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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22: 이광재 신부 (상) 죽음 앞에서도 오직 양들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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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6-06 ㅣ No.529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22) 이광재 신부(상 · 1909-1950)


죽음 앞에서도 오직 양들만을...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던 날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지역 강원도 평강읍 서변리 평강성당. 주일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에 온 오 아녜스씨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클라라 자매 집에서 기거하며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을 돌보던 이광재 신부가 체포됐다는 것이다. 이 신부는 양양본당 주임이었으나 1949년 4월 평강본당 주임 백응만(다마소) 신부가 공산당에 체포된 후 그해 8월부터 평강본당까지 맡아 양양과 평강을 오가며 신자들을 사목하던 중이었다. (백응만 신부는 1950년 1월 고문과 굶주림으로 옥사했다.)

 

체포된 이 신부는 원산 와우동 형무소 특사감방에 수감됐다. 특사감방은 사상범들을 수용하는 감방을 말한다. 그곳에서 이 신부는 자기보다 먼저 잡혀온 연길 베네딕도회 소속 김봉식(마오로) 신부를 만났다. 비록 방은 달랐지만 두 사제는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라틴어로 서로 고해성사를 주면서 형무소 생활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해 10월 8일 밤 10시 "특사감방 일어나라!"는 호령에 따라 이 신부는 다른 일행과 함께 감방에서 끌려나왔다. 수감자들은 모두 팔을 뒤로 한 채 밧줄로 결박 당했고, 4명이 한 조가 돼 굴비 엮이듯 줄줄이 엮여 바깥 산으로 내몰렸다. 산 중턱을 지나 커다란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곳으로 내려섰다. 소문으로 듣던 큰 방공호였다. 거기에는 이미 총살을 당해 죽은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인민군의 총알은 새 희생자들을 찾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 신부와 김 신부도 있었다. 김 신부는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이 신부는 총을 맞고도 그 밤을 버텨냈다. 기적적으로 이 현장에서 살아 남은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총을 맞고 즉사한 사람도 있지만 중상을 입고 목숨이 붙어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 저기에서 '물…물 좀…" "아이고…나 좀 살려줘…" 하는 신음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한쪽에서 그와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내가 물을 떠다 주지.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 하는 목소리였다.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광재 신부였다고. 스무 번이 넘도록 되풀이하던 이 신부의 이런 목소리도 점차 기력을 잃더니만 마침내 조용해졌다. 1950년 10월 9일 새벽이었다. 사제 생활 만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41살로 생을 마감한 이광재 신부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한 '착한 목자'였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착한 목자' 이광재 신부의 삶을 되짚어보자.

 

'착한 목자'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초라한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 착한 목자 예수를 따르고자 사제가 된 이광재 신부는 외양간은 아니었지만 1909년 6월 9일 강원도 산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 아버지 이만현(가브리엘)과 병약한 어머니 김 수산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북녘 땅이 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냉골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굶주리는 둘째 아들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어머니는 광재가 5살 되던 해에 누이를 시켜 어린 동생을 저잣거리에 버리고 오라고 했다. 어린 동생을 얼러 15리 길을 걸어 장터에까지 갔지만 누이는 동생을 차마 그냥 두고 올 수 없어서 등에 업고 돌아왔다.

 

 

깊은 신앙심의 가정 환경

 

굶어죽을까봐 두려워 자식을 버릴 작정까지 했을 정도로 가난의 극을 치달았지만 부모는 깊은 신앙심으로 2남 1녀를 키웠다. 아무리 먹고 살기가 힘들어도 묵주신공은 빠짐없이 바쳤다. 어머니는 병약해서 집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늘 기도 속에 살았다. 광재가 사제성소를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돈독한 신앙 분위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었지만 광재는 7살 되던 해에 형(광익 필립보)과 함께 동네 글방에 다니며 글을 익힐 수 있었다. 형의 증언에 따르면 5년 동안 글을 배우면서 종아리 한 번 맞지 않고 글방에 다녔다. 그만큼 총명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린 광재가 언제 첫영성체를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구교우 집안의 전통을 고려한다면 명오가 열리는 나이인 7~8살 때부터 형을 따라 포내본당 관할 공소에 다니면서 첫영성체를 했을 것이고, 포내본당 주임 부이수 신부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제성소에 관심을 갖게 됐을 것이다.

 

소년 광재에게 사제성소의 꿈을 키워준 또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신학생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였다. 광재가 살던 냉골에서 포내본당까지는 20리를 걸어야 했지만 광재는 한 번도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 노기남 신학생에게 예사롭게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14살 때인 1923년 9월 14일 광재는 마침내 용산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한다. 또래인 이재현(요셉)과 함께였다. 돈이 없어 집에서부터 황해도 평산 남천 역까지 150리를 걸어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순박한 '촌놈' 신학생

 

신학교 입학생 가운데 두루마리 차림은 이광재뿐이었다. 게다가 유난히 작은 키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휘어진 손가락 등으로 광재는 신학교에서 선배와 동료들에게 '촌놈'으로 불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지한 촌놈이 아니라 순박하고 깨끗한 촌놈이었다. 처음에 그를 놀렸던 신학생들도 그의 순박함과 성실함에 감화되기 시작했고, 언제가부터는 그를 '8품 신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 '7단계로 이뤄진 품'을 받아야 했는데 마지막 7품이 신품 곧 사제서품이었다. '8품 신부'라는 별칭에는 이미 그가 신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았을까.

 

[평화신문, 2010년 5월 2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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