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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농민사목] 피로사회 탈출, 귀농: 귀농을 생각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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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646

[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귀농을 생각하는 당신에게


저는 올해로 14년째 시골생활을 하고 있어요. 귀농에 대해 구체적이거나 체계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무작정 덤벼 시작한 생활이 어느새 10년하고도 3년이 더 지났네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저는 시골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잠시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제 마음속에 남아 시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누군가 제게 ‘커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일단은 도시에서 돈을 좀 벌고, 그러고 나서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 거라고 대답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 뒤 저는 부산 아미본당에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배우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귀농생활은 이미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도시에서는 딱 3년만 살고 농촌으로 들어가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남편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가 자식한테 물려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푸른 하늘과 깨끗한 땅과 맑은 물을 물려줄 수밖에 없으니 농촌에서 살아야지요. 농촌도 비닐하우스 농사나 농약 뿌리는 들판이 아니라 몇 가구밖에 살지 않는 산골 마을로 들어가서 그분들과 함께 삽시다.”


대책 없는 귀농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직장생활을 해서 모은 전세금 1,500만 원을 들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책 없는 행동이었지요. 어디에 정착해서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지만, 성당 가까이에서 살겠다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소 주소록을 보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고, 두 아이를 데리고 무주, 함양, 산청, 의령으로 두루두루 다녀보고는 여기 함양 우전마을에 자리를 잡았답니다.

그리고 셋째를 낳았을 때, 아기 울음소리를 10여 년 만에 들어본다는 동네 어르신들은 경사가 났다며 매우 기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14년이 지난 지금은, 3명의 자녀가 더 늘었고, 농사 규모도 커졌습니다.

한때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수입은 늘 부족하고, 자녀들은 늘어나고….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마산교구 본부에서 사무국장을 하시던 서정홍 선생님의 권유로 칡을 채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날씨가 좋을 때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요. 아무도 돌보지 않은 탓에 무성한 칡넝쿨이 나무 주위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삽질을 몇 번 하면 어느새 칡줄기가 모습을 드러냈지요.

이렇게 캐어온 칡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칼로 얇게 잘라서 양지바른 곳에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상품이 되더군요. 우리에게는 칡이 효자노릇을 해주었답니다.


농촌생활이 주는 교훈

도시생활과 농촌생활을 비교해 볼 때, 농촌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과 함께라서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편한 점도 많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는 교통편이 안 좋고 병원이 멀어서 애태운 적도 많고,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도시를 동경할 때는 해줄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도시에서의 경험이 전혀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제가 만일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커서는 절대로 시골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골은 고단함과 가난이 함께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귀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 고단함은 저를 성실하게 만들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은 제게 인내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여유를 줍니다. 거북이보다 느린 것 같지만 토끼보다 빠른 것이 계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기를 놓치면 수확할 때 결과물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실함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저는 그런 성실함이 부족해 늘 뒤처져 있답니다.


또래가 그리운 아이들

네살, 다섯 살,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여섯 아이가 모두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학교로 가고 나면 저는 잠시 휴식도 취합니다. 그런데 마을에는 우리 아이들 또래가 없어서 우리 아이들이 참 안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작은 시골학교에 그나마 몇 안 되는 동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입니다.

농촌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실감하게 됩니다. 요즘에는 우리 마을에서도 교육문제 때문에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는 젊은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면 소재지보다는 읍내 학교로, 내가 사는 지역보다는 다른 지역의 좋은 학교로 자녀들을 보내고 있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걱정되기보다, 친구들이 없어 외롭게 학교생활을 할까 봐 걱정입니다.

그나마 우리 아이들이 여섯이라 자기들끼리 놀면서 사회성도 키우고, 어려운 문제는 서로 물어보며 공부도 하고, 이제는 제법 농사일도 도울 줄 알게 되어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세상 어떤 일보다 가치 있는 유기농법

사람 사는 건 시골이나 도시나 별다른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랬듯이 처음 이곳에 와서 지내는 일은 서먹서먹하고 어렵지요. 지금처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들 편안히 잘 지내기까지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답니다.

가끔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마운 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올해는 집 앞에 8마지기가 도지로 들어왔습니다. 물대기도 좋고 일하기도 가까워서 아주 좋습니다. 지금은 여기에 벼가 자라고 있습니다. 벼 추수가 끝나면 양파를 심을 것입니다. 양파 농사를 지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유기농법은 어렵습니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네요.

경제적인 보탬이 될 듯하여 양파즙 가공도 고려하고 있지만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주님의 도움으로 잘 지내왔으니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귀농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시골 와서 같이 살자고 많이 권유하였습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귀농을 말립니다. 농사를 업으로, 생계 수단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구조적인 여러 가지 문제도 참 많거든요. 유기농이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지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직업보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해가 거듭 될수록 더욱더 확고해집니다. 저 자신도 이 일을 선택한 것이 자랑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모했지만 이 길을 선택한 것에 감사드리며, 저 개인의 성숙한 삶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점점 재미가 붙어갑니다.

얼마 전에는 평화신문에서 기획하는 ‘나눔의 기적’에서 마산교구장이신 안명옥 주교님이 자선경매 물품으로 백자를 내놓으셨는데, 그 낙찰대금 일부를 저희에게 주셨어요. 이렇게 늘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저희도 이웃을 생각하며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답니다.

우리 곁에서 커가는 벼를 비롯하여 모든 작물이 다 우리 가족 같습니다. 모든 산과 들판과 언덕과 개울과 맑은 공기와 나무들과 꽃들이 늘 우리 곁에 있으니, 마음 하나만은 넉넉하고 든든합니다.

하느님 만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 늘 즐겁습니다.

* 채심례 클라라 - 1999년 경남 함양 우전마을에 귀농하여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6남매의 엄마이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채심례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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