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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인도의 시로말라바르 교회: 식민지화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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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5

[세계 교회는 지금] 인도의 시로말라바르 교회 : 식민지화의 고통

 

 

다양성의 교회

 

우리 한국교회가 속한 교회는 이른바 로마 가톨릭이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란 뜻이다. 그러나 이를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로마 가톨릭의 라틴 전례 교회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널리 퍼진 라틴 전례뿐 아니라 여러 동방전례 교회도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이라 하면 언뜻 단일성을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은데 사실은 다양성 안의 일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특히 인도교회에서 두드러진다. 인도교회에서도 물론 라틴 전례를 치르는 교회가 다수이다. 그러나 시로말라바르 전례와 시로말란카라 전례를 치르는 동방전례 교회도 함께 모여 하나의 인도교회를 이룬다.

 

이 가운데 시로말라바르 교회는 신자수 350만, 시로말란카라 교회는 약 30만, 그리고 라틴 전례 신자수는 1,200만여 명이다. 모두 합쳐 사제수는 약 24,500명인데, 수도회 소속이 13,800여 명으로서 교구사제 10,800명보다 더 많다.

 

두 동방전례 교회는 이름 앞머리의 ‘시로’에서 알 수 있듯이 크게 보아 시리아 전례에 속하는데 열두 사도 가운데 토마스 사도가 서기 52년에 인도에서도 남쪽 끝 부분인 케랄라 주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한 데 뿌리를 둔다.

 

현재 인도교회는 이 두 동방전례 교회와 라틴 전례 교회가 각기 별도의 시노드와 주교회의를 구성하여 독자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직속되며, 일종의 합동회의 격인 인도 주교회의에서는 전례를 제외한 다른 전국적 관심사와 기타 공동관심사에 대해서만 논의할 뿐 각 전례교회는 독자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의 교회

 

서양 중심의 세계사 가운데에는 ‘바스코 다 가마’라고 하는 포르투갈의 유명한 항해자가 있다. 그는 아프리카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필리핀 교회에게 마젤란의 존재가 그렇듯이, 인도교회에게, 아니 인도의 라틴 전례 교회에게는 바스코 다 가마야말로 인도에 복음을 전해준 첫번째 복음전도자이다.

 

그는 1502년에 지금 케랄라 주의 주도인 코친에 상관을 설치해 식민활동을 시작했다. 이곳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그가 인도에 왔을 때 이곳에는 이미 1500년 동안이나 인도문화에 동화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실천하고 있던 시로말라바르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자들은 점차 자신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 동방전례 교회를 자신들의 ‘선진적’인 포르투갈식 교회로 바꾸려고 노력했고, 시로말라바르 교회는 라틴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식민주의에 반발한 일부는 1653년에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해 시로말란카라 정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 1930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 복귀하여 로마와 일치한 시로말란카라 전례교회를 이룬다. 시로말란카라 전례교회는 로마와 일치한 동방 가톨릭 21개 가운데 가장 늦게 들어온 막내다.

 

 

현지화 선교정책의 빛과 어두움

 

1920-30년대에 가톨릭 교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적극적인 선교를 위해 이른바 현지화 정책을 폈다. 백인 선교사들이 아닌 현지인 사제 양성과 주교 서품이 장려되었다.

 

한국에서는 1928년에 전주교구가 처음으로 한국인을 교구장으로 하는 이른바 방인(邦人)교구가 되었다. (방인이란 우리 나라 사람이란 뜻이다.)

 

당시 교황청에서 일본의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닌 것으로 판정하여 허용하고 덩달아 우리 한국교회에 질곡이 되어왔던 제사금지 문제가 풀린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때의 교황인 비오 11세는 현지화에 관심이 매우 컸고, 동방 정교회와 일치를 확대하는 데에도 크게 애를 썼다. 그리하여 그는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사실상 라틴화된 인도의 시로말라바르 교회가 다시 “초기 교회의 온전한 아름다움과 유산”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시로말라바르 교회는 고대의 칼데아 전례(Chaldean liturgy)를 “복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에 대한 찬반논쟁이 지금까지 시로말라바르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 갈등은 흔히 현대파와 전통파로 나뉜다. 이 둘의 대립과 갈등은 아주 심각해서 주교와 사제, 신자들이 공공연하게 파벌을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최근 들어 이 갈등은 미사를 드릴 때 집전 사제가 제대를 보느냐 아니면 신자들을 보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다 알다시피, 라틴 전례 교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사제가 제대와 신자들 사이에서 신자들을 등 뒤에 둔 채 제대를 향해 미사를 드렸다. 그러나 개혁의 결과, 이제는 사제가 제대를 사이에 두고 신자를 마주보며 미사를 드린다. 이는 공동체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뜻을 강화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과 성찰은 인도에 있는 동방전례 교회인 시로말라바르 교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황청은 사제가 제대를 바라보는 “옛모습”을 지원하는 듯하다.

 

지난 1999년, 시로말라바르 전례교회 시노드에서는 이 문제를 “사제는 제대와 신자들 사이에 선다. 미사 시작에서 성찬기도 전까지는 사제가 신자들을 마주보고, 성찬기도에서 영성체 전까지는 신자들을 뒤로하여 제대를 바라보며, 다시 영성체부터 미사가 끝나기까지는 신자들을 마주본다.”는 절충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일부 사제들은 이 절충안을 논의하는 시노드 회의장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시로말라바르 교회는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실질적인 자치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써왔다.

 

지난 1987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로말라바르 전례교회에 주교회의를 구성하도록 허용했다. 이어 1992년에는 동방교회법에 따라 상급 대주교좌(major archbishop) 자치(sui juris)교회로 인정하고 독자적인 시노드를 구성하여 행정을 독자적으로 하도록 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법상 시노드가 가진 상급 대주교 선출권은 교황에게 유보해 두었으며, 주교 임면권과 전례에 관한 결정권도 주지 않았다.

 

[경향잡지, 2001년 2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연합통신(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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