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문헌ㅣ메시지

다시 보는 교황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6 ㅣ No.341

다시 보는 교황교서 :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84년 2월 11일 재위 6년을 맞이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과 신부들,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관한 교서를 발표하셨다. 제한된 지면이긴 하나 이 교서를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온 나라가 IMF 한파를 겪고 있는 요즈음 피부로 고통의 의미를 실감하는 우리에게, 또한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거룩한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교황님의 가르침은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리라 생각된다.

 


인간, 고통의 존재

 

고통은 인간에게 엄연한 현실이자 하나의 뚜렷한 문제이므로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여러 가지 고통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성서는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인간이 전인적으로 당하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을 열거하고 있으며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고 가르친다. 개개인이 체험한 악은 고통의 원인이 되어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인간은 체험적으로 고통의 존재라고 할 만큼 고통은 인간의 삶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서로 소통과 연대성을 지닐 수 있다. 예를 들면, 흉작과 기근, 전쟁과 재난 등은 개인뿐 아니라 그곳에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주므로 이를 통해 서로 협력하여 더 나은 사회로 발전시킬 수도 있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고통의 의미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해답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과 이유, 목적에 대한 물음일 뿐 아니라 종합적으로 보아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한다면, 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구약의 대표적 인물은 욥) 인간 실존의 아픔을 통하여 자신과 세계 그리고 이 세상을 온전히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절규하면서 고통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성서는 고통을 죄를 범한 인간의 징벌과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효성이 단련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죄는 고통의 근거가 되나, 고통을 통하여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이 된다. 그 해답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그분의 파스카 신비)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요한 3,16)라는 말씀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구원은 악으로부터 해방이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아드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위한 사랑이며 그 자체가 구원적이다. 그것은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그 외아드님의 사명은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세력인 죄와 죽음의 정복에 있었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하심으로써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감수하셨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하여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분의 죽음은 고통과 악의 타도에 있었으며 그것을 통해 인간은 아드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만 점철되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자께서 고통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였으므로 그분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진다. 곧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참된 행복에 관한 가르침에서 고통은 그 자체가 문제가아니라 참된 행복에 이르는 과정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진정한 행복을 누릴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그분의 고통스런 삶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서처럼 고통을 당하셨다. 체포, 구타, 침뱉음, 수감, 부당한 선고, 채찍질, 가시관, 조롱, 십자가와 그 위에 못박히심과 고뇌 그리고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곧 그분의 삶에 동참하고 그분과 비슷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욥이 고통을 통하여 더 큰 축복을 받았듯이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고통 이상의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온 세계를 구원하는 방법이며 세상에 새로운 출발을 주는 계기가 된다.

 


고통의 복음

 

교황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다루시면서 ‘그 십자가 옆에 서계신 어머니’의 고통을 언급하신다. 아드님의 고통은 바로 어머니의 고통이었다. 그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한 것이라면 아드님의 고통과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 또한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그날부터 성모님은 고통의 여인이 되셨다.

 

사실 일생 동안 예리한 칼이 성모님의 마음을 간헐적으로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시고 마음에 새기신 성모님은 아드님의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림없는 신앙의 모범을 보이셨다. 성모님이 “하느님 아버지, 인류 구원의 방법이 꼭 이래야만 합니까?”라고 절규하지 않으셨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모님은 침묵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받아들이셨다.

 

그 거룩한 모범은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이들, 특히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복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교회 공동체와 그 안에 몸담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또한 고통의 복음이다. 그 비유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웃을 지나쳐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의 마음으로 그들과 연대를 가지고 “고통 속에서 도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황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곧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 자신을 남에게 열고 내어줄 수 있을 때 참다운 인간상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남에게 주는 것은 아가페적 사랑이자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속하셨고 날마다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여러 가지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며 마지막 심판 기준(마태 25,31-46 참조)에 따라 우리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무수한 작은 그리스도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 권고

 

교황님은 인간 실존 깊숙이 내재해 있는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속사업이라는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음을 전제하신다. 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누구나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이 당한 그 고통들을 묵상함으로써 고통의 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특별히 인류 구속을 이루신 아드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그 옆에 서계신 성모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분은 고통을 통하여 고뇌의 인간, ‘인간의 구원자’가 되셨다.

 

“고통을 당하는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네 현대 세계가 우리 눈앞에 드러내고 있는 선과 악, 양 세력들 사이의 가공할 싸움터에서 교회와 인류를 위해 강한 샘이 되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합하여 승전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교황님의 교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현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이 좋을 리는 없다. 고통은 분명히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으로 단련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초목은 비바람을 맞아야 견고해지고 위대한 예술은 슬픔과 고통의 이슬을 먹고 자라야 더욱 위대해진다. 효험이 있는 약은 쓸개처럼 쓰게 마련이고 돛단배는 거센 바람을 만나는 만큼 더 빨리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험한 바다라야 능숙한 선장을 만들어낼 수 있고 추녀 밑의 풍경은 바람을 만나야 그윽한 풍경소리를 멀리멀리 퍼지게 한다. 하지만 고통이 감미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을 하느님께 다 말씀드리고 고뇌의 인간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고통에 전적으로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에 동참할 때 인간의 고통은 희망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전달수 안토니오 - 로마 교황청립 안젤리쿰 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안동교구 다인본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1998년 3월호, 전달수 안토니오]



74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