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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2주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강론자료

2012-0415...주일...토마스 사도가 잘못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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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4-14 ㅣ No.1217

부활 제 2 주일 (나해)

사도 4,32-25 1요한 5,1-6 요한 20,19-31

2012. 4. 15. 등촌3. (2000년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제정한 하느님 자비주일)

 

주제 : 토마스 사도가 잘못한 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세상에 드러난 모습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삶을 이렇게 저렇게 나누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기도 하고, 내 맘에 드는 사람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기도 하며, 멋있는 사람과 멋없는 사람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는 그 사람과 앞으로 내가 어떤 관련을 맺을 것인지 아주 중요한 판단기준이 됩니다.

 

내가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내 맘에 드는 사람이어야 하고, 멋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한꺼번에 다른 사람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기 때문이고, 부분으로 나누어서 판단한 다음에, 하나로 합친 것처럼 보는 것이 판단하는 일에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 2번째 주일, 예수님의 부활대축일과 그 축제의 크기가 같다고 말하는 부활8일 축제기간 주일이고, 부활대축일에서부터 8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활8일 축제기간의 평일미사 동안,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그 내용과 그 말씀을 여러 입장에서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여러번 나타나시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다른 얘기로 듣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제자들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은 예수님이 나타나신 횟수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의 행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적대자들에게 스승님을 팔았던 제자(=유다)도 있었고, 수난의 고통을 겪으시는 스승님을 멀리에 두고 나는 저분을 모른다고 말한 제자(=베드로)도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자기들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보다는 먹고 사는 일과 관련된 것을 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스승님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들(=엠마오의 제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것을 가리켜, 학문에서는 코페르니스적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또 그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의 이름을 딴 발상의 전환이라는 낱말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도 우리가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일에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만, 신앙에서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일은 세상의 논리만으로는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은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봐야 변화가 오는 것일까요? 물론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쪽을 더 먼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똑같이 세상에서 변화를 체험할 수는 있더라도 신앙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일은 대단히 굼뜬 사람입니다. 경험을 얘기하는 세상에서 그것이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사람은 신앙의 심성이 아주 깊은 사람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도 될 것입니다.

 

오늘 부활대축일로부터 8일째가 되는 날,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된 특별한 일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토마스 사도와 관련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다시 말해서 한 주간 전 부활대축일 날 저녁에 해당하는 시간, 10명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닫고, 잠가놓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자리에 토마스사도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로 바빠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 토마스 사도만 그 자리에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그 사실을 전해들은 토마스는 신앙의 마음자세로 스승님을 따른 사람이었는지가 궁금하게, 세상의 일을 중심으로 살던 사람처럼 말합니다. ‘나는 내 손가락과 내 손을 이용하여 그분 몸에 손을 대보기 전에는 믿을 수도 없고, 부활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놀라운 일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면서, 우리 역시도 토마스 사도와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다시 한 주일이 지나서 토마스사도가 신앙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무리에 들어간 것은 고려할 가치가 적은 일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논리로서 온전히 해석할 수는 없는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인정했던 10명의 사도들이 잘못한 일은 없다고 하겠지만, 요즘 우리들처럼 후대에 사는 신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본 다음에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하는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 본보기가 사도행전 4, 오늘 1독서 말씀에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내어놓았으며, 필요한 것만큼 나누어 받았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사회주의를 제창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기들의 이념이 통할 본보기와 이상향의 세계로 삼은 것이 오늘 읽은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고는 합니다만, 그 말씀을 듣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남들에게 물어야만 아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자세로 세상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미사에 함께 한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개인적으로 판단할 일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삶의 방향은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같은 진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시시때때로, 세상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한 사람이라면,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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