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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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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돈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사제와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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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24 ㅣ No.526

[사제의 해] 돈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사제와 가난

 

 

돈이 언어다?

 

오상의 비오 성인 신부님이 사목하신 이탈리아의 산 조반니 로톤토라는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다. 성지순례를 간다고 하니 본당 신자들이 잘 갔다 오라며 쌈짓돈을 챙겨주셨다. 그것을 떠올리며 즐비하게 늘어선 성물가게들 가운데 한 곳을 들렀다. 신자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려고 묵주를 비롯한 여러 성물을 대량으로 살 심산이었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가 영어를 통 몰랐다. 어쩔 것인가? 나는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그래서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묵주 100개, 성화 50장 등 이것저것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가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자기 아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은 그래도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들의 홍보전략(?)에 따라 추천해 주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성물들을 구입하였다.

 

그 성물가게를 나오면서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아! 돈이 언어구나! 돈만 있으면 상대방이 내 말을 어떻게든 알아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표현하는구나!’

 

사실 외국을 다니다 보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나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돈이다. 돈만 있으면 식당 종업원도 갑자기 친절해지고, 돈만 있으면 택시 운전기사가 알아서 숙소까지 데려다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돈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돈이 있으면 참 편한 세상이다. 돈이 있으면 당당해지는 세상이다. 배짱이 두둑하려면 우선 지갑이 두둑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보좌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 신부님이 고급 호텔에서 친구의 결혼식이 있어 차를 몰고 갔단다. 그때 그 신부님이 타던 차는 5년을 넘게 타서 칠이 벗겨진 티코였다. 호텔 정문에서 주차장이 어디냐고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그 종업원이 보는 둥 마는 둥하며 “저기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몇 주 뒤 그 호텔에서 식사 약속이 있어 본당 사목회장님 차를 타고 갔다. 사목회장님 자동차는 고급 중형차였다. 이번에는 호텔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종업원이 나와서 친절하게(보좌신부님이 보기에는 ‘아주’ 친절하게) 주차장으로 안내를 해주었단다. 지금이야 그런 호텔이 없겠지만, 돈이 좋긴 좋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 돈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같다. 돈이 있으면 대접을 받고, 돈을 주면 상대를 춤추게도 한다. 그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사제에게 돈이 필요한가?

 

나도 한때는 꽤나 검소하게 살았다.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어머니가 우리 6남매를 키우려고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잘 알고 있는 탓에, 사치를 부리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신학교를 다니면서,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가난하게 사셨으며, 가난하게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나는 그 누구보다 검소한 사제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다. 인사이동 때마다 가방 하나만 덩그러니 들고 가시는 외국 신부님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고, 신학교 생활 잘 하라고 본당 할머니들이 흙 묻은 쌈짓돈을 내 주머니에 찔러넣어 주실 때마다,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은 죄악이라고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곤 하였다.

 

사제는 세상에 속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했던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신학생 때의 호기(?)는 본당 하나하나를 맡아가면서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돈이 명실공히 국제언어가 되어가는 세상, 돈만 있으면 고래도 춤추게 하는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이 돌아가는 굴레 속에서 돈이 가진 위력을 은근히 누리고 사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애주가들을 위한 전형적인 격언

 

사제로 살아가는 동안 사제 신분에 맞는 합당한 보수를 교회에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교회법에도 명시하고 있다(제281조 1항 참조). 그런데 사제는 사실 가족을 부양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받는 보수에 비해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돈이 가진 위력을 누리며 약간의 호사를 부릴 정도는 된다.

 

그렇다. 사제도 세상 속에 있는 사람이기에 돈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제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에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야 가난함 자체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신학생 시절의 이상을 그래도 조금씩 실현해 갈 수 있을까?

 

나는 술을 삼촌에게 배웠다. 그때 삼촌은 술병을 잡는 법부터, 술을 받을 때의 규칙, 술을 따를 때의 규칙 등 이것저것 까다로운 것들을 거룩한 예법인양 가르쳐주셨다. 주도(酒道)를 다 마칠 무렵 삼촌이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지. 그러다가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 법이야. 그러니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다 싶을 때에는 자제를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도 망치고, 주위사람들도 망치게 돼.” 아마 나뿐만 아니라 사내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다 들었을 법한 말일 것이다. 애주가들을 위한 전형적인 격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돈은 어떤가? 돈, 참 좋다. 돈이 있어서 손해 볼 일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버리기가 쉽다는 것이다. 곧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삼촌에게서 들었던 그 격언은 돈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사람이 돈을 이용한다. 그러다가 돈이 점점 힘이 세지면서 돈 스스로 움직이게 되고, 결국에는 돈이 사람을 이용한다. 그러니 사람이 돈을 사용하다가 아니다 싶은 순간이 오면 돈을 경계해야 한다.

 

사제에게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다. 사제가 돈맛을 알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 하느님의 힘을 믿고 사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힘을 믿고 사목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금액으로 바라보게 된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을 서서히 잊게 된다.

 

이러한 사제에게는 가난한 이들이 벽을 느껴 함부로 다가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심각한 것은 돈맛을 알게 된 그 사제는 정작 자신이 얼마나 큰 오류의 감옥 속에 갇혀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일말의 노력

 

나는 가난을 서약한 수도자는 아니다.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살아갈 만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사제는 하느님의 힘을 전적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기에 최소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안한 것이 익명의 십일조이다.

 

한 해의 시작 때에 내가 받게 될 일 년간의 총수입을 먼저 계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10% 정도의 금액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 금액을 익명으로 하여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것이다. 때로는 어느 자선 단체에, 때로는 어느 가난한 본당에, 때로는 어떻게 알게 된 불우한 교형자매에게 송금을 하는 것이다. 내가 받은 돈은 나의 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교우들의 피땀 어린 정성임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내가 가진 돈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쓰여야 하는 돈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돈이 없어도 나는 충분히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의 느낌

 

사실 ‘사제와 가난’이란 주제로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나름대로 돈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을 했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렇게 가난하고 검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준비하면서 내 주위를 살펴보았다. 전자제품, 자동차, 내가 먹는 음식들, 내 옷들, 내 지갑의 두께….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마치 ‘너는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막상 글을 쓰려고 할 때에 난 두꺼운 시멘트 바닥을 곡괭이로 뚫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펜을 잡았다. 그리고 글을 썼다. 비록 하느님과 교회 앞에, 그리고 나 자신 앞에 당당하게 “나는 가난한 사제입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원의를 새롭게 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더 줄이고, 남에게 조금 더 나누어주는 그런 사제로 거듭나고자 결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님,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제 뜻대로 쓰게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쓸 수 있도록 저를 이끄소서. 아멘.”

 

* 양영수 베드로 - 제주교구 신부. 교구 교육국장, 사목국장, 사무처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신제주성당에서 사목하고 있으며 서부지구 지구장과 참사위원이다.

 

[경향잡지, 2010년 5월호, 양영수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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