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연중 34 주일-다해-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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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중 제 3 4 주 일 ( 다 해 ) <그리스도왕 대축일> 2사무 5,1-3 골로 1,12-20 루가23,35-43 1998. 11. 22.
오늘은 연중 34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왕(王)!'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왕(王)'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 즉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던 사람, 옛날 전제 군주시대의 정치 권력자를 먼저 떠 올립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사극(史劇)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임금 또는 왕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그 첫번째 이유이고, 우리 모두 왕(王)이 될 수 있는 영토나 자리가 없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이 많은 요즘 세상에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말을 바꾸어 씁니다. 사용하는 말이 바뀌면 그 성질을 갖는 사람의 모습도 바뀐다고 생각을 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무지막지한 '왕'이라는 말보다는 '대통령'이라는 말을 씁니다. 말이 바뀌기는 했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는 '왕'이라는 직책과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입니다. 아마 이 용어를 쓰다가 싫증나면, 수상이라든가 아니면 그보다 거부감이 적다고 생각할 새로운 이름으로 또 다시 바꾸자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 바뀐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왕'이라는 말은 세속의 그런 권력을 행사하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때때로 세상살이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판정합니다. 그래서 틀린 일들도 감정이 앞서면 틀리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고집을 꺾어야 할 것도 때로는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이유의 한가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 표현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가 부족한 언어를 가지고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이 쓰는 말에 감정을 상하는 일없이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정착했을 당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가리켜 만군의 주(=야훼 싸바옷), 임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군대의 주님이라고 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은, 자기 민족과 백성을 이끌고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러 갈 때에도 하느님이 함께 싸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권력만을 행사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옛날의 왕들이나 지금의 대통령은 싸움의 일선에 서지 않습니다. 뒤에서 결정하는 사람이죠. 대통령이나 왕은 수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그들에게 희망을 요구하면서도 일선(一線)에 서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잘못했을 때에는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세상에서만 통할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활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그 자리에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 호칭과 자리를 인간에게 내어줍니다. 그 자리를 처음으로 차지한 사람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임금이고, 훗날에는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는 오늘 연중 34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이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도 거부감 없이 신앙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려면, 성서에 나오는 말의 의미대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인간 가운데 제대로 된 `임금 또는 왕'은 다윗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일을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고 어려움과 곤란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해 버린 다음에도 끊임없이 자기 민족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로 다윗 같은 왕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그런 바람을 충족시켜 주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 왕이라는 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왕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그리스도 왕은 요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멍청하고, 어리석은 바보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향하여 12군단이 넘는 천사를 불러올 수 있었는데(마태 26,53)도 그저 묵묵히 잡혀가기를 선택한 바보, 5천명을 먹게 하신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왕으로 받들어 모시려고 할 때에도 도망친(요한 6,15) 전력(前歷)을 가진 분이었으며,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을 살리고 감동시켰으면서도 십자가 위에서는 자신을 위해서 그 기적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분(루가 23,39 참조)이 바로 그리스도 왕 입니다. 인간으로 보면,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고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르는 바보를 가리켜서 신앙에서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극(史劇)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왕, 소설책이나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왕은 올바르게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렇습니다. 좋은 것도 좋게 쓰지 않고 남을 해치거나 위협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이렇게 잘못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좋은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전례력으로 1998년을 마감하는 이번 주간을 통해서 우리가 찾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할 일들이요, 그 주제입니다.
연중 34주간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정한 성서주간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에 참여할 수 있을 것(골로 1,13)'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왕 예수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교회의 정신에도 일치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정신에 따라 바르게 살 수 있는 은총을 함께 간절하게 청해봅시다. 이것이 한해를 마칠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71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