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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의 해 결산: 사제,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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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6-27 ㅣ No.535

사제의 해 폐막 특집 - ‘사제의 해’ 결산 (끝) 한국가톨릭신학학회 제9회 학술대회

 

 

▲ 주제 : 사제, 어제와 오늘

▲ 기조강연자 :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19일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한국가톨릭신학학회’ 제9회 학술대회는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진단과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제,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는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가 기조강연을 했으며, 변종찬 신부(가톨릭대, 교부학)와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 교회법)가 ‘치프리아누스의 사체르도스(사제) 개념에 대한 이해’ ‘성직자 지도서를 통해서 본 선배사제의 삶’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사회는 김영규 신부(부산가톨릭대, 동양철학) 신동철 신부(대구가톨릭대, 교회법)가, 논평자로는 정승익 신부(인천가톨릭대, 교부학) 이정주 신부(광주가톨릭대, 교회법)가 각각 참여했다. 사제의 해를 보내며, 사제직의 ‘새로운 오늘’을 강조한 김희중 대주교의 기조강연을 요약한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전후로 우리 교회는 많은 성장과 결실을 거두었다. 2009년 교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신자 수는 512만 92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10.1%를 기록했다. 국민 10명 중 1명은 가톨릭 신자인 셈이다. 이는 신자 수 감소 내지 정체를 보이는 이웃 종교와는 달리 가톨릭교회는 2000년 4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해마다 2~3%씩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이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으로 ‘겨자씨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신앙에서 성장하여 ‘새가 깃들 정도’로 계속 성장할지, 아니면 과거 원나라나 일본의 초기 그리스도교처럼 허장성세(虛張聲勢)로 끝나게 될지 우리 모습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매년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쉬는 교우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7년 한국주교단이 교황님을 뵈었을 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한국 주교단에게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말씀을 하셨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쉬는 교우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주도록 부탁하셨고, 둘째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달라는 권고를 하셨다. 많은 기대를 걸고 교회를 찾아 입교하여 세례를 받고 기쁘게 생활하던 신자들이 얼마 안 가서 쉬게 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직자 수도자들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자신을 보다 솔직하고 냉철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의 문턱을 넘어선 그 순간의 첫 마음, 사제품을 받을 때 제단 앞에 엎드려 모든 성인호칭 기도문을 바치며 다짐했던 그 첫 각오의 정신과 마음으로 되돌아가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현재의 나를 들여다보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각자의 쇄신이 바탕이 될 때 한국교회의 쇄신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사제들이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로서보다는 사목 기술자요 공동체의 관리자로서의 기능이 더 부각되는 일은 없는가? 사도들은 ‘오직 기도와 말씀 전파에만 힘쓰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애덕활동까지도 포기하고 부제에게 맡긴 일은 오늘날 사제들에게도 기본적인 정신이 아닐까?

 

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목자로서 운영관리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생활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기도는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탯줄과도 같은 연결 관이라고 생각한다. 끊임 없는 기도를 통해 늘 주님과 일치해 있으면 주님의 뜻을 더 잘 식별할 수 있고, 주님 뜻대로 모든 일을 할 때 우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주님의 사제가 되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파하기 위한 설교와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고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생활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인간적인 사목 기술, 혹은 요령이나 소위 감(感)으로 눈치껏 사목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고 무책임한 ‘사람의 일’로 끝나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도하심으로 정확히 알아듣고 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 교회의 성전(聖傳)과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공인된 교회의 여러 학문들을 공부하는 기회와 자주 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듣고 이해하고 깨달은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복음을 더 힘 있게 선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즈음 바쁘지 않은 사목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쁜 삶이 열렬한 기도와 말씀선포 준비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부차적인 일 때문인가? 사목자의 영성생활과 그 본당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정도가 비례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대의 징표(Signum temporis)를 정확하게 알고 그 시대의 필요에 봉사할 수 있을 때 교회와 수도생활의 쇄신이 활성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강조하였듯이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는데’(‘사목헌장’ 4항 참조),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와 민족의 필요에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황폐화된 교육문제와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외된 자들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사목적 배려, 사회적인 갈등 요인이 되고 있는 여러 문제 등 교회가 아직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중요한 문제는 없는가?

 

‘무익한 많은 숫자보다 좋은 소수가 더 좋다’는 지베르띠(G.M.Giberti, +1543) 주교의 성직자 양성 기본원칙은 사회가 더 어려울수록, 성소자가 감소할수록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학교나 수도회에서 성소자를 받아들일 때 엄격하게 심사하고, 양성과정에서도 어지간한 흠이 없으면 무사히 통과될 정도의 느슨한 양성이 아니라 교회가 요구하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자만이 사제와 수도자로,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철저하게 양성하는 것이 교회의 미래를 밝게 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학생 양성에 있어서도 침잠된 깊은 기도에 맛들이기와 말씀 선포를 위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신학교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오직 기도와 말씀 전파에만 힘쓰기 위해서’ 온 힘을 집중하는 양성자들의 삶이 신학생들의 교과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7일, 정리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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