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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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 위령성월 기고1: 죽음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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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10 ㅣ No.412

[위령성월 기고] (1) 죽음이란 무엇인가?

 

 

평온한 얼굴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을 거부하고,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위령성월을 맞아 모현 호스피스 손영순 수녀와 함께 4주 동안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죽어가는 이들과 많은 인연을 맺어온 손 수녀의 글은 우리들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가장 분명한 사건은 태어난다는 것과,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태어남과 죽음보다 더 명확하고 공평하고 분명하게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이렇듯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의료가 발달하면서 수명이 일부 연장되고 치유 가능한 병들이 생기면서 더욱 더 죽음은 극복해야만 하고 퇴치하여야 하는 악적인 존재가 되었다. 죽음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며 그 죽음의 장소 또한 우리의 눈에서 멀리 던져버려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으로 한정해 버리고 싶어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늘 곁에 있으며 가족사의 중요한 한 사건이며,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한 집에 누군가가 임종을 앞두면 모든 가족이 그 곁을 지키며 세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유언을 받들고 이별을 준비했다. 물론 그 이별의 과정에서 어린아이들도 제외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죽음의 형태는 자식일지라도 어린이의 참여는 제외되고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기계적인 추에 맞추어 이별을 강요당해야만 한다.

 

가장 두렵고 무서운 순간, 누구도 죽음이라는 곳으로 함께 가 줄 수 없지만 문턱까지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함으로써 우리가 내다 버린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드디어 내다 버림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죽음이 기쁘고 행복한 경험일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도 있다. 죽음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40대 중반의 어머니를 암으로 떠나 보낸 20세의 아들은 이런 고백을 했다. “어쩌면 가슴 한켠에 영원히 아픔으로 자리 잡았을 수 있을 법한 이별이었습니다. 아직은 이별을 감당하기에 많이 서투른 제게 이곳 수녀님과 여러분들 가슴 아픈 이별도 코끝 찡한 추억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덜 아픈, 아름다운 이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밝은 햇살 속에서 두 손 꼭 잡고 눈 감으시는 그 순간까지 제 사랑을 이야기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고백은 죽음의 긍정적 측면과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소중한 면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나 건강한 사람들에게나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움의 과정이라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내 것이 아닌 양 외면하고 살수는 없는 것이다.

 

도리어 그 죽음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가를 알고 직면해 두려움을 감소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훨씬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삶이 풍요로워 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외면하고 없는 것처럼 살아야 삶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부정적 측면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이 하느님을 더욱 공경하고 그 분의 위대함과 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누구나 맞닥뜨려야 할 죽음 앞에 겸손해 질 수 있으며 성실할 수 있다. 두려움은 위험에 대한 신호이기도 하며 미리 죽음으로 앞당겨 하루하루를 살아나감으로써 그 삶이 풍요로워 질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서 예술이 형성되며, 죽음을 향한 삶이기에 인간의 사회적 관계 형태가 결정된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의 의미 있는 성취와 작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분명한 사실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죽음을 인식하고 삶 안에서 재현해내고 기억하는 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자명하게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이렇듯 죽음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역동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즉 죽음이란 현재 삶의 거울이며 우리 미래의 반영이며 새로운 창조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2일, 손영순 수녀(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모현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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