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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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훈화27: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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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8 ㅣ No.131

레지오 마리애 훈화 (27)


39.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교본 제39장:408-462면)
 
10)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은 금지한다; 11) 돈을 걷는 일; 12) 레지오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교본 436-440면); 27) 사리사욕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28) 단원들에게 금품을 주어서는 안 된다(교본 455-456면)
 
레지오의 물질적 구제 금지 규정은 최초의 레지오 회합에서 결의된 규율이다. 그것은 물질적 자선 단체인 빈첸시오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취지였다.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가 비록 빈첸시오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영신적 자선 활동 단체임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물질적인 자선보다도 영신적인 자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레지오가 아무리 영적인 활동만 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들게 마련이므로 매주 회합에서 비밀 헌금을 실시하여 기금으로 사용한다. 레지오에서는 영신적인 구제 활동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에 대해 직접 물질적인 구제를 하지 않는다.
 
물론 레지오는 물질적 구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결코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하지 않는다. 다만 레지오의 이름으로 비밀 헌금을 사용하면서까지 직접적으로 물질 구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지오는 구청이나 동사무소 또는 빈첸시오회나 본당의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등의 적절한 기관과 단체를 통하여 물질적인 구제를 한다. 그러나 영적인 활동만 한다는 규율 때문에 단원들이 당장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때를 놓쳐 버리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므로 고쳐야 한다. 레지오 활동은 영육이 결합된 인간을 구하는 것이지 영혼만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 생활에서나 활동 중에 우연히 만난 불우 이웃을 영혼 구제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물질 구제 활동으로써 애덕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물질적 자선과 애덕 실천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되며(마태 25,31-46 참조), 물질적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말로만 위로한다면 행동 없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야고 2,15-16 참조). 그런데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자선의 정신이므로 주회에서는 물질적인 자선 활동은 보고하지 않는다.
 
레지오는 영신적인 유익을 모든 이에게 가져다 준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영리를 추구하지 못하며 단원들이 레지오 안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 없다. 단원들끼리 계 모임을 하거나 금전 관계를 맺거나 다단계 판매 등의 상행위를 하는 것은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레지오의 정신과 순수성을 저해하므로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레지오의 기금을 단원들의 경비에 사용하지도 못한다. 레지오에 필요한 모든 경비와 자금은 오로지 단원들의 의무적인 비밀 헌금에 의존한다. 본당이나 교구의 보조를 받거나 모금을 하지도 않는다.
 
레지오는 정치에도 개입할 수 없다. 레지오는 정치적 목적이나 특정 정당을 돕기 위해 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장소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레지오 조직이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레지오의 근본 취지와 순수성은 깨어지고 만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은 투표에 참여하여 국민의 의무인 참정권을 행사해야 한다. 비록 레지오 이름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교회 밖의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해 정당한 사회 참여는 할 수 있다. 예컨대 자연 보호 운동, 도덕성 회복 운동, '생명 31' 운동 등 생명의 문화를 만드는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 사항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레지오가 불우 이웃이나 활동 대상자에게 물질적인 구제 보다는 영적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원리로 창설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레지오 안과 밖에서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17) 레지오 단원은 활동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께 봉사한다; 18) 성모님은 레지오 단원을 통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사랑하고 보살피신다; 19) 겸손하고 정중한 레지오 단원에게는 어느 집이나 문이 열린다(교본 443-447면)
 
이 항목들은 가정 방문 활동을 할 때 활동 대상자를 그리스도로 여겨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를 가정 방문 활동에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는 레지오 봉사와 활동의 기초이다.
 
레지오의 상훈 셋째 대목에서도 '레지오 단원은 활동 대상자 안에서 성모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다시금 보고 섬기시듯이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단원들은 가정 방문 활동을 할 때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대상자도 차별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드러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레지오 단원은 활동 대상자 하나 하나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고 존경하며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레지오 단원은 활동 대상자 안에서 주님을 뵙고 알맞은 봉사를 드려야 한다.
 
단원들이 활동 대상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또는 종이 주인을 찾아뵙는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방문자가 은덕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신비체 교리에 입각한 봉사 정신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방문 대상자를 감화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언제나 나환자를 견디기 어려운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길에서 나환자와 마주쳤다. 나환자의 흉측한 몰골을 보고 살 썩는 냄새가 오감을 찌르고 마치 눈이나 입으로 세균이 침입해 들어 올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나환자에게 바짝 다가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나환자를 와락 끌어안고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비로소 기쁨과 자신감이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그 순간 진정으로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놓고 환자에게 미소지었다. 그의 미소에 응답하는 듯한 상대방의 반짝이는 눈을 보자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베푼 것 이상의 것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나환자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껴안았던 것이고 그분께 기쁨과 사랑의 은총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늘 그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평생 동안 실행에 옮겼다.
 
성모님도 성자께 쏟았던 사랑이 신비체의 지체들에게 베풀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왜냐하면 성자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성모님의 임무는 모든 지체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모든 지체를 보살피는 사명을 수행할 때 당신을 도와줄 레지오 단원들을 부르신다. 성모님은 레지오 단원들을 통하여 당신의 아드님과 그 지체들을 사랑하고 보살피신다.
 
레지오 단원은 가정 방문을 할 때 무슨 권리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집 주인의 호의에 따른 것이므로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고 방문 용건을 말하면 어느 집이나 문이 열릴 것이다. 단원들은 친교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방문 대상자가 친근감과 호의를 가질 수 있도록 옷차림이나 말씨도 검소하고 소박해야 한다. 그 집에 자녀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면 쉽게 대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다. 그리고 방문을 마치고 돌아 올 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인사를 함으로써 재방문의 길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21-22) 레지오 단원은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악평에 대한 태도(교본 448-451면); 26) 쁘레시디움과 단원들의 결점을 보는 태도(교본 454-455면)
 
대인 관계에서 쉽사리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남의 잘못은 금세 눈에 띄기 때문이다. 레지오 단원은 활동을 할 때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활동 대상자들 가운데는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그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을 더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단원이 그런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표준이나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레지오의 사명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된 일이다. 자신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 7,1-2)라고 하셨다. 판단은 레지오 단원의 몫이 아니고 하느님의 몫이다. '남을 고쳐 준다고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격언이 있다. 잘못에 대해 충고해 주다가는 오히려 반발심과 반감을 사게 되어 단원들의 사도직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기 쉽다. 남을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세 손가락은 반드시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남이 한두 번 잘못하면 자신은 세 번 잘못한다는 뜻이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다. 남의 잘못을 보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판단하고 반성해야 한다. 프랭크 더프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비결은 상대방의 결점을 보지 말고 장점만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그것을 발설하기보다 마음속에 간직하는 분이셨다. 레지오 선교사 에델 퀸은 남의 결점이 눈에 띄었을 때는 반드시 성모님께 의논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침묵 중에 기도해 주고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여 칭찬해 주도록 해야 한다.
 
반대로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 중에 사람들로부터 터무니 없는 말이나 악평을 듣게 될 경우에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지향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악평에 대한 두려움으로 활동이 마비되어서는 안 된다. 열심한 단원들은 남들의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본보기는 열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기심과 반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단원들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
 
단원들이 쁘레시디움과 동료 단원들의 결점을 보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므로 쁘레시디움과 단원들 역시 단점과 결점이 있다. 단원들은 그들의 결점에 대해 참을성을 발휘해야 한다. 레지오는 주회를 통해 단원들을 수련하고 그들의 영적 수준을 향상시킨다. 그런데도 출석률이 저조하고 활동 실적도 거의 없고 세속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단원들이 있다. 그런 단원들에게 인내심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쁘레시디움과 단원들은 자신들의 결점을 줄이고 영적 수준이 향상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개인 성화와 봉사 정신을 강화해야 한다. 개인 성화와 봉사 정신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단원들은 쁘레시디움과 동료 단원들의 결점에 대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23) 결코 낙심할 필요는 없다; 24) 십자가의 표지는 희망의 징표이다; 25) 성공은 기쁨이며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이다(교본 451-454면)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고사(故事)가 있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사는 레지오 활동에도 해당된다. 단원들이 활동할 당시에는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훗날에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원들이 쉬는 교우, 혼인 장애자, 외짝 교우 배우자 등을 대상으로 영웅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활동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다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인간의 생각과 꼭 같지 않다. 단원들은 씨뿌리고 가꾸는 데만 정성을 쏟아야 한다. 열매 맺는 일은 하느님의 몫이다. 활동이 실패했다고 생각되면 오히려 그것을 성공이 연기된 것으로 보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시도해야 한다. 단원들은 실패를 믿음에 대한 시련과 십자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과 십자가가 없다면 더 많은 결실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하여 단원들이 쉽고 부담 없는 활동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주님 사업은 주님의 표지(標識) 곧 십자가의 표지를 지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쓴 잔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고난의 쓴 잔을 받아들여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으로 올라가셨다. 이것으로써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며, 짊어지고 가야만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는 십자가를 대단히 사랑하였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실행하고 싶었기 때문에 어떠한 십자가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주어지는 모든 십자가를 기쁨으로 여겼다. 그는 십자가를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의 벗들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십자가의 벗들]이란 저서도 남겼다.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한 후 레지오 사업과 활동을 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예컨대 매춘부들의 주말 피정, 노숙자들과 미혼모들을 위한 숙박소 운영, 주일 무료 급식소 운영, 레지오의 첫 번째 해외 확장 활동으로서 스코틀랜드 대주교로부터의 레지오 설립 인가, 최초의 남성 쁘레시디움 설립, 레지오 공인 교본 발행 문제 등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벽과 역경에도 그는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바위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끈기, 성모님께 대한 굳건한 신심으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십자가의 표지로 보았고 동시에 십자가의 표지를 희망의 징표로 보았다.
 
단원들의 가정 방문 활동 경험에 따르면 가톨릭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냉담자라 할지라도 호의와 온정을 가지고 방문하는 단원들에게 좋은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자렛 고향을 방문하시고도 환영받지 못한 것처럼 활동 대상자가 단원들을 냉대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자신의 안일과 안락만을 원한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집안에 있으면서도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며 단원들을 문전박대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단원들은 낙심하지 말고 그것을 연기된 성공으로 여기고 성공의 기쁨을 기약하면서 재도전하여야 한다.
 
[
사목, 2003년 5월호, 최경용(부산교구 신선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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