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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2015년 예비자교리 5--천주교에 대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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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7-19 ㅣ No.1410


 

5. ‘천주교에 관하여--(1)

 

2015-0612 금요일. 이태원

 

1. 오랜만에 뵙죠? 성지순례를 다녀오느라 5월에도 2번을 건너뛰었고, 사제연례피정을 다녀오느라 지난 주간에 또 1번을 건너뛰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장시간(!) 건너뛸 일은 없습니다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또 알 수 없으니,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해야 할 일의 순서만 남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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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시간까지 저는 여러분에게 이 예비자교리시간을 시작하면서, 천주교신자들의 모임에 언제나 하는 시작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에게 사용한 시간의 내용은 서론이라는 소리를 하면서, 서론에 서론의 성격만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기 위해서, 미사에서 공식적으로 환영인사를 한지(4/12), 꼬박 2달이 됐습니다. 이제는 서론을 위한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3. 이제는 본론을 시작한다면서도, 아쉬운 것이나 걱정은 있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사람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일찍부터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 말을 몇 차례 강조한 것은 제가 하는 일이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말하고 그 책임에서 도망치기 위한 방법은 아닙니다.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제가 할 수 있는 한, 성실히 노력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한 것을 말로 설명은 하겠다는 약속에, 여러분도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을 충실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손이 두 개가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이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 편이 기세가 좋게 움직인다고 해도 다른 편에서 그것을 따를 생각이 없다면, 그를 통해서 아무런 힘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시간은 흐르니까 정해진 끝에는 도달하겠지만 그렇게 지낸 시간의 결과는 내 삶에 그다지 의미는 없을 행동이 될 거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불상사(不祥事)가 생기지 않도록 여러분의 저와 함께 하는 이 시간에 성실한 자세를 부탁하겠습니다.


4. 여러분과 제가 함께 지내는 이 시간은 신앙에 관한 것을 사람이 사용하는 말로 설명하고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표현이겠습니까?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신앙(信仰)이라는 낱말의 뜻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이라고 나옵니다. 우리말사전에 나오는 표현이니, 그 설명만으로는 이 시간을 대하는 낱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다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전에 나오는 이런 설명 외에 그 의미를 좀 더 다른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5. 신앙(信仰)믿을 신(), 우러를 앙()’이라고 그 글자의 (,=한자의 새김)(,=사람이 말하기 위하여 내는 소리)을 말합니다. 이렇게 한자의 음과 훈을 말하면,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낱말 뜻 외에 좀 더 설명하는 말이 될까요

 

6. 한자로 표현된 낱말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 시간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을 만나면서, 이렇게 자꾸만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을 것이고, 한번 설명한 말을 다른 말로 또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제가 하는 말을 나름대로 판단하면서, 그 의미를 여러분의 삶에 연결시키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믿음에 대한 것, 여러분에게 제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의 첫 부분은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것입니다. 용어로 이렇게 구별하는 천주교에 대한 상대적인 표현은 개신교(改新敎)입니다. 개신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하여, 천주교는 이러이러한 모임이요 공동체이다.......라고 알려주는 것이 첫 번째 부분의 의미입니다. 이 시간에 개신교가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천주교에 대한 올바른 것을 알려드림으로써, 그렇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 개신교이고, 다른 공동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시간이면 될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다른 표현으로 이 말을 설명할 것입니다.


7. 한자로 표현하고, 그것을 한글로 읽은 천주교와 개신교, 두 가지를 합쳐서,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표현이 따라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하신 행동, 그 의미를 알아듣고 그 일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반복하거나 재현(再現,=다시 나타나거나 나타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공동체, 신앙의 단위를 그리스도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8. 그리스도교는 지금부터 대략 2000년 전쯤에 생겼습니다.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라는 사건이 있은 지 10일 후에, 대략 서기305월 하순 쯤에 생긴 최초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수도인 곳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생겼을 2000년쯤 전에 세상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었고, 그 위치와 상황도 로마제국의 속국/로마제국에 점령된 지방의 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교회라고 불리는 공동체가 생긴 것도 어떤 뛰어난 사람의 능력을 발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인 성령의 작용때문이라고 신앙공동체에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하느님의 힘인, 성령에 대해서는 훗날 말할 시간이 있을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이고,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분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9. 이렇게 생긴 교회공동체는 하느님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가운데 머무는 공동체인 관계로, 사람들의 행동에 아주 밀접한 영향을 받습니다. 즉 그 전파(傳播)라든가, 발전(發展)이라든가, 분열(分列)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이, 전혀 영향을 받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그리스도교회 공동체가 영향을 받고 그 모습들이 드러나는 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政治)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몇몇 사람들이 드러내는 삶의 태도에 아주 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것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10. 그리스도교회는 처음에 유대교라는 공동체를 모태(母馱)로 해서 출발했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거치면서 형성됐습니다. 그게 최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역사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된 이 그리스도교회는 훗날 지금의 이스라엘땅을 점령했던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전파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발전합니다. 그러던 것이 로마제국이 정치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지면서, 동로마(그리스도)교회와 서로마(그리스도)교회로 자연스레 갈라집니다. 그러다가 서로마제국이 먼저 멸망(476)했고, 동로마제국과 그곳에 있던 동로마그리스도교회는 좀 더 오랫동안 유지(~1563)했습니다만, 정신사적으로는 정치와 외형적으로 결별했던 ()서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회가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결국 1563년에 동로마제국은 지금의 터키 땅을 중심으로 생겨난 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멸망하게 되고, 그 땅에 있던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훗날 러시아정교, 혹은 동방교회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됩니다. 정치와 연결된 내용만을 얘기했습니다만, 다른 분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11. 제국의 멸망과 함께 쇠퇴의 길로 가게 된 동방정교 혹은 러시아정교는 종교의 범위와 역할에서도 그 규모가 아주 작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주도권에서도 먼저 멸망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있던 로만 가톨릭보다 밀려납니다. 의미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힘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로 알아들으면 될 듯합니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서로마제국 로마에 본거지가 있던 로마가톨릭/그리스도교회는 다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정치의 영향은 줄어들었거나 사라졌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서로마제국이 민족의 대이동 때문에 멸망하고, 다시 여러 나라로 분리됩니다. 지금의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이 차지하는 여러 제국으로 분할됩니다. 그러면서 독일, 어느 지방의 수도자로 살던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이 지금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던 그리스도교회가 잘못된 길을 간다고 비판(1517)하면서, 반기(反旗)를 들었으나, 그 소리가 올바르게 수용되지 않고, 결국에는 서로마교회(=서로마제국과 함께 하던 서로마그리스도교회)가 둘로 쪼개집니다. 하나는 로만가톨릭으로 남고, 다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혹은 개신교)로 갈라집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사람의 세상을 찾아오시어 성립된 교회가 쪼개졌다는 것이 합당한 표현은 아니고, 인간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의 교회가 같은 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2. 그렇게 해서 드러난 모습이 하나였던 그리스도교회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천주교와 개신교로 그 모습을 달리 드러냅니다. 사람의 생각이 드러났고, 사람이 주도권을 쥐려는 싸움 때문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만, 두 개로 갈라진 신앙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같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성령이 서로 다른 2개의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하느님의 성령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2개로 갈라진 교회를 따로따로 세웠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큰 문제이고, 정말로 큰 잘못입니다. 1500년 정도의 세월동안 서로마교회, 그리스도교하나로 유지해 온 교회와 공동체가 둘로 갈라진 것이고, 뒤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처음부터 있었지만, 이렇게 뒤늦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다면 보통이상의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13.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이라고 불리던 그리스도교회가 유지해온 신앙의 여러 가지 내용들 가운데서 몇 가지 내용들을 절묘하게 빼고 제거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었고 그래서 결국 교회는 분열의 길로 가게 됩니다. 뒤에 생긴 그리스도교회, 즉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회)는 구약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유대교를 따르고(=히브리어 39), 하느님께 인간이 나아가고 다가서는 은총을 얻는 방법에서도 성사(聖事)에 대한 것을 아예 무시하며, 1500년의 역사가 앞서 있었던 서로마그리스도교회가 유지해온 여러 가지 모습과 다른 모양을 갖춥니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체를 구별하는 유명한 말(=sola)이 몇 가지가 생깁니다. 마치도 먼저부터 있었던 그리스도교회공동체, 가톨릭(=천주교)이 대단히 잘못된 모습을 지니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마교회가 보존하고 유지해온 수많은 진리(眞理)와 교리의 내용을 왜곡하고 반대합니다. 후발주자였으니, 선발주자를 극복하려면 오직 그 방법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훗날 생긴 그리스도교회인 개신교(=프로테스탄트-증거하다,항의하다)는 세 가지 중요한 이론을 말합니다. 라틴말로는 <솔라 피데이, 솔라 스크립뚜라, 솔라 그라시아>라고 표현하고, 그것을 우리말로 알아들으면,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회의 더 오랜 역사를 간직하는 가톨릭에 그런 모양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천주교회가 가졌던 몇 가지 특징을 호도하기 위해서 다른 표현을 쓴 것뿐입니다.

 

14. 가톨릭이라고 해서, 믿음(<<-->>실천)을 무시하지 않고, 성경(<<-->>전승)을 모른 체하는 것은 아니면, 은총(<<-->>인간의 응답에 해당하는 행동)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주장한 것은 천주교에서도 이미 중요한 것으로 강조해왔던 분야를 자기들의 용어로 강조한 것뿐입니다. 마치도 천주교회에서는 그런 내용을 전혀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15. 이런 특징을 보인 개신교회는 1517년에 독일을 중심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창시자, 사실은 분열자라고 말할 마르틴 루터역시도 가톨릭교회의 아우구스티노수도회 수사이자 신부요 사제였다는 것이 참으로 난해한 문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옳고, 자신이 교회를 대항하여 주장한 것이 옳다는 뜻으로, 가톨릭과는 달리, 수도자요 수녀로 살던 사람과 결혼을 했고,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을 세상에서 대리하던(!) 사제에게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던 고해성사/화해성사를 대성통곡(大聲痛哭)’하거나 자신의 삶을 (속으로라도) 그저 드러내기만 하면 모든 죄는 하느님에게서 직접 용서되고, 하느님을 대리하는 사제는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 자리에서 어떤 이론이 옳고 그르고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16. 이렇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개신교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유지하던 그리스도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자, 가톨릭은 공의회(=주교님들의 회의)를 통하여 올바른 믿음과 삶의 자세, 교리를 정립(定立)합니다. 개신교가 분열돼 나간 뒤, 개최된 공의회는 트리덴티노공의회였습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있었던 회의였고, 거기에서 정한 신앙의 내용들을 여러분에게 신앙교리의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이, 이 교리시간의 진행방법입니다.


17. 천주교회의 교리는 세부분으로 나눕니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내용이나,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제가 연구한 바도 없고, 일찍이 들은 바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해서는 아는 척을 하지 않겠습니다. 천주교회의 교리는 믿을 교리편지킬 계명편 하느님의 은총인 성총을 받는 방법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구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이라고 해서 더 중요하다거나 어떤 부분이라고 해서 덜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신앙의 본래 내용을 설명하는 첫 부분, ‘믿을 교리편에 나오는 내용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 믿을 교리편은 111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믿고 따라야 할 항목이 바로, 믿을 교리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선택적으로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하는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내용이란, 사람의 이해를 바랄 수는 있어도 사람의 온전한 수긍(首肯)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모든 것을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났느뇨?

()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났느니라.

 

18. 첫 번째 문답항목은

첫 번째 문답에서 말하는 내용은 정확하게 신앙의 내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의 기본교리는 사람이 태어나는 문제부터 다룹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이유나 목적을 듣고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태어나고서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잘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나서, ‘, 내가 태어난 것의 의미는 이러저러한 것이겠구나!’하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경험의 과정을 거치기 전에, 처음부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얘기하는 것은 신앙에서 하는 대답 말고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신앙도 가톨릭의 신앙이 아닌,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경험이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답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에서 이런 문제를 질문한다면, 신앙에서 하는 이런 대답을 빼면, 우리가 어디에서 이와 같거나 비슷한 대답을 얻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19. 사람이 태어난 목적이 천주(=앞으론, 하느님이라고 쓰겠다)를 알아 공경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무한한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사람의 삶에 대한 내용에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할까요? 이때 말하는 인과관계란, 원인을 말하고 그 다음에 그 원인에 따른 결과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대상이 되는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야 정확하게 공경할 수 있고, 하느님을 공경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곧 행복이라는 논리가 첫째 문답교리항목에 담겨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교리는 사람들의 온전한 이해를 전제(前提)로 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그 중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 질문에 따른 대답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20. 과학의 발전에 따라 사람의 탄생은 난자와 정자가 합쳐지고, 그로 인해서 합성된 세포가 RNA에 담겨있는 유전자정보에 따라 꽤나 많은 분열을 반복한 다음, 그렇게 생긴 여러 가지 세포들이 다양한 기관으로 분화되고 나뉜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지식이 발달한 지금은 그런 사실이 놀라운 것도 아닌 상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현상을 흔히 유전자정보에 따른 실현이라고 간단히 말합니다만, 신앙에서는 세상이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되는 과정이나 원인을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난자와 정자가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전자장보를 담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작은 난자와 정자가 어떻게 해서 유전자정보를 담을 수 있었느냐고 질문할 때, 사람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이며, 그렇게 유전자정보가 그 안에 담기게 된 과정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나름대로 과학에서는 대답을 하겠지만, 이런 주장을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이겠습니까? 때로는 온전한 사람, 때로는 몸이나 어떤 기관이 불편한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아쉬운 생각을 말할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바라는 대로 그 모든 일이 완벽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사람이 하는 생각이 정말로 완벽할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이 앞서야 합니다

 

21.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사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사람이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돈이 많으면 행복한 것일까요? 혹시라도 그렇게 바랄 돈은 많은데 그가 그 돈 때문에 세상에 사는 목숨의 기간이 줄어든다면 그 돈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행복과는 반대의 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질문과 대답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결과론으로 삶을 해석하느냐, 목적론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아주 많은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질이나 여러 가지 조건들에서 해석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자유이겠지요? 그렇게 드러낼 수 있는 자유는 우리는 어떤 때에, 어떤 모양으로 드러내겠습니까?

22. 그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영혼이라는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영혼은 무엇일까요? 영혼은 있기나 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 영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靈魂)은 신앙의 용어입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이 낱말을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의미<불교용어: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의 본원이 되는 실체>라고 나오고, 둘째 의미<그리스도교: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정신>이라고,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말사전에 나오는 설명이 영혼이라는 대상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영혼은 어떤 것이 됐든지 눈에 보이는 대상도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설명 외에, 제가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신앙교리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릴 내용은 영혼이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영혼의 유래(由來)를 사람이 지성으로 확인했거나 지식으로서 알아낸 내용은 아닙니다. 경험(經驗)이전의 지식이라고 해서, 철학의 용어로는 선험적(先驗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거나 사람의 삶에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23. 이 영혼은 육체와 함께 생활(!)하다가, 세상에 태어난 육체의 생명이 다하고 스러질 때가 되면, 그가 출발(!)한 곳인 하느님에게로 돌아가, 그 육체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 육체가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듣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이끌었는지에 따라 판단과 평가를 통하여 천국과 지옥과 연옥에 들어가도록 심판을 통해 판결이 정해진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신앙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24. 훗날 다룰 내용입니다만, 이러한 판단을 죽음이후에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사심판(私審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물론 그 현상을 세상에 살아있는 그 어떤 사람도 체험한 바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경험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신앙의 용어이며, 신앙의 세계에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5. 이렇게 심판에 관해서 말하는 내용을 우리가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까요? 물론 자유입니다. 세상에서 산 내 삶이 왜 다른 이의 심판을 받아야하느냐고 묻고 대답을 찾을 수도 있고, 신앙에서 말해주는 이러한 대답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인간이나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하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사람의 세상이 아닌, 하느님의 세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6. 내가 세상에서 산 결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심판하고 판단할거라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드러냈으니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개인의 몫입니다. 너무나 큰 자유를 말했나요? 삶을 두렵게 대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태도는 아무래도 신앙세계와 신앙의 내용을 우선으로 말씀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더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전제로 말씀드리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판단을 하시겠습니까 

2. () 사람이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할 것이뇨?

() 사람이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 봉행(奉行)할지니라.

 

27. 두 번째 항목은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앞부분에서 천주교회 혹은 가톨릭의 역사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첫 번째 항목을 완성하기 위한 조건은 반드시 천주교회와 연결해서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교회의 다른 분파인 개신교의 가르침과 논리와 신앙의 내용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개신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르치는지, 그들은 무엇을 따라 살아야한다고 신앙의 논리를 제시하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갈라지면서 시작된 것이고, 2000년의 역사보다 월등히 짧은 500년 정도가 되며, 천주교회에서 유지해온 아주 많은 내용들 가운데, 자기들의 입맛에 따라 거부하거나 선택적으로 취합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딱히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8. 천주교(天主敎)라는 표현은 가톨릭이 중국을 통해서 전래될 때, 중국에서 그렇게 부른 표현을 발음대로 읽은 것입니다. 중국문화에서 으뜸이었던 최고의 존재를 상제(上帝,=하느님)라고 했는데, 그 대상과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라는 대상을 일치시키면서 나온 현상입니다. ‘하느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29. 이전 시간에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기독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신자들은 자기들은 기독교이고, ‘천주교는 마리아교라고 부르기를 무슨 벼슬을 딴 것 마냥 사용합니다. 하지만, 기독교(基督敎)라는 글자는 영문자로 된, 그리스도(=CHRIST)()를 묘사하기 위한 중국식한자를 그냥 우리말로 읽은 것일 뿐입니다. 별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것은 알려주어야 하겠지요? 사람이 삶의 완성을 위하여, 즉 신앙을 통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따라야 할 종교와 신앙의 가르침은 천주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여, 거기에서 가르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저 듣고 마는 가르침이 아니라, 행동으로 연결되고 드러나야 한다는 것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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