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56: 구한선, 정찬문, 윤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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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0 ㅣ No.1471

[복자 124위 열전] (56) 구한선 · 정찬문 · 윤봉문


진주에 복음의 씨앗 뿌린 복자 3위



복자 구한선 타대오


진주하면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거봉인 남명 조식(1501∼1572), 임진왜란 당시 충절의 상징인 논개(?∼1593)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19세기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구한선(타대오, 1844∼1866)과 정찬문(안토니오, 1822∼1867), 윤봉문(요셉, 1852∼1888) 등 3위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해체기 길목에서 목숨을 걸고 진리의 길을 걸음으로써 진주에 커다란 신앙의 빛을 비췄다.

우선 맨 처음 진주에서 신앙을 증거했던 복자는 구한선이다. 경남 함안의 미나리골 중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글을 많이 읽어 총명하다는 평판이 났던 인물이다. 심지어는 요술에 빠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된 그는 즉시 이를 받아들이고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던 그는 10년 뒤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돼 거제도 선교에 동행하기도 했다.

복자 윤봉문 요셉


하지만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돼 진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관장 앞에 끌려나간 그는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옥에 갇혀서는 부인과 관장에게 주요 교리를 적은 글을 전하기도 했다.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문 밖에 있는 어머니가 걱정할까 우려해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수난을 견디고 석방된 그는 집으로 돌아온 지 7일 만에 선종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 (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고향 인근에 있는 함안군 대산면 하기길 신씨 묘역에 안장됐다가 1977년 대산면 가등산 교우묘역으로 이장됐다.

반면 진주 허유고개 중촌 출신인 정찬문 복자는 먼저 세례를 받고 입교한 아내에게서 뒤늦게 천주교 신앙을 들은 뒤 1863년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경우다. 이후로 3년 넘게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던 중 1866년 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일가친척과 평소 알고 지내던 하급관리에게서 “배교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진주로 끌려간 그는 25일간 진주 진영 내 군뢰청 옆 옥에 갇혀 있으면서 진영장 앞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가산은 몰수됐고, 가족들은 당연히 생활이 궁핍하게 됐다. 그런데도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이듬해 1월 25일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유해는 그의 조카들이 거둬 장사를 지냈는데, 훗날 머리 없는 주검으로 발견돼 마산교구 문산본당 사봉공소 관할 구역 내인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1751번길 허유고개에 안장돼 있다.

124위 중 가장 늦은 1888년 4월에 순교한 윤봉문 복자는 경북 경주 인근 출신이다. 윤사우(스타니슬라오)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박해로 가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했다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현 통영시 이운면)에 정착했다. 부친과 함께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던 그는 진 요한 일가에 복음을 전했고, 그 인연으로 장성한 뒤 그 집안의 진 아녜스와 혼인을 한다.

1887년 경상도 일대에서 사목하던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사목방문하자 로베르 신부를 도왔고 당시 거제도에서만 15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나 통영에 압송돼 문초를 받았고, 이어 진주로 이송됐으며,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1888년 4월 1일 순교한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들 진주 출신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은 역시 다른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살기를 거부하고 유혹을 끊어내며 죽음을 선택하는 여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십자가의 길, 곧 순교는 영남 유학의 본산 격인 진주 일대에서 복음의 씨앗을 퍼뜨리는 계기가 됐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19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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