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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새터민,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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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2 ㅣ No.524

[달라도 우리, 다문화] 새터민,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새해 들어 교회와 사회의 유명 인 사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런 가운데 그리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우리 분단 현실을 새로 인식하게 한 두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다. 새 터에 잠시 머물다가 영원한 새터전인 하늘나라로 떠난 방 요셉 씨와 강 요셉 씨. 이들의 죽음은 탈북 후 먼 길을 돌아 우리 곁에 와있는 새터민 형제들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돌리라는 촉구처럼 보인다.

 

 

방 요셉

 

북한을 탈출,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남한에 온 방 요셉 씨(32세).  북에 두고 온 아내와 한 살 난 딸아이를 그리워하며 그 힘으로 살았다는 그는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되어 하나원에 들어가기 전 의정부의료원에 입원하였다. 국정원에서 수녀들을 몇 번 본 인연으로 천주교 신자인 간병인에게 꼭 천주교를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그는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2월 12일 의정부주교좌성당에서 거행한 방 요셉 씨의 장례미사에서 새터민 동료가 절절하게 낭독한 고별사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고인을 떠나보내면서 그와 함께 험난한 사선을 헤쳐 꿈속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한 탈북자 동무들 그리고 고인과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온 친지들을 대표하여 고인과 작별인사를 하고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고인은 평범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8살 나이에 군에 입대하여 30살까지 오직 청춘을 다 바쳐 죽도록 일하면서 잘사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천진한 고인에게 동정의 눈빛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되어 가정을 이루었지만 불공평한 평양의 생활방식은 그로 하여금 절대다수인 빈민계층 대열밖에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고인은 그 누구보다 가정에 대한 애착, 자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세대주로서의 역할을 다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제 집으로 단칸방 하나 마련할 수가 없었으며 귀여운 딸에게 사탕 한 봉지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안해에게는 평범한 반지 하나 끼워주지 못한 것을 이곳으로 오면서 두고두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고인이 대한민국에 도착하여 하던 말, ‘내 젊은 나이에 피 튀게 공부하고 일하겠다. 통일은 멀지 않았다. 통일이 되는 그때 떳떳하게 평양에 가서 개선장군이 되어 사랑하는 안해와 딸 앞에 설 것이며 친구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라며 마치 그날이 머지않은 것같이 확신성 있게 이야기하면서 새벽 3시까지 영어공부를 하였습니다.

 

고인은 현재 북한에서 행여나 잘사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다수 젊은 청년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현실을 앞서 생각하는 청년이었으며 어디에다 대고 하소연 할 데가 없어 몸부림으로 자기의 가정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선을 헤쳐 이곳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하 생략)”

 

 

강 요셉

 

꼭 한 달 뒤인 지난 3월 12일 서울 신당동성당에서 강 요셉 씨(58세)의 장례미사가 봉헌되었다. 평양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인민무력부 현역 창작가와 대학 교원(교수)으로 활동했던 강진명 씨는, 어머니가 굶어죽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1999년 두만강을 넘었고 10년간을 중국을 떠돌다 2008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북에 남은 아내가 죽고 딸은 행방불명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는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천주교 모임에 열심히 나와 수료 때는 십자고상을 받고 무척 기뻐했다는 그는 간암이 폐로 전이되어 세상을 떠났다. 지난 2월 초 서울 인사동에서 험난한 탈북 여정을 화폭에 담아 생애 첫 전시회를 열어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이번 전시회 주제는 ‘꿈에 그리던 자유를 찾아’이다. 그 이유에 대해 강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이하의 삶, 곧 인권이 박탈된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전 자유가 무척 그리웠고 그 자유를 찾아오는 것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2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돌이켜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북한 전문 인터넷 뉴스 ‘데일리NK’).

 

병상에서 세례를 받고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며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을 천주교 예식으로 해달라.”고 부탁한 그는 방 요셉 씨처럼 딸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굶주림과 외로움에 죽음이 가까웠다고 느낄 때마다 그를 일으킨 것은 예술혼이었다. ‘이제 천당에 가는구나 하는데 무엇인가 나를 자꾸 쳐다보는 거예요.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분명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 어둠 속에서….’ 마지막 한은 북에 남겨둔 딸. 강 씨는 자장가를 부르며 많은 말을 대신했습니다. ‘이 강산에 무지개가 빗기는 그날에 우리 아기 어서 커서 저 하늘에 선녀 될까’”(문화방송 ‘뉴스데스크’).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 새터민, 그러나 이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다른 이주민들처럼 남북한의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고통을 겪는다. 탈북 과정에서 겪은 심리적 육체적 고통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이들이 많다. 자기 체제나 가족을 배반하고 왔을 것이라는 남한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과 편견도 이들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탈북자임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탈북자를 다룬 영화 ‘크로싱’의 표현대로 정말 ‘그들의 나라는 없는 것일까?’

 

자유를 그리워하며 기회의 땅에서 더 잘 살아보겠다고 남으로 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을 따뜻이 맞아들이고 그러안아야 할 사랑의 의무가 교회에도 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hwahai.cbck.or.kr)는 각 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수도회와 연계하여 새터민들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도록 돕고 있다. 개신교가 재중 탈북자 선교 등 선교 열정으로 새터민에게 다가간다면 천주교에서는 새터민들이 이땅에서 평범하게 잘 살아가도록 돕는다. 수도회들이 하나원을 수료하고 집을 배정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임시 거처라 할 ‘쉼터’들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삶의 단절을 경험하며 불안해하는 새터민들에게 교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관계를 체험하는 장,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준거가 될 신앙을 전수받는 장이 될 수 있다. 고인이 된 두 요셉의 이야기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가 아니라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을 읽어낼까 걱정된다. 오혜정 스바니야 수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새터민 지원 전담) 말대로 “북한 문제는 (정치상황과 맞물려) 늘 미묘하고 예민하다. 신자들 가운데도 북한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복음적인 인식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러나 새터민들은 통일이 되면 자신들이 먼저 경험한 남한의 모든 것을 북한에 알려줄 도우미, ‘북한 복음화의 거들 짝’임에 틀림없다.”

 

낯선 땅에서 간난신고를 겪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한 요셉이 형제들을 껴안고 목 놓아 울며 한 고백이 새터민들의 외침이 될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한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7-8ㄱ).

 

[경향잡지, 2010년 4월호, 배봉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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