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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내가 바라는 사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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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66

[내가 바라는 사제상] 풋내기 사제의 희망

 

 

스물하고도 아홉 해 남들이 좋은 직장이라고 부러워하는 세속의 달콤한 유혹을 뒤로 하고 신학교 문을 두드려 한국 외방 선교회 사제로 서품을 받은 지 어언 5년. 신자들의 정성어린 관심과 기도와 희생 덕분에 명동에서 벅찬 마음으로 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하였건만, 어느 해인가 운이 좋아 한국에 나와 본회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니 어느덧 시간은 많이 흘러가고 그러한 마음도 무디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아마 중국이라는 조금은 긴장된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데살 5, 17)라는 모토를 가지고 이제껏 사제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 속에서 나름대로 한 사제로서 바람직한 사제상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누구든지 사제로서 첫 발걸음을 떼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것은 '기도, 겸손, 청빈, 정결, 순명, 봉사, 함께함, 사랑, 용서, 기뻐함' 등의 사제적 덕목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으랴만은 사제로서 살아가는 삶에서 끊임없이 이를 되새기며 노력해 나가야 함이 마땅하리라. 사제로서 서품 받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인상에 남는 선배 사제 두 분이 떠오른다.

 

한 분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광고판의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의 미국 메리놀 외방 선교회 소속의 노사제로서 그 생김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산 기간이 고국에서보다 길기에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적이신 분이었다. 뚱뚱한 배로 우리 신학생들 한 명 한 명을 껴안아 주시며 우리가 힘들어할 때 격려해 주시던 모습, 학생들이 신학 수업을 받으러 갈 때 우리 곁에 서서 우리들 말씨를 흉내내 우리들보다 더 실감나게 말씀하시며 배웅하시던 모습, 그리고 형제적 사랑으로 아직은 어린 우리 외방 선교회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격려해 주시던 모습 등을 떠올리며 나는 늘 우리와 함께하려고 하셨던 신부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창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에 고국을 떠나 말, 문화, 풍습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낯선 곳에서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어려웠던 순간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서 늘 밝게 웃으시며 사셨다. 신부님처럼 늘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신부가 되고 싶다.

 

또 한 분은 필자가 선교 사제가 되어 뉴질랜드에서 1년 동안 살면서 만났던 뉴질랜드 노신부이다. 그분은 홀쭉한 편이었으나 배만은 볼록 나와서 나를 껴안을 때면 그에 눌려 배가 아파오기도 하였다. 그분은 다른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누구나 환영하셨으며, 진심으로 다독여 주고 격려해 주셨으며, 이국 생활의 어려움을 도와주려 애쓰셨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곳의 젊은 청년들과 성서 묵상 나눔을 하는 등 젊은이의 감각을 유지하며 나이도 잊고 열정적으로 사목하셨던 모습이 아마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을 것'(창세 1,10)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두 분처럼 항상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3년 전에 북경에 첫발을 내딛으며 중국 말을 공부하던 시절, 당시에 북경의 한인 공동체를 맡고 있던 신부가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워 내가 대신 주일 미사를 집전했다.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어린 비신자 여자 유학생에게 미사 참례를 권유했고, 그 유학생은 미사가 끝나고 나자 내게 다가와 "신부님, 신부님은 왜 제 곁에서 미사 드리지 않고 왜 저 앞에 서 계셨는지 모르겠어요." 하면서 말을 건네왔다. 그 여학생은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중국 말을 배우며 만났던 여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신부를 자신의 친오빠라고 생각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일부 교우는 사제에게서 아저씨처럼 포근함을, 그리고 애인같이 멋있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들의 그런 생각 속에 내 자신의 사제로서의 미래상이 담겨 있다. 아빠같이 인자한 사제, 아저씨같이 푸근한 사제, 애인처럼 멋있는 사제, 마음씨 좋은 오빠 같은 사제가 바로 신자들이 바라고 내 자신도 꿈꾸는 미래의 이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덧붙여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 사제로서 나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는 사제, 인간미가 흐르는 사제를 보고 싶고 내 자신도 그런 사제가 되고 싶다. 공인으로서 가족에 너무 얽매여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현재의 모습으로 서 있게 한 가정을 기도 속에 늘 기억하며, 드러나지 않게 충실하고 싶다. 내 자신의 사목 경험의 잣대로 다른 사제들을 판단하며 말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다른 사제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주고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사제가 되고 싶다. 자신에게는 철저하고 치밀하게 생활하되 남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사제가 되고 싶다. 일 중심으로 모든 일이 빠르게 처리되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자기가 맡아서 하기보다는 협력자의 능력을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사제가 이 시대에는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사제로서의 직분을 어루만져 주며, 자신의 생활을 철저히 관리하며, 부단한 기도와 묵상을 통해 쉴새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같은 사제이고 싶다. 그리고 특히 청소년들의 어려움과 관심사에 귀기울이며 그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뚝심 있게 소신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제이고 싶다. 이러한 사제의 모습이 진정 이 시대의 성숙한 사제의 모습이 아닐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우리의 대 스승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이 사제로 서품받았을 때 가졌던 첫마음을 잃지 않고 늘 되새기며 생활하는 사제이고 싶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자신의 바람이자 풋내기 사제로서의 다른 사제들에게 거는 희망이다. 왕따 되기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진정 멋있는 왕따로서의 사제의 삶이 분명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 아닌가? <김광우(한국 외방 선교회, 신부)>

 

 

[내가 바라는 사제상] 나는 나를 봉헌한다 - 봉헌하는 사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미사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가 울리고 봉헌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내 몸의 일부들이 하나씩 하나씩 제단 앞에 놓여지고 있었다. 내 몸을 내가 봉헌하고 있었다. 몸의 봉헌이 끝나자 이제 나의 영혼을 마지막으로 봉헌한다."

 

신학교 입학이 결정될 즈음 꾸었던 꿈이다. 왜 사제의 모습을 말하는데 꿈 얘기부터 시작하는가. 사제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머리 속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읽는 이들이 감탄에 감동을 할 수 있는 멋진 내용이 없을까 이리저리 사제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끄덕이며 '그래 이 모습이 참 사제의 바람직한 모습이지.' 그런 느낌을 주어야겠다는 교만한 생각이 나를 겉꾸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제상에 대한 간절한 의지도 그리 가져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사제로 살고자 하는가. 사제가 되고자 하며, 사제로 부름 받았는가. 왜 나는 무언가 절박한 의지로 사제의 모습을 그리며 살지 못했던가. 그저 쉽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 '예수님을 따르고자, 그분의 삶을 온 생에 실천고자.' 하지만 그 표현이 요즈음 내 가슴 깊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직도 그분을 내가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그분을 만나고 있었다. 어떤 완전한 모습만을 이리저리 조각하여 그분을 만나고 있었다. 내 기억 언젠가 만나고 사랑했을 그분이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가 어떻게 성소를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련한 추억처럼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리며 수수하게 표현하는 일은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자신에게 묻고 있다. 어떤 사제로 살고자 하는가. 내가 되고자 하는 사제, 아니 내가 되고자 의지하기보다는 그분께서 내게 원하시는 사제의 모습은 어떠한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한숨을 푹 쉬자, 한 숨이 두 숨 세 숨이 되어갔다. 며칠 되던 고민은 자신이 정말 사제가 되려는지 의심하게까지 되었다. 그러자 꿈이 맴돌았다. 너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현실에서 상상을 하려 해도 좀처럼 그려지지 않을 그 꿈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되었다.

 

무슨 이유일까. 왜 이 꿈이 내 주변을 맴도는 걸까. 꿈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너무 분명해서 달리 쓸 말도 없을 것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다시 이 꿈을 붙잡고 묵상을 하게 되었다. 이 꿈이 내 무의식에 나타났다면, 내 현실의 의식 속에 기억하고 이제 내 가슴으로 끌어내릴 때라도 되는 걸까.

 

나를 봉헌한다. 나를 왜 봉헌하는가. 그렇게 봉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몸의 부분 부분과 영혼마저 제단 앞에 봉헌하고 있었다. 봉헌한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 그렇지만 내 몸의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그 되돌림은 철저히 내맡김에 있다. 그런데 꿈이 보여 주듯 그렇게 봉헌된 삶을 살지 못하였다. 부제가 되어서도 아직 꽉 붙들고 있는 것은 내 몸과 영혼의 안식이며, 나를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그 가운데 있었다. 사제의 모습도 그러하다. 어떠 어떠한 사제로 살겠다는 욕심. 나를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지 못하고 내가 만든 사제의 모습대로 살며 나를 내세우려고만 하였다.

 

이제껏 하느님 없이 내 이상(理想)으로 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이 되겠다는 허망한 욕심을 붙잡고 그것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그 이상이라는 것, "어떤 사제가 되겠습니다." 하며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삶을 내 맘으로 한정지어 가두는 것이었다. 그것만 바라고 살았다. 그리고 그 이상에서 자신이 실망하고 아파한다. 이상을 가지고 오랜 기간 준비하지만 한 바람에 '후-', 좌절하고 떨어져 나간다. 나름대로 노력하며 하느님을 향해 다가선다고 하지만 나는 하느님께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가득 안고 내 이상을 향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었다.

 

도구가 되어야 할 내가 하느님을 도구 삼고자 하였다. 이상은 나를 어떤 도전으로 이끌지만 현실을 하느님 안에 살게 하지는 못하였다. 하느님 안에 있지 않는다면, 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리하지 않는 이상은 내 현실에서 늘 동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순간 한 순간 옅은 바람에도 나가 떨어지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완전한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자꾸 멀어져 간다.

 

제대로 나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했어야 하는데 넘어지면 일어서서 다른 곳을 헤매고 있다. '그래, 하느님께 바쳐진 몸, 좀 더 준비된 마음으로 내가 계획한 거, 열심히 실천해서 하느님께 가야 하지 않을까.' 자꾸 그런 욕심을 부린다. 그렇게 준비하고 준비하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만 일어설 때 무너질 게 분명한데, 자꾸만 내 자신을 뭉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내가 만든 사제를 더욱 단단히 하며 그 모습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나 알고 그러는지.

 

사제로 살고자 하는 내게 무엇보다 하느님 은총의 자리가 없다. 인간적 노력만이 나를 세우고 나를 만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체 무엇에서 나가 떨어지고 있었던가. 내가 만든 사제, 내가 만든 예수님, 내가 만든 하느님으로부터 불완전하다고 느껴진 자신이 자꾸 나가 떨어지고 있지 않던가. 결국 내가 만든 이상에 내 자신을 세워 놓고 이리저리 나를 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상처의 시간이면, '상운아, 그러지 마라.' 다독이지 못하고 엄하게 내게 으름장을 놓았으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면서도 그렇게 함이 하느님을 향한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나를 함부로 대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서 받은 상처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내 아픔 내가 만들면서 나는 참 사제의 모습을 닮지 못한다고 한탄만 하였다.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당신 없는 어떤 삶을 요구하셨던가? 아니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내 욕심이 사제상을 만들고 예수님을 그 안에 가두어 둔 것인가.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나를 숨기고 잔뜩 허세를 부리며 강해지려고 한다. 내 자신을 내가 꽉 붙들고 있다.

 

나는 나를 봉헌했어야 했다. 바람이라고 한다면. 아니 이런 바람조차 조심스럽고 감히 꺼낼 수 없지만 내가 사제로 살아갈진대 향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자꾸 만들어 하느님을 내 안에 가두지 말고 어떤 사제의 모습을 우상 삼아 나를 옭아매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로움 안에 나를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꿈에서와 같이 내 몸을 하나하나 봉헌하고 이제 내 영혼을 봉헌해야 한다. 봉헌은 내가 꼭 쥔 것을 내어 놓는 것이다. 좋다고 나쁘다고 선하다고 악하다고, 내가 선택하여 세운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버려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 그 안에서 살아갈 때 내 나약함과 강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럴 때 사제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사제의 모습에 구속됨이 없이, 그저 살고 나니 참 사제로 살았구나 하는 여운이 남는 모습으로. <박상운(광주가톨릭대학교, 부제)>

 

 

[내가 바라는 사제상] 수도자가 바라본 이상적 사제상

 

 

사제와 수도자는 모두 하느님께 대한 봉헌 생활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봉헌 생활의 방식에서 구체적으로 사제는 교회를 관할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목자로서 신자들을 돌보는 등의 직무를 수행한다면, 수도자는 공동체 생활과 기도와 봉사 생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표징으로 살아간다. 수도자는 사제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봉헌 생활을 하지만, 교회 내에서 주로 내적 생활의 방식으로 사제와 다른 면들도 있어 수도자가 이상적인 사제상을 논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여기서는 수도자의 입장에서 관련 문헌의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제의 직무

 

교황청 성직자성의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1994년)에서는 사제가 제3 천년대의 새로운 복음화에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사제들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 신원에 대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성찰하여 삶의 질을 스스로 더 높여야 하고, 영원한 대사제, 당신 교회의 머리, 스승, 배필이시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를 생활화해야 하며, 온전한 계속 교육으로써 자신의 영성과 직무를 강화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갈로 신부는 "사제 직무의 본질"([신학전망] 제75호, 광주가톨릭대학교, 1986년)에서 모든 사제 직무는 그 결정적인 본보기가 되는 그리스도의 사제직 자체에서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사제는 시대와 장소에 따르는 다양한 사회 환경에서 다양한 사제상을 지니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실현하여야 하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원칙으로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로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제 직무에 대하여 갈로 신부는 목자의 기본적인 직책은 공동체를 지도하는 것으로 자기 양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들려주는 말씀의 봉사와 더불어 다른 양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목자는 교회 공동체를 성화시키는 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신앙과 사랑을 북돋아 주는 일, 성사 특히 성체성사로 천상 생명을 전달하는 일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명을 양육하는 것이다.

 

갈로 신부는 목자로서의 사제는 단순히 우두머리나 인도자가 아니고 자기 양들을 사랑하며 그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자와 양들의 밀접한 상호 인식 관계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셨다. 이것은 인격적인 인식을 말한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씀은 목자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사랑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교황청 성직자성의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에서는 사제의 영성 생활과 계속 교육에 관하여 제시하고 있다. 영성 생활은 전례와 개인의 기도로 그리고 풍요로운 사목 활동에 이바지하는 갖가지 그리스도교적 덕의 생활 방식과 실행으로 각 사제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하여 사제는 적절한 준비와 감사로써 매일 거행되는 미사 성제, 신학교에서부터 이미 실행해 온 잦은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 매일의 온전하고 열정적인 시간 전례의 거행, 양심 성찰, 묵상 기도, 영적 독서, 무엇보다 연례 영신 수련과 피정 중에 긴 시간 동안 바치게 되는 침묵과 기도, 묵주기도와 같은 성모 신심의 애정 깊은 표현, 십자가의 길과 다른 심신 행위, 그리고 성인들의 행적에 관한 영적 독서와 같은 것들을 포용하여 영성 생활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아울러 사제의 계속 교육은 성품성사를 받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더욱 넓고 깊은 의미로 사제로 하여금 그 자신의 온 생활과 활동을 부여받은 선물에 충실하도록 꾸준히 도와주는 은총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였다. 계속 교육의 필요성은 사제가 자기의 성소에 적절히 호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생활화되는 신적 선물 자체에서 기인되며, 사제가 만사를 일치시키는 원리이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인간적, 영적 존재의 모든 측면에서 필요한 것이라 하였다.

 

참고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가 실시한 성직자 대상 설문 조사 결과 보고서(2001.11.)를 보면, 사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영성 생활"이 매우 중요하다는 응답이 82.7%로 나타나 이것이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는 사제 역할임을 보여 주었다. 그 밖에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이 60.4%, "신자들에게 겸손한 태도"가 57.2%였다.

 

그러나 서울대교구 사제들은 직무 수행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시간 부족"을 가장 많이 꼽고 있다(11.5%). 다음으로 "다양한 신자 층의 조화의 어려움", "많은 신자 관리의 어려움" 등 여러 계층의 신자들의 다양한 욕구 충족의 어려움을 들었다(각각 9.2%와 8.0%). 그 밖에 "전문성/지식 부족"과 "강론 및 강론 준비" 등 신자들을 위한 사제의 준비 과정상의 어려움을 들었다(각각 7.3%). 이러한 조사를 통하여 볼 때, 사제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역할들을 좀 더 잘 수행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교구와 신자의 협력도 매우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수도회와 사제

 

교회법에 따르면, "수도 생활은 인격 전체의 축성이니만큼, 교회 안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내세의 표징으로 설정된 신묘한 혼인을 표상한다. 이처럼 수도자는 자기의 모든 은혜를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처럼 소진함으로써 그의 전존재가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경배가 된다. 수도회는 그 회원들이 고유법에 따라 종신 또는 유기로, 만기가 되면 갱신하면서, 공적 서원을 선언하고 형제적 생활을 공동으로 사는 단체이다. 수도자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드려야 할 공적 증거에는 각 (수도)회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고유한 형식의 세속으로부터의 격리도 수반된다"(제607조). 따라서 수도 생활은 하느님께 대한 희생의 증거이며 표징인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봉헌 생활](1997년)에서 봉헌 생활은 복음에 뿌리를 박고 교회 생활의 모든 계절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수많은 가지를 지닌 나무에 비유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철저히 따르며 형제 자매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선택한 거룩한 분들, 수도회 창립자들이 살던 본래의 집이 바로 교회라고 보았다. 이러한 수도회의 활동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 안에서 사랑의 계명이 지닌 유기적인 일치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수도회 생활의 근원을 교회에서 찾고, 수도회는 교회의 활동을 표현하는 모습의 방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헌 생활]에서 수도자의 봉헌 생활이 더없이 중요함을 언급하였다. 수도자들의 봉헌 생활은 바로 끝없는 헌신과 사랑 때문에 유용성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며, 무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식할 위험에 놓인 현대에서는 더욱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봉헌 생활의 구체적인 표징이 없을 때, 교회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은 식고,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역설은 무디어지며, 또한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은 그 맛을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사제들은 수도자들과 봉헌 생활 단체의 구성원들과 친교를 유지하고 특별히 협력하며, 수도회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교황청 성직자성의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1994년)에도 언급되어 있다. 곧 "사제는 특유한 형식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축성 생활에 전념하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제는 그들의 독특한 은사를 존중하고 촉진시키면서 그들에게 신실한 존중과 사도적 협조의 참 정신을 보여 주어야 한다. 더군다나 봉헌 생활이 전체 교회의 이익을 위해 한결 빛을 발하고 새 세대에 한층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나도록 사제는 협력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안병초(마리아회, 수사)>

 

 

[내가 바라는 사제상] 시대의 탁류 속에서 끝까지 사람들 곁에 머무는 사제

 

 

변해 가는 세상, 외로운 사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던 어린 시절, 주일학교 친구들과 성당 마당에서 뛰어 놀던 내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기껏해야 허리춤 키밖에 안 되는 어린이들 허리를 붙잡고 기차 놀이에 여념이 없던 젊은 보좌 신부님이 아이들만큼이나 즐거워하며 웃어 대던 모습이다. 기차 행렬 옆에서 친구들과 다른 놀이를 하고 있던 유치부 꼬마였던 내 기억에 그의 얼굴은 한 장의 사진처럼 박혀 있다. 어린이 미사 강론 시간에 그 신부님께서 "양심이 하느님 편이에요, 악마 편이에요?" 하셨던 질문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하느님 편이요!" 내 어린 마음 속에도 당연히 '하느님 편'이라는 울림이 솟아 나올 수 있었나 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태어나고 자란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그 신부님을 다시 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맞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너무도 많은 이들을 만난 탓일까? 주일학교 교사들과 상견례 자리에서 신부님은 내 과거의 기억에 대해 웃음만 지으실 뿐 나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당시 신앙과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한창 예민해져 있던 대학교 4학년의 나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신부님과 함께 신명나는 주일학교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활기 잃은 본당에 20여 년 만에 부임하신 신부님은 무척 엄하고 완고하신 모습이었다. 그 전까지 비교적 '편하게' 성당을 오가던 신자들은 적응을 못 하는 듯하였고,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부님과 나 사이에 놓인 이 거리감과 어려움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던 당시의 주일학교 교사 생활은 가장 어렵고 사건도 많았던 때였다. 신부님도 오랜 사제 생활 동안 많은 벽에 부딪히신 듯했고 변해 가는 세상 속에서 사제로 살아가는 외로움이 이따금 비쳐졌다. 그 5년의 시간은 신앙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에 심각한 고민을 안겨 주었고 많은 변화도 겪어야 했다. 그 후 신부님은 다른 본당으로 가셨다. 내 삶의 가장 혼란스럽고 질적인 변화의 시기에 본당 주임 사제로 계셨던 신부님에 대한 기억은 또 한 장의 사진으로 박혀 있을 것 같다.

 

인기 있는 사제, 저명한 사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워낙 다양해지고 많아진 탓일까? 신자들도 반복적인 미사 참례와 기도 생활, 구체적인 보람과 성과를 찾기 힘든 본당 활동에 크게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사제들도 신자들에게 '매력' 있는 사목자가 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많은 정보와 수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만큼 사제의 '권위'를 믿고 자신의 어려움이나 속사정을 털어놓는 신자들의 숫자는 적어져 가고 있다. 청소년과 젊은층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에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사제를, 성인층은 본당이나 사회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역할을 두둔하는 사제를 더 가까이 한다. 어떤 신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세속적 즐거움에 사제들이 동참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또한 교구나 사회에서 명성이 높거나 눈에 드러나는 업적을 많이 쌓은 사제만을 훌륭한 사제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만약 그러한 사제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오면 지나친 기대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사제 개인의 재능이나 행정적 추진력이 사목자에게 요구되는 영적 경험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일은 하느님의 일이요 사제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느님의 업적은 반드시 직선형의 발전 모델로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가시적으로는 본당 발전을 위하여 매우 미미한 성과를 남긴 사제라 하더라도 오히려 신자들의 영적 감수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이렇듯 오늘날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의 기준도 어느덧 세속적 잣대와 비교해 볼 때 차별성을 점점 잃어 가는 것 같다. 평신도는 세속의 삶을 존재 기반으로 하지만, 거기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란 홀로 이루기에는 매우 힘든 작업이다. 사제는 이 작업에 늘 함께하는 존재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유약해져 가는 현대인과 희미해져 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요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하여 상처받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자신이 인정받는 일에는 예민해졌지만 타인의 말에 귀기울이거나 자기 약점을 인정하는 것에는 더욱 인색해지고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라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 간에 서로를 배제시키고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욕구 또한 자리잡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사회의 억압적 장치에 대응하는 정체성이 뚜렷한 집단들 안에서 이러한 욕구를 절제와 승화의 방향으로 모을 수 있었지만, 다양성과 민주적 가치가 힘을 발휘하게 된 요즈음 욕구 표출의 대상이 광범위해지고 모호해지면서 사람들은 자기 삶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고통과 상처를 싫어하고 행복의 확실한 조건을 찾아 돈을 벌고 출세하는 데 오히려 집착하는 듯하다.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일은 과거에 비해 많이 쉬워진 것 같다. 일정 기간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거치고 세례를 받으면 입교자 수는 늘고 잠시 본당의 분위기도 살아나는 듯하지만 본당 사제가 주일 미사와 판공성사 등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횟수는 더 늘어만 간다. 이제 사목자는 신자 생활의 의무 조건을 강조하는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언어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그리스도 신자로서 생활하는 데에 불편과 고통의 요소는 많이 사라졌고 그만큼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표징의 기능도 약화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나눔과 희생의 덕목은 신자들의 자격 조건에서 부차적인 것이 되고 있다.

 

사람들 곁에서 변함 없는 희망과 삶의 줏대를 세우는 사제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을 비난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배어 나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태도는 유다인들의 거룩함과 당신의 거룩함을 선명하게 대조시킨다. 규율과 법을 따르는 데에 하느님 자녀 됨의 도리가 있음을 주장하던 유다인들과 동화되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병자와는 다른 유다 민족의 일원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함은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세상의 주류와 자신의 정체성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이들 곁에서 꿋꿋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서 나왔다. 그분의 변함 없는 줏대는 완고한 시대의 위선에 가려진 인간의 참 희망과 직접 통하는 것이었고 그분의 거룩함은 종교적 경건함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제는 시대의 탁류를 거슬러 거룩함의 미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몸으로 드러내고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이 점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 가늠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과 교회의 정체성도 물들고 있기 때문이다. 성사의 집전과 일상적인 사목의 수행과 더불어 끝까지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변함 없는 삶의 희망과 줏대를 세우는 일에 부지런한 사제를 보고 사람들은 인생의 거룩함을 발견할 것이다. 때로는 신자들의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고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즐겁고 흐뭇했던 사제와의 추억보다 갈등과 선택의 시험 속에서 사제들과 함께했던 체험이 훨씬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제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준비가"(1베드 3,15) 되어 있을 것이고, 세상은 그들을 보고 거룩함과 진리와 아름다움이 즉흥적인 세상의 욕구와 무엇이 다른지를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김세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 1부)>

 

[사목, 200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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