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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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 영성의 기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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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8 ㅣ No.16

수도승 영성의 기본 원리들

 

 

"수도승 소명이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반적으로 수도승 공동체의 삶에 대해서 불려지는 '관상생활'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살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하여 전적으로 봉헌된 삶이다. 그것은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한 삶이며, 겸손, 순명, 침묵 그리고 기도의 삶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갈망들과 방식들을 포기하며, 우리의 장상들과 규칙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또한 당신 은총의 영감으로 우리 마음 안에 말씀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인도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시어 당신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자기-봉헌의 삶이다(11쪽).

 

 

1. 당신은 무엇을 찾는가?

 

'너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기를 중단한 수도승은 아마도 수도승이 되기를 중단했을 것이다(13). 우리가 찾고자 하는 목표는 단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 부가되는 어떤 개인적인 자질이나 어떤 새로운 은총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다. '너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이 묻는 것과 같다. 즉 '하느님을 찾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는 네가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아느냐?

 

그분이 사실상 감추어진 하느님일 때 너는 그분을 찾고 있는 것과 찾고 있지 않는 것과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14) 우리의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다. 우리는 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고 그분의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의 활동에 참여하며,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경배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치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분은 우리 전 삶의 의미이시며, 수도승 생활의 전 실체이시다. 만일 우리가 이 위대한 핵심 진리를 망각한다면 수도원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누구인가?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육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말씀이시다.

 

모든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회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수도승 생활은 지상에서 강생의 신비를 연장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영혼 속으로 그리스도의 빛과 사랑을 엄청나게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더 충만하게, 더 완전하게, 그리고 더 완벽하게 살고자 수도원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수도원에 오는 것이라고 결론 지울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고 알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서 살고자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에 의해서 살아 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거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2. 말씀이 육이 되셨다

 

수도승 생활의 전 의미는 강생의 신비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성령의 활동에 의해 인도되는 수도원 에 온다.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생명이다(15). 우리 삶의 목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분의 몸인 교회의 삶을 더욱 더 깊이 사는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강생을 지상에서 계속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말씀이 육이 되셨다. 이 진리는 우리 수도승 생활의 초석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묵상하는 하나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살아야 하는 하나의 진리이다. 우리의 전 삶과 우리의 모든 활동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즉 세상, 천사들, 우리 형제들, 성부 그리고 성령을 보고 알고 사랑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너는 왜 여기 왔느냐?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분은 전부이시다. 전부이신 그분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알고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서 모든 것을 발견해야 하며, 그분 안에서 성부를 발견해야 한다. 사람이시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의 새로운 세상 즉 하나의 새로운 창조가 되셨으며,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수렴될 것이다.

 

천상에서 다스리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성화된 인간성은 교회를 통하여 그와 접촉하는 모든 이를 영성화 하는 항구한 성화 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말씀이신 예수를 찾는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피조물들 안에서 그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그분이 창조하신 언덕, 들판, 꽃들, 새들, 그리고 동물들 안에서 또한 하늘과 나무들 안에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안다면 자연은 그분과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교회는 물질적 사물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잘 말해 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전례에서 그것들을 사용한다. 즉 교회는 촛불, 향, 제의, 음악을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상징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하느님의 은총이 직접 성사들 안에서 우리 영혼에 주어지는 수단들로서 물질적 사물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강생의 신비의 빛 안에서 모든 물질적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이 육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을 존중해야 한다. 기도의 사람인 수도승은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수도원이 실재함으로서 널리 확산되는 축복을 통하여 세상이 성화되어 하느님께로 인도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은밀한 결합을 통해, 자신이 모든 사물을 그들의 궁극 목표에로 더 가까이 가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의 창조주께 영광을 드린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

 

창조된 세상은 하느님의 성전이다. 수도원은 그 성전 안의 제대이며, 공동체는 장막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은 성부께 사랑과 찬양의 경배를 드리며 영혼들과 모든 사물을 성화 하시며 공동체 안에서 현존하신다. 따라서 수도승 생활 안에서 우리의 감각들은 파괴된다기 보다도 오히려 길들여지고 고양된다. 만일 우리의 눈이 '새로운 인간'(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뀐다면, 그 눈은 더이상 '옛 인간'의 욕망과 편견으로 사물들을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에 의해서 정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감각들을 억제하면서 수도승적 금욕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그들에게 주어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들조차 영성화된다(16-19).

 

 

3. 부활의 자녀들

 

수도승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생활의 심층부에 위치한다. 수도승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사람'이다. 영성생활은 그리스도의 정신인 교회의 정신으로 생활하고 행동하는 것이다(23). 금욕생활은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의 긍정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다. 성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의 전 의미를 요약한다. '여러분은 영을 따라 걸어가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육의 욕정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라 5,16). 

 

여러분은 바울로가 먼저 금욕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인 '영을 따라 걸어가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하나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그리고 즉각적인 결과로서 '여러분은 육의 욕정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는 부정적인 부분이 따른다(24).

 

공동생활 안에서 베네딕도회의 겸손의 길은 한마디로 우리로 하여금 '영을 따라 걸어가도록' 도와주는 최선의 길이다. 성 베네딕도 자신이 규칙서 7장 끝부분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서 베네딕도회 삶의 전 목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여금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행위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26).

 

 

4. 하느님의 자녀이며 상속자

 

수도승 금욕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어제나 그 부정적인 면보다 더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일은 육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자아를 비울 때 그만큼 우리 안에 성령의 생명인 새로운 생명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우고 정화하는 일을 수행할 수 없었다(로마 8,29).

 

우리가 수도승 금욕주의와 겸손과 순명의 결실인 마음의 순결에 도달할 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임을 우리 정신에 증언해 주신다'(로마 8,16).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신비 속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선에로 들어갔다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확신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들이다(로마 8,17).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인도를 받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이다(로마 8,14).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기쁨, 확신, 즐거움 그리고 내적 자유로 생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들의 영은 자유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박과 공포의 영이 아니며 또한 그럴 수도 없다. 자유의 영은 천상 예루살렘과 교회의 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영이다(갈라 4,21-31).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성 바울로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는 무어라 기도해야 마땅할지 모르기' 때문이다(로마 8,26). 교회 안에서 성령의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의 그윽한 마음에 이르게 하며, 그분께 무한한 영광을 드리는 확실한 기도는 바로 전례이다. 전례 중에 그리스도 자신은 당신의 거룩한 백성 한가운데에 대사제로서 현존하신다. 교회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그것은 구원과 성화 그리고 구속의 기도이다. 전례 중에 우리는 분명히 우리 구속주이시며 성화자로서의 예수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례의 핵심인 미사 안에서이다. 

 

미사 특별히 수도원 미사는 바로 수도승 생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미사 중에 수도승 공동체와 미사를 봉헌하는 모든 구성원들은 제단 위에서 현재화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 행위의 신비 안에서(27)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모든 미사에서 성령의 새로운 생명인 하느님 자녀들의 생명은 우리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이신 거룩한 대사제의 희생제사에 참여함으로서 우리 안에 새롭게 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수도승적 희생의 핵심이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수도승이 되는 것은 미사와 전례 안에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껏 찾아온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성부의 뜻에 순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우리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은 거기서 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 노동은 우리의 순종을 실제적으로 표현해 준다. 우리는 모든 소임을 하느님의 뜻으로서 본다. 손 노동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이자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협력자들이 된다. 곧 우리는 그분의 신적 섭리의 도구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그분을 돕는다. 마침내 우리의 손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도록 도우며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원조에 공헌한다. 따라서 우리는 순명으로 성부의 뜻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애덕으로 굶주리고 헐벗고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먹이고 입히는 것이다.

 

전례를 살아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독을 해야 한다. 여기서 역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고 발견한다. 전례 안에서와 같이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발견한다. 성령께서 성독 중에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수도승 생활 안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다루어 온 중요한 주제들을 성서에서 보도록 가르치신다. 곧 말씀이 육이 되셨고, 성령에 의해 그분 안에서 생활하는 '완전한 사람들'을 당신 자신과 일치시키시는 신적 구속주,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성부께 결합되었다는 것 등이다.

 

성독과 전례적 찬양 안에서 수도승은 개인으로서 또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간구하며, 한 인격으로서 또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전례 중에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어떤 것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전례는 결코 우리를 기계처럼 그저 하느님을 찬양하는 로보트로 만들 수 없다. 반대로 전례적인 찬양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한 지체들로서 완전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적인 내적 기도이다. 전례와 개인기 도 간에 대립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28). 만일 전례기도가 개인적이고 내적이지 않다면, 또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자유와 내적 정신으로부터 그리고 불가침의 영역인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의지로부터 자발적으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기도가 아니다.

 

전례, 성독 그리고 개인적인 관상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화된 우리 삶에 모두 함께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대치 될 수 없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들 모두 안에서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찾고 발견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오직 전례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 전례는 형식적인 것이 될 것이다. 혹은 그는 백일몽이나 잠에 빠져들 것이다. 만일 그가 오직 일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는 활동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한마디로 모든 수도승의 기도의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수도승의 전 금욕생활은 그것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양상 안에서 그 자신과 그의 전 삶 그리고 다섯 가지 서원에 의해서 하느님께 그가 가진 모든 것과 자신의 전 존재에 대한 봉헌으로 요약된다. 수도승의 삶은 서원의 삶이다. 이 서원들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수도승다운 생활로의 전향'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수도생활적인 것들로 자신의 전 삶과 모든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 다. 수도승다운 생활개선으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세속적인 야심, 안락, 쾌락(30), 재물 그리고 자기만족을 수도 생활의 겸손, 정결, 가난, 포기로 대체한 수도승들로서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우리의 전 삶을 바친다. 

 

순명은 우리의 전 삶 안에 서 하느님을 대리하는 다른 사람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자신의 뜻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정주는 이곳 저곳 여행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며 또한 죽을 때까지 우리를 한 수도원에 묶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과 정결은 RB 안에서 분명 하게 언급되지는 안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수도승적 생활개선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수도승의 규율에 있어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5. 그리스도의 정배

 

겸손, 순명, 전례기도, 고행, 손노동, 관상으로 이루어진 수도승 생활은 수도승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여 그를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즉 하느님 말씀과의 혼인을 합당하게 준비시키는 거룩한 동정성에로 인도한다. 이 영혼의 '동정성'은 우리 소명인 관상 생활의 참된 본질이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혼의 동정성은 '마음의 순결'로서, 그것으로서 우리 영혼은 세례 때의 무죄함 또는 우리 서원의 두 번째 세례의 무죄함을 유지하며, 완전한 순결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리스도의 정배인 동정성을 지닌 영혼의 삶은 말씀 자체의 순수하고 맑은 광휘 속에서 사는 삶이다.

 

영적인 동정성은 격렬함이나 긴장에 의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첫 단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자아와 우리의 전 존재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다. 즉 영혼과 육체, 정신과 본능, 감정과 의지 등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 대한 수용으로서 이는 균형 있고 영성화된 인격의 조화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함이다(31).

 

우리 수도서원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삶 안에 우리를 정주시키는 것이며, 또한 죽을때까지 모든 것 안에서 끊임없이 그분의 뜻에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정성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들 중 하나이다. 정결은 육체에 의해 타락된 존재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며 가난은 물질적 소유에 대한 욕망과 우리 자신에 대한 격정에 의해서 우리 영혼이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정주는 우리로 하여금 여행하고자 하는 욕구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게 한다. 순명은 '자 기 뜻'의 타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수도승다운 생활개선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우리의 전 삶을 하느님께 정향함으로서, 영적 동정성에 직접적으로 향하게 한다. '수도승다운 생활개선' 서원은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서원이다. 

 

말씀에 우리를 결합시키는 영혼의 동정성은 수도승 생활의 완성이다. 그것에 의해 수도승은 인간적인 결혼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실재를 추구한다. 결혼은 단지 '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영혼을 결합시키는 사랑의 일치를 뜻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실재에 대한 외적인 상징이다. 영혼의 동정성은 영혼을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과 하느님 자신의 성성과의 지속적인 접촉 안에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거룩한 동정성은 교회와 교회의 거룩한 배필인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가시화 해준다.. . 이것은 수도승 소명의 목적이자 완성이다. 

 

전 수도승 생활은 우리에게 강생하신 말씀을 주신 동정 성모 마리아 안에서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영위되어야 한다. 그녀는 수도승 영성의 모범이자 요약이다. 교부들은 그녀를 '수도승들의 규범'으로 불렀다 - 수도승들의 규범인 마리아. 그래서 '성령 안에' 사는 삶은 영적 동정성의 삶이다(32).

 

'성령 안에' 사는 것은 효과적으로 성령의 신부인 마리아 안에서 그리고 마리아에 의해서 사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 삶의 움직임은 그녀의 모성적 마음에 의해서 방향 지워진다. 우리의 여왕으로서 마리아를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은 그녀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활동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것이다.

 

종교를 믿는 많은 영혼들이 선한 일들을 행하고 다소 덕스러운 삶에로 나아간다. 그들은 과실들을 피하고 완전을 위하여 노 력하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라기 보다도 그들 자신의 욕망과 뜻에 의해서 더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들은 물론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분을 뒤로 젖혀둔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지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한 다음 그분의 승인을 얻기 위해 행한 것을 그분께 보고 드린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며, 그런 다음 의무적으로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실까? 그분이 그것을 받아들이실까?' 묻는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동정성이 아니다. 

 

동정인 영혼은 그 자신의 뜻이나 계획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 영혼은 자유롭고 집착이 없으며,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다가 오시어 당신의 주도권을 기다리는 텅비고 자유로운 의지를 발견하실 수 있다. .. 영적인 동정성은 단지 다른 존재들에 대한 비움 또는 부재가 아니다. 여기서 다시 동정성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 동정성은 단지 피조물로부터 자유롭고 이탈된 존재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결합된 전재에 있다.

 

영적 동정성의 완성은 영혼과 말씀과의 신비적인 결혼이다(3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소명이다.

 

 

6. 결론

 

수도승 생활은 영혼들을 위하여 이 일 또는 저 일을 완수하는 하나의 파견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수도승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과 비례하여 교회 안에서 그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서로 다른 지체들로서 성령 안에 그리고 완전한 사랑 안에 함께 생활함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또 개인으로서의 우리 안에 생활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함께 하느님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의 소명은 기도와 희생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만일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수도승이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삶을 특징짓는 모든 안락, 야심, 관심사들을 유지하면서 타협의 정신으로 수도원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된 회개와 자신의 전 삶의 전향없이 수도승적 규율들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로 우리 전 존재의 전적인 재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수도승은 하느님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의 세상을 경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유지한다(34). 그들은 세상 한가운데서조차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섬기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아마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찾으셨다.

 

 

7. 변화하는 세상 안에서의 수도승(35)

 

수도승들의 전망과 영성은 그 부수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시대마다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적인 것들, 예컨데 고독, 가난, 순명, 침묵, 겸손, 손노동, 기도, 관상에 있어서 수도승 영성은 불변한다(36). 수도승의 역할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세상 안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의존하시지 않는다. 수도승들에게 조차 의존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시대에 있어 수도승의 역할은 하느님과의 접촉에 의해서 자기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돈, 권력 그리고 과학 앞에서 굽실거리는 반면, 수도승은 세속적인 수단들을 뿌리치며 가난, 겸 손 그리고 전능하신 분께 대한 신앙에 자기 자신을 투신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계를 숭배하고, 자신을 위한 일에 열광적으로 종사하는 반면, 수도승은 손노동으로 생활하면서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유익한 활동은 '영적인 일'인 '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물질적인 요구와 욕망의 노예가 된 세상이 격정으로 그 자체를 미치게 하는 반면, 수도승은 신적 사랑의 '안식일'에 평화로이 머물기 위하여 고통을 딛고 올라선다(37). 

 

다른 모든 사람들이 커다란 문화적, 정치적 투쟁의 긴박함에 넋이 빠져 있는 우리 시대에 수도승은 그의 주된 역할인 하나의 수도승이 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즉 하느님의 사람 다시 말해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에 의해서 생활하는 사람 이 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도승은 오로지 이 의무를 수행함으로서만 수도승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있는 풍부하고 생명력 있는 것을 보존할 수 있다.

 

수도승은 진정한 수도승이 되기 위하여 인도주의적 이교주의의 공통된 도덕적 차원을 뛰어 넘어야 하며, 하느님께 중심이 놓여진 신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순수한 신앙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희망의 삶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전 삶을 이러한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방향으로 또 그리스도의 한 교회의 일치에로 집중시켜야 한다.

 

투쟁의 어두움 속에서, 수도승은 영혼의 모든 힘을 다하여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 그리고 교회의 성화하는 능력에 매달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교회와 함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한마디로 모든 시대에 수도승의 소명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안에 사악함이 판을 칠 때, 수도승은 영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야만적인 기술문명이 활개치는 이 밤에, 수도승은 공기를 정화하는 생명의 현존을 통하여 어둠 속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나무 와 같이 되어야 한다"(38).

 

(T. Merton, The monastic journey, CS 133: Kalamazoo, Michigan, 1992, 11-38쪽 부분번역)

 

[출처 :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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