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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수치심 없는 사회: 왜 수치심을 느끼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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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17 ㅣ No.957

[경향 돋보기 - 수치심 없는 사회] 왜 수치심을 느끼지 못할까?


굶주림 앞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없다

6 · 25동란 때 국립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직원들이 서울이 함락된 뒤에 겪었던 일이다. 당시 경복궁 앞 중앙청에는 북한군이 진주하여 어마어마한 경비가 이루어졌지만 경복궁 뒤쪽의 박물관에는 거의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해서 박물관 직원들이 상주하면서 생명을 걸고 소장품을 지키며 하루하루 하늘만 바라보고 시간을 때우고 있던 시절이었다. 바깥에 나가봐야 북한군 치하의 시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전쟁도, 공포도 아니었다. 가장 큰 적이고 고통의 원천은 배고픔이었다. 식량을 따로 구해올 데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직원들이 모여 “끼니때마다 쌀 한 줌에다 된장을 섞은 물을 붓고 경복궁 뜰에 무성했던 개비름의 잎을 따서 함께 끓인 이상야릇한 죽”으로 연명을 해야 했다. 경회루 연못의 연밥도 따다 먹고 풀숲에 자라는 늙은 호박도 찾아다니는 비참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먹을 것을 찾아다니느라 직원들은 다들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어떻게 하면 다음 끼니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궁리로 날을 새워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경복궁 뜰 안에 난데없이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마 난리 통에 길을 잃고 먹이를 찾아다니던 떠돌이 개였을 것이다. 동물도 허기진 상태였지만 사람들은 더 핍진하였으므로 절반쯤 ‘원시인화’된 직원들 눈에 그 개는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로 보였다.

그래서 여럿이 각각 몽둥이 한 개씩을 들고 마당의 퇴로를 지키는 사이에 한 사람이 개를 한쪽으로 몰았다. 국립박물관의 일류 학예전문가들이 몽둥이를 들고 개 한 마리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아뿔싸 이를 어쩌나, 개는 죽기 살기로 도망쳐버렸고 사람들은 몽둥이를 든 채 망연자실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역사학자 김원용 선생의 수필집 「나의 인생 나의 학문」에 실려있는 ‘경복궁 식탁기’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선생은 당시에 겪었던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포복할 광경이지만 사람이 궁지에 빠지면 무슨 짓을 못하나 하고 새삼스러이 느낀 바가 많았다.”고 회고한다. 굶주림 앞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없어지는 게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부끄러움이 실종된 사회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필자 역시 젊었을 때 한번은 배가 너무 고파 골목길을 지나다가 아무 집이나 무턱대고 들어가 밥 한 끼를 청해 얻어먹은 적이 있다. 단칸방에 모녀가 저녁상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학생 같아 보이는 젊은이가 통사정을 하는 것을 듣더니 선뜻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식은 밥 한 그릇과 양은냄비에 담긴 김치찌개가 나왔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배짱이 어디서 났는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사람이 몇 끼만 굶으면 다른 고려사항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이 점잖지 않게 보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런 것을 진정으로 흉보기는 어렵다. 오죽 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고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듯 절박한 상황이 아닌데도 제 멋대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눈에 띄는 사례 몇 가지만 들어보자.

전철 안에서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흔히 만나고는 한다. 이야기라기보다 고함소리에 가깝게 목청을 높여 마음껏 떠들어댄다. 선교를 빙자해서 승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도 자주 본다.

도대체 저렇게 해서 정말 전도가 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휴대폰을 사용할 때에도 전혀 삼가는 기색이 없다. 큰소리로 고래고래 통화를 한참 동안 계속한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공개적으로 발설한다. 듣는 사람이 외려 민망하고 조마조마해질 정도다.

그뿐인가. 담배를 피우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아파트나 대학 캠퍼스에서 청소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 데나 침 뱉는 사람들 때문에 바닥을 청소할 때 화공약품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게 청소를 하면 건물이 부식되는 것은 물론이고 청소 노동자들의 건강에 큰 해를 끼치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세태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몇 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네, G20을 유치하는 큰 나라네 하는 자화자찬이 무색할 지경이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초보적인 일탈이 벌어지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끄러움이 실종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일반대중의 공중도덕 차원을 넘어 사회 지도층의 행태는 훨씬 더 심각하고 그 폐해도 크다. 돈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식의 오만함으로 무장한 부자들의 행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될 지경이 되자 갑자기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거나 수술을 받는다는 핑계로 입원해 버리는 사례는 이제 너무나 흔한 풍경이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방행을 모면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뻔뻔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 자체가 민망할 정도다.

최근에는 부정경선을 통해 당선되었으면서도 끝내 사퇴를 거부하고 당당히 국회의원이 된 일까지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를 밀어준 당원들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후안무치의 극이다. 하기야 제수씨 성추행 의혹을 받은 사람, 명백한 논문표절 학위 소지자조차 국민의 대표가 된 판이니 더 할 말이 없다.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 추진했던 정책을 다음 정권이 들어선 뒤 반대하고 나서는 것도 꼴불견이다. 그러면서 언필칭 상황논리를 내세운다. 일관성도 논리도 원칙도 없는 한심한 작태다. 사실 그렇게 치자면 최고 위정자부터 증세가 심한 ‘후천성 부끄러움 결핍증’을 앓고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키지도 못할 번지르르한 경제공약으로 당선되더니 특정 교회, 학교, 지역 출신들로 요직을 채우고, 그러면서도 이른바 공정사회를 내세운다. 4대강 사업을 “친환경 공사”라고 주장한 것은 기록에 남을 만한 궤변이었다.

이런 일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회이고, 그러면서도 그게 왜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희한한 세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한숨밖에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


양심을 지키면 불이익이 된다

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가? 몇 가지 복합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사회적인 차원에서 수치심이라는 규율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현실과 관련이 있다. 부끄러움이라는 내적 규율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외적 규율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양심을 지키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불이익이 되어 돌아오고, 부끄러움 따위는 잊고 뻔뻔하게 살아야 자기 이익을 지킬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수치심의 규율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

둘째, 돈이나 학력 등 몇몇 특정한 목표가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고, 그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 것을 오히려 권장하는 사회에서 내면의 부끄러움과 같은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잘 하면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 일류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그 사람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라도 무조건 성공길이 보장된다.’ 등등은 이미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규범’이 된 지 오래다.

셋째, 언론이나 여론주도층의 그릇된 상대주의적 태도도 문제다. 진실을 마치 민주적인 ‘토론’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인 양 오해하는 것이다. 몇 가지 사실관계만 확인하면 당장 진위가 드러나는 문제, 옳고 그름을 쉽게 가릴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조차 양쪽의 ‘의견’을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 중립성 논리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민주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과, 상식적인 차원에서 명백하게 잘못된 것에 대해서까지 중립을 지키는 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진실과 허위에게 공평한 발언권을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수치심 없는 사람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그들에게 “당신네가 틀렸다.”고 말했을 때 돌아올 반발이 두려워 진실을 말하기를 회피하는 비겁함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최소한의 도덕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최소주의적 가치관보다 최대한의 도덕을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최대주의적 가치관이 역설적으로 수치심의 결여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적어도 “이것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마지노선을 이야기하지 않고, “착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식의 모호하고 포괄적인 가치관을 설파하다 보면 오히려 가치관의 초점을 흐리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문영 교수의 고백을 들어보자. 이 교수는 과거 독재치하에서 진실을 말하다 몇 번이나 투옥, 해직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던 분이지만 자신이 결코 도덕적으로 뛰어나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의 자전적인 책 「겁 많은 자의 용기」에는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교수회의에서 발언할 때도 온몸을 벌벌 떨 정도로 겁 많은 성격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차마 버릴 수 없는 ‘최소’를 버릴 경우 자신이 타락의 길로 떨어진다는 걱정 때문에 옳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 ‘최소’는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와 같은 도덕적 수치심일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의 수치심이 효과적인 규율로 작동해야

관포지교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관중은 관자(管子)의 목민편에서 나라를 떠받드는 네 가지 덕목으로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들고, 이들을 사유(四維)라 불렀다. 예의바름, 의로움, 부패하지 않음, 부끄러움 등 네 가지 사유가 있어야 한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네 덕목 가운데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가지가 없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세 가지가 없으면 나라가 뒤집어지고, 네 가지 모두 없으면 나라가 파멸한다고 경고한다.

관자의 덕목 가운데 예의바름과 의로움은 최대치의 도덕률로 해석할 수 있고, 부패하지 않음과 부끄러움은 최소치의 도덕률로 볼 수 있다. 예의바름과 의로움을 지향하기 전에 적어도 부패하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인 ‘염치’가 기본으로 깔려있어야 하지 않을까. 염치를 모르는, 곧 파렴치(破廉恥)한 인간이 많은 사회는 예의바름과 의로움은커녕 그 사회의 존립 자체가 허약한 바탕 위에 서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수치심은 제대로 된 사회의 도덕적 ‘최소’를 이루지만, 수치심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수치심에는 내적인 수치심과 외적인 수치심이 있다. 내적인 수치심은 양심에 따른 죄책감으로 이루어지고, 외적인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으로 나타난다. 물론 사람에게 체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체면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관계 속에서 발현된다. 과도하게 체면만 생각하다 보면 위선적이 될 수도 있고, 진실보다 타인의 이목을 더 중시하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 체면문화는 허위의식에 가까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꼬집어 폴 에크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책감은 자기만 아는 것이지만, 체면의식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타인이 모를 경우에 체면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이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양심성찰에 따른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시선이나 대중의 평판, 더 나아가 제도 또는 처벌을 통해서도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실질적으로 높이기는 어렵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의 수치심이 가장 효과적인 규율로 작동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수준 높은 공동체이고, 이른바 국격이 높은 나라가 아닐까 한다.

* 조효제 토마스 아퀴나스 -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비교사회학으로 석사학위를,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사회정책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 펠로우,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저서로 「인권을 찾아서」, 「인권의 문법」, 「인권의 풍경」 등이 있으며 「머튼의 평화론」, 「세계인권사상사」 등의 번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조효제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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