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오병세 쿠니베르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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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17 ㅣ No.1040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오병세 쿠니베르트 신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덕원 수도원, 1912년 7월 2일 생,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 블라시오
첫서원 : 1934년 5월 14일
사제 서품 : 1939년 4월 30일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2년 6월 14일, 옥사덕 수용소


오병세 쿠니베르트(Kunibert Ott, 吳炳世, 1912-1952) 신부는 1912년 7월 2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에델슈테텐(Edelstetten)에서 아버지 미카엘 오트와 어머니 요세파 피셔 사이에서 태어나 블라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17년에 전사하였다. 그의 부모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쿠니베르트 신부와 그의 누나 한 명이 수도성소를 받았다. 그의 누나는 우르스베르크(Ursberg)에 있는 성 요셉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했으며 이름난 교육자였다.

쿠니베르트 신부는 1923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3년에 도나우 강가에 위치한 딜링엔(Dillingen)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으로 옮겨 공부를 마친 후 수도원에 입회했다. 1933년 5월 12일, 쿠니베르트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고 1934년 5월 14일에 첫서원을 발했다. 첫서원을 한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부설 신학원과 뮌헨 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1937년 5월 17일 종신서원을 발한 직후, 덕원 수도원으로 선교파견이 결정되었다. 사제품을 받지 않은 그가 서둘러 선교사로 파견된 것은 날로 악화되는 독일의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독일은 1935년 중반부터 이미 조직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하고 있었다. 18세 이상 25세 이하의 젊은 남자들은 6개월 동안 ‘공익사업 실현을 위한 노동 봉사단’에 참가해야 했다. 처음에 신학생들은 이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나, 오딜리아 연합회는 젊은 신학생들이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예상하고 여덟 명의 신학생 수사들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우달리쿠스 자일러(Udalricus Sailer, 孫永昌, 1912-1948) 수사, 군터 하이글(Gunther Heigl, 許傑東, 1910-1992) 수사가,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안스가리오 뮐러(Ansgar Muler, 毛安世. 1913-1987) 수사, 요셉 쳉글라인(Josef Zenglein, 宋萬協, 1911-1991) 수사, 안셀모 벤츠(Anselm Benz, 范安治, 1911-1996) 수사가, 그리고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에서 미카엘 퓌터러(Michael Futerer, 郭美傑, 1912-1998) 수사, 가브리엘 프룀머(Gabriel Frommer, 權東旭, 1911-1999) 수사가 그와 함께 조선과 만주로 파견되었다. 1937년 10월 28일, 덕원 수도원에 도착한 쿠니베르트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덕원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했다. 1939년 4월 30일, 그는 덕원 수도원에 배속된 3명의 동료, 우달리쿠스 신부, 가브리엘 신부, 요셉 신부와 함께 서울 대목구장인 아드리앵 요셉 라리보(Adrien Joseph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덕원 수도원장이며 원산 대목구장인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는 유럽과 미국 순방 중이었다. 사제서품 후 그는 고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고 이어서 공산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선교활동은 대폭 제한받았다. 토지개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긴 덕원 수도원은 각 본당으로 신부들을 분산시켰다. 이때 카누트 다베르나스(Canut Graf des Effan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와 권영욱 마오로(1909-1952) 수사가 고산 본당으로 왔다. 사제관과 성당을 빼앗기고 신자들도 떠나간 본당들도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는 마오로 수사와 함께 밭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1949년 5월 11일, 새벽 그는 가누트 신부와 함께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원산으로 압송되었다. 비슷한 시각에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의 선교사들도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각 본당에서 체포된 선교사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1951년 엘리지오 콜러(Eligius Kohler, 景道範, 1899?1963) 신부가 책임자 자리를 내놓은 후 공동체는 그를 후임자로 뽑았다. 동료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무거운 배식통을 산 위의 일꾼들에게 날랐다. 육체적 곤경에도 그는 늘 평온하고 즐거워했으며, 아이처럼 밝은 웃음은 온 수용소에 울려 퍼지곤 했다. 심한 발작을 두 차례 일으킨 다음 그는 병자성사를 받았는데, 사망 8일 전이었다. 한 시간 후 그는 수용소를 돌아다니며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다시 좋아지고 있잖아요.” 6월 13일 금요일, 그는 혼자 미사를 봉헌하고 두 시간 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밤에는 격렬한 고통에도 동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1952년 6월 14일 5시 30분, 미사 시작 시간에 선종했다. 그의 죽음은 공동체에 결코 채울 수 없는 빈자리를 남겨놓았고 그의 유해는 옥사덕 수용소 내에 묻혔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산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芬道通史(분도출판 사, 2010년)

[분도, 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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