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노동사목] 책임 있는 소비자, 투자자로서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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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575

[경향 돋보기 - “새로운 사태” 반포 120주년과 우리 사회의 노동자] 책임 있는 소비자, 투자자로서 그리스도인

 

 

자본주의 경제학은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환율, 주가, 금리, 국민총생산 등은 ‘거시경제지표’라고 합니다. 거시경제학에서는 거시경제지표가 변했을 경우, 예를 들어 환율이 올라가거나 떨어졌을 때 전체 경제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부가 어떤 경제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 이 거시경제정책의 입장에 따라서 고전학파, 케인즈 학파, 합리적 기대학파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바로 신자유주의는 고전학파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시장 자체는 각 경제 주체의 합리적 선택에 따라 균형을 이루므로 정부의 개입이 필요 없는데 오히려 정부가 개입하여 시장의 효율성과 균형이 깨진다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각 주체의 합리적 선택은 미시경제학에서 주로 가계와 기업의 행동 양식과 그것이 미치는 경제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가정이 있습니다. 곧 기본적으로 모든 경제 주체는 ‘합리적’이며 가계와 개인은 ‘효용극대화’,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경제행위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의 이윤극대화는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만, 가계 또는 인간개별 주체가 효용극대화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이 효용이란 말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애매하지 않습니까?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면서 드는 몇 가지 의문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정에 몇 가지 의문이 듭니다. ‘기업의 이윤극대화 추구와 개별 소비자의 효용극대화 추구 전략이 궁극적으로 최대한의 사회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효용극대화를 위해서 경제행위를 하는 것인가? 위의 전제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과 충돌하지는 않는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기업의 이윤이 늘어나면 그 이익이 사회 구성원에게 분배되는 효과가 생긴다고 합니다. 주주와 투자자에게는 더 많은 배당이 돌아갈 것이며, 그들은 향후에 기업 전망을 낙관적으로 판단하여 기업의 생산과 설비 투자를 확대할 것입니다. 결국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것이며, 경기는 활성화된다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들은 경제적 약자는 경제 활동의 패배자(loser)일뿐이며, 그 원인은 그들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사회가 이들을 위한 지원 정책(복지 정책)보다는 그 돈을 차라리 다른 데 투자하여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킴으로써 소득 분배를 이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경제 성장의 증거로 쓰는 것이 국내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 가계 가처분소득 등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제 자료들입니다. 이는 모두 사회 전체와 평균적 부의 증가와 관련된 자료지 삶의 질과 소득 분배와는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 자료를 인정하여,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 경제 규모의 크기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러온 부의 양극화는 엄청 심각합니다. UN 자료에 따르면, 현재 세계 인구의 40%는 빈곤 상태이며, 6분의 1은 극빈 상태라고 합니다. 이는 바로 지역, 계급, 인종간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부의 증가로 소득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환경 파괴로 생긴 생태계 위협과 지구 온난화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경제적 불확실성은 갈수록 커지고, 금융 위기와 같은 날벼락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고용 불안과 노동 소외의 가속화입니다. 오죽하면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45세가 되면 정년퇴직), 오륙도(56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놈), 88만 원 세대(20대 비정규직 이야기)란 말이 유행되고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재벌들은 기업의 (정확히는 재벌 일가) 이윤 추구를 위해서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을 정치인들에게 뿌리고 그 반대 급부를 누린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다 회사는 망했어도 자신의 재산은 해외로 빼돌릴 수 있었고, 그 피해는 공적 자금이라는 명목하에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줄여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노조를 무력화시키려고 도청, 불법 미행과 납치를 일삼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그룹의 설립자가 한 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 된다.” 이렇듯 기업의 이윤극대화가 전 사회적인 통제를 받지 않을 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목적성을 지닌 인간

 

소비자는 자신의 효용극대화만을 위해서 경제행위를 할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장래를 위한 저축도 해야 하고, 여가 활동도 신나게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수십 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하고, 돈을 벌거나 재충전을 해야 할 시간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이 인간은 너무도 복잡한 목적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개별 인간의 경제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에서 찾는다는 것은 너무 거칠고 단순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위의 두 가지 이론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과 비교할 때 굉장히 위험한 이론입니다. 물론 교회의 사회교리는 개별 경제 주체들의 재산권 사적 소유와 이익 추구를 보장하고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제한적인 사적 이익의 추구는 분명히 또 다른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드러날 노동의 소외를 이미 1891년에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를 통해 크게 우려한 바 있으며, 이 가르침은 현재 신자유시대에서도 매우 강력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투자자이자 소비자인 그리스도인

 

미약한 개별 존재가 이 거대한 신자유주의 경제에 도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건지, 가능하다면 교회의 가르침과 맞는 어떤 대안적 행동들이 있는지, 또한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고민스러우실 겁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대안적 움직임이 있고, 우리는 이 대열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취하면서도 얼마든지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도입될 수 있도록 충분히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경제적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투자자이자, 소비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빛을 발한 것은 투자자로서의 대안적 움직임입니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이미 1920년대 최초의 사회 책임 투자 정책인 ‘Thoughtful Christian's Guide to Investing(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투자 가이드)’을 세웠습니다. 이 정책을 바탕으로 1928년에는 24개 윤리 펀드를 만들어 자산을 투자하였는데, 이 펀드는 주류, 담배, 도박, 무기 등에 투자를 제외하는 ‘부정적 스크리닝(Negative Screening)’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이후 1986년 미국 주교회의는 ‘모든 이를 위한 경제(Economy for All)’를 통해, “교회는 이제 소외와 빈곤에 대한 구조적 시각을 가지고 경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신앙은 제대 앞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 경제 시장은 경제정의로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 첫 장소가 되기도 한다.”라고 천명하며 사회 책임 투자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1991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교회의 경제행위는 적당한 수익과 가톨릭 신념으로 윤리적,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제공했습니다. ① 해가 되는 것은 피하기(avoid evil : 도박, 주류, 낙태 산업 등), ② 좋은 일에 투자하기(do good : 친환경기업, 대안 투자 등), ③ 적극적으로 기업 활동에 참여하기(주주 운동 등)의 전략까지도 제시했습니다. 2003년에는 사회 책임 투자 가이드라인을 정립하여 사회 책임 투자 운동에 대한 방법, 투자 과정, 투자 선별 원칙과 주제까지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ICCR이란 범종교적 사회 책임 투자 운동 단체를 구성하여, 해마다 100개가 넘는 기업에 직접적인 투자뿐 아니라, 주주의 권리로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사회, 환경, 책임 경영을 촉구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청지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를 중심으로 ‘종교와 투자 포럼’을 조직하여, 올 하반기에는 천주교의 사회적 가르침에 맞는 투자 가이드라인을 작성하고 직접 투자를 할 펀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 동참할 분들이 있으시면 인터넷에서 (사단법인)기업책임시민센터를 찾아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 됩니다. 만일 이것이 어렵다면 현재 판매되고 있는 사회 책임 투자 펀드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천주교의 기준보다는 다소 폭넓게 선정 기준을 적용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 대기업 가운데 비교적 사회 책임을 잘 지키고 있는 기업만을 골라서 투자하고 있는 펀드를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투자자처럼 높은 수익률만 보장하는 펀드에 우리의 소중한 자산을 투자한다면, 그 돈은 도박 산업에 투자되거나 무기 생산 기업에 투자되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위배된 신앙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1년에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커피는 4천억 잔이 넘는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마시고 있는 커피 판매금의 99%는 대기업과 중간거래상 등의 몫으로 돌아가고, 정작 커피를 생산하는 아프리카와 남미 농가에는 불과 1%의 이윤만 돌아간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결혼식 예물로 사용하는 다이아몬드가 대부분 소년병들을 내전으로 내모는 참혹한 아프리카 내전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월드컵에 열광하며 15만 원짜리 축구공을 사서 아이들과 축구를 즐기는 동안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은 하루에 300원만 받으며 12시간 이상 축구공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도 되는 걸까요? 또한 안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이 거대한 납품 시스템을 바꿀 수 있냐며 외면한 채 살아가도 되는 걸까요?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이런 경제 시스템을 바꾸려고 공정무역(Fair Trade)을 이끄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정무역이란 주로 선진국의 소비자들이 저개발국의 생산자들과 직거래를 통해, 정당한 가격을 통해 구입하는 거래 시스템을 말합니다.

 

요즘은 이 개념에서 더욱 확장하여 윤리적 소비를 위해 공정무역 지수가 높은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고, 반대로 공정무역 지수가 낮은 기업의 제품은 사지 않거나 불매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윤리적 소비로 착한 기업과 따뜻한 자본주의의 대열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오염을 유발하는 자동차의 구매나 사용을 지양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대기업 주도의 거대 쇼핑몰보다 약간 비싸지만 소매점이나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시장 독점을 개선하는 데 동참할 수 있습니다.

 

또 저개발국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업 제품을 사용하지 않기,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기업의 제품만 사용하기, 지하자원(다이아몬드, 여러 가지 지하광물) 등을 강제적으로 차지하려고 전쟁과 인권 탄압 등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일삼는 국가 제품 안 사기(예 : 나이지리아, 버마)를 통해 이 운동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정보는 인터넷에서 한국공정무역연합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근본적으로는 윤리적 소비라는 개념이 부각되는 것은 윤리적 생산이란 개념과 함께 부각됩니다. 기업의 윤리적 생산은 사회 책임 투자를 통해서 이끌어내고, 윤리적 소비는 여러분들의 물적 욕망을 억제하면서, 나의 소비가 어떻게 가난한 이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 되지 않을까요?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사랑을 실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그 헌신은 현대의 신자유주의 지지자들과 늘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것을 두려워하여 지금처럼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상대주의에 순응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신자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셨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에 인간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선포하고 스스로 모든 대안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주원 시몬 - 기업의 사회 책임 투자와 관련한 연구와 조사 활동을 하는 한국CSR평가(주)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박주원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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