초기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며 저술가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늘 당대의 인물같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있다(삼위일체론 15, 8)'고 규정한 그는 사상적 방황을 하면서도 숨겨진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데 지칠 줄 모르던 '진리의 연인'이었다. 그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나이다.'(고백록 10, 27) 아우구스티노는 이단을 대면하여 사랑하는 교회의 정통성을 합리적으로 지키고 가꾸어 나간 훌륭한 호교론자였다. 그는 교회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주장하는 광신적 자세를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에게 인내와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본분을 교회에 일깨웠다. 그것은 그들을 정복하려는 정략적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들도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고 보살펴야 하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 교회의 본성에 맞갖게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사도 바오로 다음가는 큰 준봉을 이루는 신앙의 회심자였다. 그는 성서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가 존경하던 철학자들이 발견한 진리가 뛰어난 것일지라도 성서 저자들이 전해준 거룩한 계시에 관한 가르침과 비교할 때 무한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특히 바오로 사도의 글 안에서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에 대해 열정을 지닌다(고백록 7, 21 참조). 어느 날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예사롭지 않게 대면한 바오로의 로마서(13, 13∼14)의 일득은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사건만큼이나 그에게 극적인 회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말씀을 읽고 난 찰나, 내 마음엔 법열이 넘치고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 버렸나이다(고백록 8, 12).'

 

아우구스티노는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규칙서를 썼다. 그것은 사도행전 (4장, 32∼35)에 나타난 '사도적 생활'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의 수도생활을 구상하고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먼저 시작되어 서방에 소개된 동방의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이식한 것이 아니었고 성서적 바탕 위에 문화와 환경에 맞게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1999년 10월 10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우구스티노 (하)

 

 

3. 아우구스티노의 영성

 

아우구스티노는 애덕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로 완성되며 교회와 밀접히 연결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관한 신학과 가츠림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그의 은총론, 관상생활과 활동생활, 「사도적 생활」의 수도영성 그리고 수덕관을 살펴본다. 


3. 1. 의화와 구원 무상적 은총과 인간의 책임있는 협력

 

아우구스티노는 이설을 펴던 펠라지오학파와 호교론적 입장에서 논쟁을 하며 은총론을 정립한다. 펠라지오의 사상의 기본원리는 인간 자유의 자율성이며, 구원에 있어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며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자유가 소멸된다. 인간은 원죄와 그 결과 영향을 결코 받지 않으므로 근본적으로 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을 충분한 무죄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다. 은총은 영혼 안의 거룩한 삶의 원리도 아니고 인간의 능력에 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외적인 무엇일 뿐이다.

 

그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응답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그분과의 인격적 친교를 통해 친밀한 결합을 이루기 위해 창조하셨으며 초자연적 은총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첫 인간인 아담은 자유 의지로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으며 전(全) 인류의 조상 및 머리로서 죄를 지었기에 모든 인간은 그의 죄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상속받게 되었다. 원죄 때문에 인류는 타락의 집단이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하느님과의 선을 끊임없이 동경하지만 서을 성취할 자유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의화와 구원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의화의 첫 조건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지만, 그 신앙은 하느님의 「선재(先在)하는 은총」없이 불가능하다. 이설을 거슬러 이같이 은총의 절대적 주도권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자유를 적절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에 의하면 의화는 인간의 죄사함 뿐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면서 성화되어 하느님의 모상을 닮도록 한다. 그는 은총의 무상성(武償性)과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책임을 옹호하면서 영성생활에 요청되는 두 가지 중요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는 겸손, 믿음 및 기도의 실천을 통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애덕을 통해 은총에 응답하는 것이다. 애덕은 윤리생활 전체의 요약이고 그리스도교 완덕의 정수이다. 

 

3. 2. 관상과 활동생활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에서 지혜의 활동적인 면과 관상적인 면을 논한다. 활동적 부분은 덕 닦는 일에 속하며 관상적 부분은 진리의 고찰과 관련된다. 활동생활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에서 수행되다가 끝나고 관상생활은 영원히 하느님을 관상하게 될 끝없는 후세의 삶에 연장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신·구약성서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활 형태의 상징적 예로 든다. 한 예를 들면, 베드로 사도는 활동생활의 대표로, 요한 사도는 관상생활의 상징적 인물로 묘사한다(요한복음 논고 124,5 참조).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양쪽을 다 체험한 아우구스티노는 삶에 다양한 길이 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세 형태의 생활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관상적 생활 또는 진리 탐구의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사에 이바지하는 생활이며 세번째는 위의 두 생활을 조화시킨 형태라는 것이다. 이 세 형태 중 어느 것이 최종 목적 달성에 용이한 것인지 각자가 선택해야 한다. 한편 다른 어느 측면을 소홀히 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신국론 19,19 참조).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여 대접하던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의 자세를 활동생활과 관상생활에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서슴치 않고 완덕 진보에 있어 관상생활을 우위에 둔다(설교집 169,179 참조). 

 

3. 3.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 「사도적 생활」의 영성

 

아우구스티노가 구상하고 실천을 시도하던 공동체적 수도생활은 그의 생애의 네 단계 환경 변화 과정에 따라 변형되면서 발전하였다. 그는 386년 10월부터 약 8개월간 간카시치아쿰에 있는 한 친구의 별장에서 소수의 친구들 및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면서 성찰 및 묵상생활을 하였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한 그 반(半)은둔생활은 수도생활로 묘사될 수 없으나 그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

 

2년 후 그는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어느정도 윤곽잡힌 수도원 성격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391년 사제 서품 후 그는 본연의 모습으로서 첫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종들」이라 불렸고 재산을 공유하였다. 그는 주교가 되면서 자신의 거처를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구성원들이 공동생활하고 개인 재산 소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그의 교구사제 서품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그가 교구사제들이 공동생활, 청빈 및 독신생활을 실천하기를 주장한 이유는 사제들이 상호협력할 수 있다는 이점뿐 아니라 더 나은 기도와 연구 및 반성하는데 적합한 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생활에서 관상적 측면이 사목적 봉사 때문에 조정되면서 점차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동체에서 실천되던 사항들은 공동체적 및 개인적 기도, 침묵, 절제, 겸손, 순명, 순결, 청빈의 실천 등 전통적인 동방의 수도생활의 것과 많이 유사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덧붙여 형제적 사랑이 강조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수도원 제도의 구성원은 동방이 원래 의미의 「수도승(修道僧 : monk)이 아니라 뒷날 중세 서방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의미의 「수도자」(religious)라 할 수 있다. 동방의 수도생활이 영성지도자의 도움을 받으며 성숙시켜야 할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 즉 수직관계를 철저히 강조했던 데 비해, 아우구스티노의 수도생활은 공동체성의 가치에도 높은 관심을 기울이며 형제적 상호간의 관계 즉 수평관계를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3. 4. 수덕 : 엄격한 금욕주의

 

아우구스티노는 근본적으로 엄격주의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비판을 받는다. 그는 당시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퇴폐해 있었고 또한 자신이 젊은 시절에 향락적 생활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있었음을 절감했기에, 개종을 하면서 그러한 악습으로부터 해방되고 유혹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금욕자세를 취하고자 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개종이 마니교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졌을지라도 그의 영성에 마니교적 색조가 나타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체 대립의 이원론이 그것이다. 바로 거기에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영성이 나온다. 예를 들면 육신의 이끌림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몰아내든지 하는 것이다. 한편 수도생활에 대한 관념은 그러한 영성에 더욱 자극을 주었다. 단호한 희생만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유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개종의 과정에서 만났고 도움을 받은 신 플라톤 사상이그 안에 스며들어 영성적인 발견과 이해를 통한 감각적인 것의 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그의 금욕주의는 애덕의 발전과 사목적 관심에 의해 어느 정도 조절되기도 했으나 신비적 영감에 의하여 여전히 자극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노는 개종하면서 금욕적인 생활 외에 다른 어떤 형태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금욕을 실천한 어떠한 형태의 생활도(따라서 기존의 수도생활의 형태고) 따르려하지 않았다. 결국엔 그가 새로운 형채로 변형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수도생활이란 형태를 통해서 그것을 수행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1999년 10월 17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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