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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시우 알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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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10 ㅣ No.1400

[124위 시복 특집] 김시우 알렉시오(1782~1815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하시려고 수난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충청도 청양 출신의 김시우 알렉시오는 지체가 그리 높지 않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지만, 몸의 오른쪽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인 탓에 혼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시우는 성실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기 때문에 여기저기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약간의 돈을 얻기도 했습니다.

1815년 초에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시우가 몸을 맡긴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포졸들이 교우들을 체포하자 김시우는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울면서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왜 우느냐 묻는 포졸에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불구의 몸이라고 잡아가지 않으니 그것이 서글퍼 웁니다.”하고 대답한 김시우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안동을 거쳐 대구로 압송되었습니다.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던 김시우에게 감사가 물었습니다.

“네가 예수를 숭배한다고 들었다. 그 예수라는 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이유로 그런 자를 숭배하느냐? 그 죽음에 무슨 훌륭한 점이 있다는 게냐” 김시우가 대답했습니다. “중국에 9년 동안 장마가 졌을 때 백성을 걱정한 하나라의 우임금은 자기 백성을 구하려 8년간 나라를 두루 다녔고, 세 번이나 궁궐 앞을 지나치면서도 궁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왕은 제 백성의 육적 구원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인데도 만인이 그의 선덕을 칭송했습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하시고자 수난받고 돌아가셨으니, 이러한 은혜를 베푸신 분을 섬기지 않는 자를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감사 나리께서도 사람이시니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경배하며 천주교를 신봉하셔야 합니다.”

격노한 감사는 혹독한 형벌에 더하여 더이상 말하지 못하게 그의 턱을 부수라 명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힌 김시우는 음식을 구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대구로 이송된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의 후유증으로 옥사했습니다. 1816년 음력 10월 21일, 당시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김시우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이를 듣는 모든 신자가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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