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54: 김원중, 장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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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07 ㅣ No.1466

[복자 124위 열전] (54) 김원중 · 장 토마스


교우촌서 살던 김원중, 신자 대부분 배교 중에도 끝까지 신앙 지켜
병인박해 칼바람에도 주님 뜻 따르다 가족과 함께 체포된 장 토마스



발래기는 진천에서도 ‘드러난’ 교우촌이었다. 지금의 진천군 백곡면 명암길 일대다. 지금이야 백곡공소가 있어 신앙의 맥을 잇지만, 당시만 해도 공소는커녕 사제를 보기도 어려운 시절의 교우촌일 뿐이었다.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


복자 김원중(스테파노, ?∼1866)은 발래기 교우촌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은 아니었다. 회장은 신성수였고, 그의 형 신성순, 김원중의 사촌 김선화(베드로) 등이 공동체의 주역이었다.

박해는 공동체를 와해시키다시피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미 발래기 신자들을 주시하고 있던 진천 관아에선 공동체로 전갈을 보내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교회 서적을 가져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발래기 신자들은 대부분 두려워하며 관청의 명령대로 천주교 서적을 가져다 바치고, 관장 앞에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때 김원중은 “천주교를 믿는 내가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고 반문하고, 관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외교인들은 물론 발래기 신자들까지도 화를 내며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며 그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김원중은 신앙을 위해 이 모든 원망을 감수했다.

1866년 10월 4일, 관아에선 다시 발래기로 전갈을 보내와 모두 출두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전해 들은 그는 “이제 (관아에)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가지 말고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신덕이 깊은 사람들만 관아에 가자”고 말했다.

이튿날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발래기 신자 중 김원중을 비롯한 10명만이 자진해 체포됐다. 이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서자 관장은 “일전에 가져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김원중은 책을 가져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모두 저의 책”이라고 답변했다. 관장은 즉시 그를 가뒀고, 신성수 회장과 두 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하고 말았다.

이들은 25일 동안 진천 관아에 갇혀 있다가 10월 말 모두 공주로 압송됐다. 공주로 떠나기에 앞서 김원중은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돼 있으니 너희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며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라”고 당부했으며,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했다. 그러고 나서 김원중은 일행과 함께 그해 12월 16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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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장 토마스


한편, 장 토마스(1815∼1866) 복자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시 양감면 은행나무로 17번길 일대) 출신으로 배티, 지금의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양백리)에 정착했다. 인척인 장 시몬 회장이 배티에 살고 있어 그곳에 정착한 장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며 외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어찌나 선량했는지,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일러 ‘착한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1866년 초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 많은 신자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 토마스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돼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했다.

진천 관아로 압송된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신앙을 지켰다. 얼마 안 돼 청주로 이송된 뒤에도 그는 “만 번 죽어도 신앙을 배반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며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이윽고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청주 충청병영 장대(현 청주 남문로 2가)에 끌려나가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유혈이 낭자한’ 처형장에서 “천 번, 만 번을 죽어도 신앙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기개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하느님과 만나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같은 순교 신앙은 불가능했을 터다. 그랬기에 오히려 복자들은 천주를 배반할 수 없어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5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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