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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알빈 신부의 건축 발자취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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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24 ㅣ No.72

알빈 신부의 건축 발자취를 돌아보다


‘한국다움’ 살린 성당… 한국 신자와 소통하다

 

 

① 알빈신부

② 공사 현장에서 지도를 하고 있는 알빈신부. 알빈 신부가 건축한 대표적인 성당 건축물과 작품들

③ 점촌성당 내부

④ 대구 복자성당

⑤ 신기동성당

⑥ 지례성당

⑦ 의림동성당

⑧ 주교좌 태피스트리

⑨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성당 벽화(신암동)

⑩ 설계도를 그리는 알빈신부

⑪ 한복 입은 알빈 신부

⑫ 17일 김정신 교수가 연 ‘알빈의 생애와 건축’ 세미나 모습

 

 

한국을 사랑한 독일인 신부 고(故) 알빈 슈미트 신부(성 베네딕도회, 1904~1978).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이후 20년 동안 천주교 건물을 무려 185개나 설계한 그이지만 그의 건축 행적은 세월에 묻혀 잊혀진지 오래다.

 

올 11월 17일로 알빈 신부가 선종한지 딱 30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 전통문화를 살려 토착화된 양식의 성당을 설계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흔적들을 되짚어본다.

 

 

선교사의 삶

 

독일 뮌헨대학에서 미술사를, 베를린 프리드 빌헬름 대학과 빈 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한 알빈 신부는 대학 졸업과 함께 성 오딜리아 베네딕도 연합회 소속 독일 뮌스트슈바르차흐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사제로 서품된 지 1년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1937년 5월 6일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 북간도의 연길교구로 파견됐다.

 

알빈 신부는 그 곳에서 연길 임시성당의 장식을 담당했고, 용정 하시성당의 내부수리를 맡았다. 그는 하시성당 제대 주변을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들로 장식하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조선식으로 그려 신자들에게 많은 감명과 친밀감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신자들을 위해 기와집 모양의 상여마차를 고안해 신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그는 1937년부터 9년 동안 간도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나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 일반 사목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서 설계한 3개의 성당은 모두 한국 전통문화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어 한국적 건축물을 통해 신자들에게 다가갔음을 짐작케 한다.

 

 

건축가의 삶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의 공산정권은 연길 수도원과 본당에 있던 수도자들을 모두 체포했다. 알빈 신부도 역시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체포돼 남평 수용소와 하얼빈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했다.

 

그는 1949년 독일로 추방됐으며 독일로 돌아간 후 수도원 소속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했다. 알빈 신부는 틈틈이 벽화 제작에도 참여했지만 건축 설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바로크 양식을 옹호하던 당시 책임자들에게 그의 건축물은 매우 혁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알빈 신부는 1961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왜관 수도원에서 본격적인 건축 설계와 미술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한 건물 당 10~15장의 도면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추가 도면 없이 공사가 가능하도록 자세한 치수와 가구, 성물들의 스케치, 제작방법을 설명하는 스케치 등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형적인 성당 건축에서 벗어나 한국 전통문화를 건축설계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땅을 변경시키지 않고도(토목공사를 최소화했음) 건축물이 주변 대지와 잘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를 한 것이 특징이다. 성당은 높이 솟아 주변을 압도하는 곳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설계한 작품은 김천 평화성당(1958), 문경 점촌동성당(1959), 문경 가은성당(1960) 등 122개소의 성당과 공소를 포함해 총 185개소에 달한다. 휴가와 병환으로 수술한 기간을 제외하면 한해에 평균 10건이 넘는 건축물을 설계한 꼴이다. 특히 60세 무렵인 1963~1968년에 가장 왕성한 작업을 했으며 또한 가장 독창적인 성당 건물을 설계했다.

 

1978년 그는 75세의 나이로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세상을 떠난 한 해 동안에도 7개의 성당을 설계했을 정도로 ‘하느님의 집’을 만드는데 노력을 쏟아 부은 그는 한국 천주교 성당 건축의 근대화와 토착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오랜 기억에 묻혀 있었던 알빈 신부는 올 2월 제13회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김정신 교수가 알빈 신부의 생애와 건축이야기를 담은 ‘건축가 알빈 신부’(분도출판사)를 출간해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최근 알빈 신부 선종 30주년을 맞아 지난 16일부터 서울 역삼동 대우 푸르지오 밸리에서 ‘알빈 신부의 생애와 건축-하느님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알빈 신부가 한국에 남긴 성당 건축물뿐 아니라 독일에서 그린 삽화, 성당벽화, 어린 시절의 모습 등이 공개된다. 전시는 23일까지.

 

 

알빈신부 생애&건축 보여주는 전시

 

 

알빈신부 선종 30주년이 되는 11월 17일 오후 3시 서울 역삼동 대우 푸르지오 밸리에서는 알빈 신부의 생애와 건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 ‘하느님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이 열렸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주최, 단국대 건축도시기술연구소 종교건축연구실 주관으로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형우 아빠스와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이기헌 주교를 비롯해 가톨릭미술가회 이광미 회장, 김정신 교수 등 6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알빈 신부의 건축 작품과 벽화 등 다양한 사진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이형우 아빠스는 “성당을 설계하면서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전례를 잘 흡수해 표현한 알빈 신부님의 공덕을 이렇게 세상에 알리게 돼 기쁘며 앞으로도 알빈 신부님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 개막식에 앞서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학과)는 ‘알빈의 생애와 건축’을 주제로 세미나를 마련했다.

 

김교수는 세미나를 통해 “알빈 신부의 건축물들은 일상적인 공간의 의미를 가지면서도 기능적이고 밝게 설계돼있다”며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이념들을 한국교회에 심었다”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23일,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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