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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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정약종과 강완숙: 주문모 신부 두터운 신임 받은 쌍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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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21

교회사 맞수 - 정약종, 강완숙


주문모 신부 두터운 신임 받은 '쌍벽'

 

 

초기 한국 천주교회가 100여년간 지속된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바로 회장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아기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회장은 초대 명도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최초의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이다. 명도회(明道會)는 주문모 신부가 창설한 평신도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다.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뜻의 명도회에는 당시 지도급 인사인 황사영, 홍필주, 홍익만, 김여행, 현계흠 등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정약종과 강완숙은 서로 닮은 점이 많은 선의의 맞수다. 이들 둘은 1760년(영조 36년)생으로 신유박해를 일으켜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정순왕후(1745-1805)가 왕비로 책봉(1759년)된 다음 해에 태어났다. 또 시파와 벽파의 당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져 관동지방에 미륵신앙이 성행하고 실학이 크게 대두된 조선 후기 격랑의 시대 한가운데에 서있던 인물들이다.

 

정약종과 강완숙이 천주교회사에 등장한 것은 1794년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사제 주문모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다.

 

정약종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교리지식이 가장 뛰어나 명도회장으로 발탁됐다. 황사영은 백서에 "최창현이 덕망에서는 정약종을 능가했으나 교리지식에 있어서는 정약종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스스로 교리를 배우고, 배운 교리를 남에게 가르치려는 정약종의 열의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잠시도 그칠 줄을 몰랐다"고 기록했다.

 

강완숙은 성품이 자상하고 교리지식도 명도회원들과 토론할 정도로 뛰어나 주문모 신부로 부터 여성전교 전담자로 임명됐다. 한마디로 이들 둘은 주문모 신부가 가장 신임하는 신자들이었다.

 

당시 회장의 주된 일은 △ 선교사의 협력 △ 사제와 신자 사이의 중재 △ 신자대표 △ 분쟁조정 및 신자생활 감독, 교회재산 관리 △ 사제 대신 전례와 성사집전 △ 교리교사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같은 회장 직분을 흐트러짐 없이 충실하게 지켰다.

 

먼저 선교사의 협력자로서 강완숙은 6년간 자신의 집에 주 신부를 은닉시켰다. 강완숙의 집이 한국교회사상 최초의 본당이었던 셈이다. 정약종 또한 남자 교우들을 위해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해 문영인의 집을 빌려 주 신부를 모셨다.

 

사제와 신자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초기 한국교회 교세성장과 직결됐다.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으로 하부조직인 '육회'를 관리하면서 동생인 정약용과 황사영, 윤유일, 최기인, 한은 등 전국의 지도급 신자들을 주문모 신부와 연결시켰다. 강완숙은 교회 사무처리를 도맡으면서 과부와 동정녀들을 모아 여성 공동체를 설립했다.

 

신앙생활의 모범이 돼야했던 둘은 백정출신인 황일광과 함께 호형호제 하며 생활했고, 특히 강완숙은 자신이 부렸던 머슴과 하녀인 김소명과 김흥년 등을 입교시킨 후 모자모녀처럼 지냈다.

 

둘은 교리교사로서도 탁월했다. 정약종은 최초의 우리말 교리서 '주교요지' 상하 2권을 펴냈다. 강완숙도 이순이(루갈다), 권소사, 윤점혜운혜 자매, 왕족인 은언군 이인의 아내 송씨와 며느리 신씨 등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다.

 

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강완숙은 얼마나 믿음이 강했던지 '순조실록'은 "강완숙이 천주교인 중에서도 가장 간악한 요녀"라고 기록했을 정도다.

 

또 정약종이 문초를 받으면서 "천주는 하늘과 땅의 대군대부(大君大父)이므로 천주를 받드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죄인이며,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 고백은 이후 순교자들이 신앙고백의 모범답안처럼 인용해 사용했다.

 

교회 사학자들은 정약종과 강완숙을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의 교리교육 덕분에 서민층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대중적이고 실천적이며 기도중심의 신심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한다.

 

정약종과 강완숙, 이 둘은 남녀의 구분은 있을지언정 초기 한국교회 회장으로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평화신문, 2000년 8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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