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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문화 비평: 잉여의 문화화, 그 양가성 사이에서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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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598

[문화 비평] 잉여의 문화화, 그 양가성 사이에서 꾸는 꿈


‘잉여’는 좋은 것?

“잉여는 좋은 것인가요? 나쁜 것인가요?” 유치원도 아니고 대학 강단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나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3년 전부터 난 더 이상 전통사회의 계급분화와 부족 간 전쟁을 초래한 ‘잉여’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무덤덤하게 소개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수렵 · 채집 사회는 ‘잉여’라는 호사를 누리기 참으로 힘들었던 생활조건이었다. 열매를 따 먹고 물고기를 잡아 배고픔을 달래던 그들에게 겨울은 얼마나 위협적인 계절이었을까? 행여 누군가 ‘먹고 남은’ 잉여의 음식이 있었다면 그야말로 축복이었을 터다. 주린 배를 채우며 다시 봄이 오기까지 그들의 생명을 이어줄 은총이었을 거다.

그런데 농업혁명 이후 생산방식의 발전과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대로 엄청난 양의 ‘잉여생산물’이 생겨났다. 하여 잉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다 보니 전쟁이 발생했고, 이긴 자들이 이른바 ‘특권층’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통사회의 ‘잉여’는 서로가 가지고 싶어하는, 필요하여 싸우기까지 하는 탐나는 대상이었다.


어찌 인간이 ‘잉여’일 수 있나

그런데 슬프게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잉여’로서의 사람은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데려가려고, 차지하려고 싸울 일은 더더욱 없다. 10퍼센트 미만의 국제 경쟁력을 지닌 ‘엄친아’들과, 그 밑에 15-20퍼센트 내수용 전문 기능인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잉여’란다.

어찌 인간이 ‘잉여’일 수 있을까? 더구나 더 많은 수의 인간을 ‘쓸모없다’고 분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것이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고 기능에 따라 인간의 값 또한 달라지는 사회이고 보니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젊은이들의 다수가 상위 몇 퍼센트에 속하지 못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잉여’라 자조한다.

그래서 그리 물은 것이다. “잉여는 좋은 것인가요? 나쁜 것인가요?” ‘잉여’를 패배자, 요즘 말로 ‘루저’의 동의어로 알고 있거나, 기껏 희망적으로 해석하여 상위 그룹에서 결원이 날 경우 쓸모 있는 인간으로 상승할 수도 있는 ‘예비 대기자’ 정도로 알고 있는 세대이기에, 난 이번 학기도 ‘잉여의 사회학’을 다루면서 여전히 이 질문을 한다. 잉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을 감히 ‘잉여’라 분류하게 만든 이 제도가 나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말이다.

그런데, 내가 굳이 위로해 줄 필요가 없었다.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 2011)에서도 밝혔지만, 아이들은 제한할 수 없이 펄떡이는 생명력을 발산하며 이미 ‘제도’라는 커다란 파도 위에서 자유롭게 서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잉여’여도 괜찮아

아직 그 파도에 대항할 힘도 없고, 무엇보다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의 생태를 뒤바꿔 놓을 힘은 더더욱 없는 미약한 젊음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거친 파도에 휘말려 허우적대며 빠져 들어가는 대신, 멋들어지게 ‘서핑’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게 신기하고 신통했다. 예뻤다. 이 제도가, 어른들이 그들의 열정을 공적으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 해도, 하여 그들이 온 · 오프라인에서 열정으로 만들어내는 몸짓을 ‘잉여짓’ 또는 ‘잉여질’이라 그리 명명해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무언가 열심히 창조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잉여질을 잘하는 잉여킹이 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었다.

다른 ‘잉여’들에게 보여주려고 밤새워 웹툰을 만들고, 패러디물을 만들어 각종 포털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리고, 또 그걸 보고 환호하고 격려하는 수많은 ‘잉여’들이 댓글로 반응한다.

그들 중에는 창작자에게 바라는 바도 다양하여 이것저것 주문도 많았는데, ‘주문제 생산’인 양 창작자는 또 이를 살뜰히 챙겨 자신의 다음 작품에 반영하는 ‘소통적 창의력’도 보여준다.


‘젊은 잉여들’이 원하는 것

창작하는 잉여든, 반응하는 잉여든 이들은 주인공이 그 모든 고난과 역경에도 승리하는 ‘뻔한’ 영웅신화에는 흥미가 없다. 결말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스토리는 재미없단다. 하여 드라마나 영화, 뉴스 등 이른바 ‘원본’에 해당하는 문화 콘텐츠들을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재창조하고자 패러디하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때문에 ‘잉여스러운’ 아이들은 재미있는 영상물을 만나면 그 내용을 집중하여 이해하고 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범생(엄친아)’과는 다르게, 아예 처음부터 ‘저건 어떻게 패러디할까?’를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패러디의 심리학이란 게 그런 거다. ‘원본’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으나 그래도 ‘원본’을 만든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 ‘원본’과 여전히 대화하길 원하는 소통의 몸짓이다. 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과의 소통이고, 그리고 변화다.

‘젊은 잉여들’이 결말 부분에서 ‘반전’을 즐기게 된 사회적 원인을 생각하자면 우울함과 기대감이 동시에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개인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너무나 미약한 사회, 아무리 노력해도 커다란 하나의 기계가 되어버린 이 시스템을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작품 주인공들의 급작스러운 몰락이나 황당한 선택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이른바 ‘허무’ 시리즈라고 불리는, 여태 노력한 일을 순식간에 물거품을 만들어버리는 결말을 그려내면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자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이 어이없는 삶의 구조에 동조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그들만의 저항 방식이라는 의미가 읽혀, 난 또 기대란 걸 하게 된다. 그대로 답습하고 순종하는 젊은이들에게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삶의 방식이 새롭게 바뀔 가능성이 있다면 그 잠재력은 ‘잉여인간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어른들의 규칙에 맞춰 살아간 ‘엄친아’들이 아니라.


새로움은 ‘잉여’로부터

한 집단의 문화적 전제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고, 또 그만큼의 오랜 세월이 지나야 바뀐다. ‘다수’가 바꾸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낡은 것을 ‘보수’하려는 그 어떤 소수자도 결국 특정 질서를 ‘부당하다’ 또는 ‘무의미하다’ 여기는 다수를 이기지는 못했다. 하여 자신감이 생기는 거다.

자라나는 젊음의 80%를 ‘잉여’라 규정하는 이 ‘사악한’ 제도를 ‘당연’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업적이나 실적 평가에 들어가지도 않을 ‘잉여짓’에 열정을 발휘하며 기발한 창조력을 보이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늘어간다.

아무리 내달려도 내가 ‘엄친아’가 될 확률보다는 ‘잉여’가 될 확률이 더 많은 이 현실을 어찌 다수의 젊은이들이 ‘의미 있다’ 여기겠나? 살아있는 생명에게 똑같은 꿈을 꾸고 같은 트랙을 달리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어찌 행복하겠나?

이들은 이 사회의 규칙을 알아버렸다. 똑같은 기능만을 습득한 까닭에 10 또는 20퍼센트에서 배제되고 나면, 다른 기능은 할 줄도 모르고 할 의욕도 없어 ‘잉여스럽게’ 있다가 결국 불필요하여 버려지는 존재가 되고 마는 ‘규칙’ 말이다. 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는 몸짓을 ‘잉여짓’의 이름으로 문화화하는 중이다.

다양성이 살 길이다. 현재의 제도가 내달리라 제시하는 그 외길, 동질성을 향한 그 일방통행에서 벗어나 다른 모색을 하는 ‘잉여’들이 새로움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움이 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을 때, 인간의 창의력을 평가하는 방식도,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도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먼 훗날의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는 젊음에게 그 새로움은 ‘당연’의 이름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 사회학자의 전망이며 또한 한 신학자의 꿈이다.

* 백소영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HK 연구교수. 이화여대와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했다. 기독교사회윤리학 전공.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 「드라마틱」, 「잉여의 시선에서 본 공공성의 인문학」(공저, 2011) 등을 저술하였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백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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