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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통일사목] 통일 사목의 현주소를 점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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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04 ㅣ No.560

[통일 대비, 어떻게?] 통일 사목의 현주소를 점검한다

 

 

무엇을 준비하는 것인가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는 1980년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북한의 연평도 도발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속으로 치달았다. 연평도 도발사태는 한반도의 현주소가 1953년 이후 정전 상태, 곧 전면전이 일시 멈춘 휴전 상태에 머물러있다는 위기감을 현실감 있게 되살려놓았다. 이런 상태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이 가까워 오고 있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어떤 통일을 말하는 것일까?

 

‘통일 사목’이란 용어는 생소한 편이다. 남한 교회는 1988년부터 통일 사목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가 산하에 연구소를 만들면서 그 명칭을 ‘통일 사목연구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북한선교연구소’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이 ‘선교’라는 용어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통일 사목이란 용어를 선택했다. 남한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선교 역시 통일이란 민족사적 과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므로 이를 뜻하는 ‘사목’이란 용어를 ‘통일’과 연결시키게 된 것이다.

 

이런 뜻에서 통일 사목은 ‘민족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여 남과 북을 한마음 한 몸으로 만드는 복음적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한국 교회의 사목적 활동’으로 요약된다. 통일 사목연구소를 설립할 당시 김춘호 신부(수원교구)는 통일 사목에 대해 “일상적인 신앙생활과 사목활동 가운데서 분단의 고통을 복음의 빛으로 다시 비추어보고 통일에의 희망을 종말론적 구원의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게 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욱 깊이 있는 역사성과 현실성을 지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 뿌리내려 실체화되려면, 일선 사목자들이 통일 사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본당 사목 활동의 주요한 부분으로 간주하여야만 한다. 본당사목과 떨어져서는 어떠한 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본당에서의 통일 사목 정착이 통일에 대한 접근의 출발점인 동시에 정점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일의 영성

 

통일은 현실 문제이다. 이 현실 문제를 보는 시각은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다양하다. 연령과 계층, 이념적 경향에 따라 교회 안에서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국가와 정부 정책에 따라 남북관계가 변화할 때마다 통일 문제는 출렁이게 된다.

 

이런 모습의 분단 현실 속에서 교회는 이 문제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통일의 영성’이다. 통일 영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폭넓은 이해 없이는 통일 사목이 결실을 맺기 힘들다.

 

“통일의 영성은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통일 뒤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동서독의 경우에서 보듯이 통일은 새로운 삶과 함께 새로운 어려움과 고통을 수반한다. 때문에 통일의 진정한 의미는 통일된 삶의 완성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여기서 통일의 영성이 요구된다. 겉으로의 통일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 통일을 이루려면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영성에의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북한선교위원회 총무를 지낸 정광웅 신부의 말이다.

 

통일 사목은 통일 이전과 이후 그리고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그 중심과 균형을 이루는 우리의 신앙적 좌표가 바로 ‘통일 영성’이다. 이런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사목자는 사목자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통일 사목에 대한 이해와 접근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한다.

 

주교회의 1992년 춘계 정기총회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변경했다. 이로 말미암아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시대적 징표가 선명히 제시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적 의미에서 ‘갈라진 형제들과 하나 됨’을 내면화하는 통일영성은 신자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북한 교회

 

통일 사목의 대상은 북한이다. 여기에는 북한 교회를 비롯해서 북한 사회에 관한 모든 것이 포함된다. 남한 교회의 신자들은 북한 교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그리고 왜관 분도수도원인 덕원면속구 등 세 개의 교구가 있었고, 황해도는 서울교구에 속해있었다는 것. 신자들 숫자는 5만 명이 넘었다는 것. 평양교구장은 홍용호 주교, 함흥교구장 겸 덕원면속구 교구장은 독일인인 신 보니파시오 주교였고, 북한 당국에 의해 1949년 5월 덕원수도원이 폐쇄되면서 신 보니파시오 주교를 비롯, 수도원과 신학교 교수 신부 모두가 체포되었다는 것. 곧이어 홍 주교마저 행방불명되면서 북한 교회의 교계제도는 붕괴되었다는 사실 등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분단교회사에 대한 교육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1980년대 이후 종교정책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1987년 6월 평양 비동맹회의에 바티칸 대표단을 초청했고, 당시 서울대교구 사목실장이었던 장익 신부가 대표단에 포함되어 평양에 가서 다섯 명의 신자들을 만났었다는 사실. 이 가운데 두 명의 신자가 1988년 4월 바티칸에 초청되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고, 부활대축일 미사에 참석했다는 것. 1988년 6월 북한이 ‘조선천주교인협회’ 결성을 공식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에 평양 장충성당을 건립했으며, 장익 신부와 정의철 신부가 10월 말에 방북, 첫 미사를 봉헌했다는 사실 등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이 북한 신자들이 평양 장충성당을 건립하면서 성모님을 주보로 모셨다는 것. 그래서 남북한 교회가 모두 성모님께 봉헌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신앙의 신비’를 감사하고 찬미하는 목소리도 찾기 힘들었다.

 

 

1995년, 통일 사목의 분기점 그리고 그 이후

 

해방과 분단 50년을 맞이했던 1995년은 통일 사목의 분기점이자 새 출발점이다. 통일 사목에 대한 실천적 접근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립되고, 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의 평양 사목방문을 위한 구체적 준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각 본당이 3% 전후의 통일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민족화해학교가 문을 열었다. 뉴욕과 베이징에서 조선천주교인협회 관계자와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대북 인도적 지원도 본격화되었다. 평양에 국수공장을 거쳐 지금은 북한 영유아들을 위한 어린이 영양소 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1995년에 북한선교위원장 이동호 아빠스가 발표한 사목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제13항은 “한국 천주교회 역시 분단의 역사 속에서 북한 사회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겸허히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 사목은 북한 교회가 처한 북한 사회의 특수성, 곧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또한 비록 남한 교회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북한 천주교인들의 몸짓은 그 안에서 당신 섭리의 역사를 이루고 계신 주님의 구원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역사성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1995년 이후 2010년까지 15년간 남한 교회는 대북지원 이외에 어떤 형태의 통일 사목적 노력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교계제도를 전제로 하는 보편교회적 접근 이외의 현실적 대안적 접근 가능성을 조금도 열어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 원인은 북한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남한 교회 자체 내에서 찾아야 한다. 실제로 남한 교회는 통일 사목의 길을 열어나가는 노력 자체가 부족했다.

 

단적인 예로 서울대교구가 추진한 ‘민족화해센터’ 건립도 비용 문제로 벽에 부딪쳐있다. 백여 억 원의 통일기금을 쌓아두고 있으면서도 통일기금은 “통일 준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통일 뒤를 대비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기금의 용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통일 사목 자체에 대한 인식 결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런 남한 교회의 모습을 ‘북에서 당신 섭리의 역사를 이루고 계신’ 그분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통일 사목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만 한다.

 

* 변진흥 야고보 - 가톨릭대 겸임교수,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평화통일포럼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변진흥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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