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4-0908.....한가위 축제일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09-09 ㅣ No.1587

한가위 축제일 <0815-2>

요엘 2,22-24.26묵시록 14,13-16 루카 12,15-21

<미사 진행 순서>

미사시작, 고백기도, 자비송, 앞으로 나와서 하는 분향, 자리에 앉아서 하는 위령기도, 대영광송, 추석미사의 본기도........

 

<분향 전에 하는 기도>

주 하느님, 세상의 삶을 마친 영혼들, 당신의 자비를 간절히 바라는 영혼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억하는 조상님과 부모님, 형제와 자매, 친척과 은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내려주소서. 아멘.

2014. 9. 8. (월요일). 이태원. 06:00.

 

                    주제 : 추석날에 생각하는 차례 <기일제사(忌日祭祀)’>

오늘은 추석입니다. 추석이라는 글자는 가을저녁이라는 뜻이지만, 그 뜻에 더하여 가을걷이 후, 하느님께 추수에 대한 감사를 봉헌하는 때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렇게 마음이 풍성해지는 때에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해주셨거나 우리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을 세상을 떠난 분들, 거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분들을 함께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거기에다가 더하여,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아직 우리들 각자에게 남은 세상의 시간을 이용하여 하느님이 뜻을 더 잘 실천하고 내가 쌓은 공과 덕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거나 그 공과 덕을 양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지 잠시 생각할 시간으로도 쓴다면 좋겠습니다.

 

추석날짜는 음력815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가 올해의 경우에는 본격적인 추수를 하기 전, 시기상으로 빨라서, 추석기분이 나지 않을 법도 합니다만, 날짜와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같은 상황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만 다르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일입니다.

 

지금 아침 이른 시간이라서, 우리들 각자가 갖는 마음의 자세는 다를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은 오늘 차례를 드리는 시간으로 많이 사용할 법한 이 시간에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며칠 전, 추석에 할 말을 생각하면서, 몇 사람에게 제가 물어본 말이 있습니다. 추석에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 조상님들은 어디에 있다가 우리가 봉헌하고 바치는 제삿밥을 먹으로 올까 하고 말입니다.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롯한 조상님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다가 우리가 바치는 제사에 그 제사상을 받기 위해서 오실까요?

 

제사(=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 의식)를 얘기하는 것은 동양윤리입니다. 동양윤리의 제사는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하는 행위만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담는다고 말할 서양의 제사인 미사(MISSA)’는 단순히 죽은 사람과 우리만의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역할도 필요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기는 해야겠지만, 그들의 세상 삶을 셈하고 대가를 베풀어주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면서 행동할 특별한 자세를 함께 고려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동양윤리에서 말하는 조상님들의 넋은 어디에 머물다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일까요? 이렇게 질문하지만 사실은 저도 그 정답은 모릅니다. 제가 가본 적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 제게 찾아와서 나 여기에 있어하고 알려주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쳐주는 신앙내용에, 이 혼령 혹은 영혼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바라는 연옥(煉獄)이나 이미 하느님과 함께 축복과 영광을 누리고 있을 천국(天國) 혹은 하느님나라에 머물고 계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봉헌하는 제사는 내가 기억하는 분들이 내 정성을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라고 하느님께 조르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느님께 조르는 내용이 올바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내가 갖거나 드러내는 삶의 자세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의 하나를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탐욕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대신 전해줍니다. 탐욕은 재산에서 옵니다. 탐욕은 세상에서 내가 힘들여 벌었다고 생각하는 물질의 크기에서 옵니다. 사람이 사는데 그 물질이나 돈으로 표현되는 것이 반드시 있기는 해야겠지만, 그것만이 만사를 형통하게 하는 보증수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말씀에 등장한 부자이 행동을 보면서, 그가 잘못 사는 것이라고 마음 놓고 탓할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잘못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여 인간을 그 안에서 살게 하시고, 그 사람이 바른 길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세상에서 산 모양에 따라서 합당한 보상을 해줄 하느님은 사람에게 벌을 주려고 노려보는 분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려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깨닫겠습니까?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행동하는 결과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가 쌓은 덕행을 오늘 기억하는 부모와 조상들과 형제들을 포함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방법에 따라, 그분들이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시간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만큼, 훗날 내 후손의 다른 사람들도 나를 위해서 그 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짧은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하느님,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기억하는 연령들, 당신의 자비가 필요한 분들에게 그 영광이 닿을 수 있도록, 저희가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62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