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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12: 정규량 신부 (하) 6.25 전쟁 때도 피란 가지않고 신자들 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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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29 ㅣ No.484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12) 정규량 신부(하 · 1883-1952)


6.25 전쟁 때도 피란 가지않고 신자들 돌봐

 

 

- 위령성월을 맞아 용산 성직자묘역에서 기도하는 신자들. 제일 앞쪽이 정규량 신부 묘지다. [전대식 기자]

 

 

정규량 신부는 1924년 6월 6일 부여 금사리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지만 현지 사정은 좋지 않았다. 서천 지역 자근재, 송동, 독매 등 세 공소 교우들이 전임 신부의 유임 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빚어진 '자근재 사건'으로 신자들 사이에 불목이 심했던 것이다.

 

정 신부는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엄하게 꾸짖으며 불목하는 신자들을 진정시키고 화합으로 이끌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본당 내에 파벌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있는데,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하나 저들은 도리어 장애물을 놓습니다" 하고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원주본당 부임 배론성지 토대 마련

 

정 신부는 압고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금사리에서도 학교를 세웠다. 이번에는 '계명여자학술강습회'라는 4년제 과정 여학교였다. 학교 설립은 지역사회의 요청일 뿐 아니라 교우들 단합, 교우 처녀들 교육과 외교인 처녀들 전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시작한 것이다. 이 여학교는 1927년 보고에 따르면 30명 학생이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는 큰 부담이었다. 이 여학교는 정 신부가 금사리를 떠난 후 1932년까지 계속됐다.

 

금사리에서 정 신부는 교우들 분란과 재정적 어려움 등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갈매못 순교터를 확인하고 부지를 매입했을 뿐 아니라(지난 호 참조), 성당 묘지로 쓸 산도 매입, 교회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또 청년회를 조직하고 공소회장단 피정을 실시하는 등 본당 사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 신부는 1928년 원주(현 원주 원동) 본당으로 전임된다. 초임지인 압고지본당에서 11년이나 지낸 것과는 달리 4년 만에 이뤄진 인사여서 정 신부에게도 뜻밖이었다. 그래선지 정 신부가 원주성당 환영회에서 "이번 신부 교체는 의외의 일이나 주명(主命)을 복종할 수밖에 없사오니…"라고 말했다.

 

정 신부의 원주 부임은 1896년에 설정된 원주본당이 28년에 걸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제들 관할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한국인 사제가 사목을 담당하게 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정 신부는 원주에서 10년 동안 사목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배론성지 보존. 배론은 황사영(알렉시오)이 백서를 쓰고 숨어 있던 곳이자 조선 땅에 최초로 신학교가 세워져 운영됐던 곳이었다. 게다가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도 배론에 모셔져 있었다. 정 신부는 1929년 풍수원주임 정규하 신부와 용소막주임 이철연 신부와 함께 배론을 답사하고 그에 관한 기록을 「경향잡지」에 남겼을 뿐 아니라 배론 일대 약 660만㎡(200만평)에 이르는 부지를 교회 부지로 귀속시켜, 오늘날 배론성지의 토대를 놓았다.

 

동료 사제 및 신학생과 함께 한 정규량 신부(연대는 알 수 없음. 출처 '용인본당 50년사')

 

 

이 부지는 배론 지역 신자들의 공동소유였으나 정 신부는 교우들이 합심해 잘 관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칫하면 군이나 면 소유지로 바뀔 수도 있다고 보고 두 신부와 협의해 천주교재단(당시 경성교구) 소유로 등기 이전한 것이다. 이 역시 순교자 후예인 정 신부의 각별한 순교신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 신부는 매일같이 순교선조들의 행적을 읽고 묵상했다고 한다.

 

교육사업 또한 정 신부의 큰 관심사였다. 압고지(삼성강습소)와 금사리(계명여자학술강습회)에 이어 원주에서도 정 신부는 1931년 4년제 강습소인 소화학원을 설립, 운영했다. 그뿐 아니라 1934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본당에 초청하면서 소화유치원까지 설립했다. 수녀들이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본 소화유치원에는 원아가 200명이나 됐고, 소화학원 역시 150명 정원을 넘었다. 소화학원은 1937년 일제 탄압으로 결국 폐쇄됐으나 소화유치원은 지금까지 계속 운영되고 있다.

 

이밖에 정 신부는 교리교육에도 신경을 써 사순시기에는 교리 문제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배부해 공부하게 한 후 성지주일에 시험을 보고 부활 축일에는 공소교우들까지 전신자가 모인 가운데 시상하기도 했다. 또 청년 교육을 위해 1937년 성탄절을 기해 가톨릭청년회를 설립했는데 강원도 최초 가톨릭청년회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여서 청년들의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공세리에 김대건 신부 기념비 세워

 

정 신부는 1938년 6월 21일 원주본당에서 은경축을 맞지만 그해 여름 성골롬반외방선교회가 경성교구(서울대교구)로부터 강원도 지역을 위임받으면서 다시 충남 아산 공세리본당으로 전임된다. 강원도 지역은 이듬해 춘천교구 설정과 함께 춘천교구에 편입됐다.

 

순교선조들 자취가 서린 순교성지(또는 사적지)를 발굴 보존하며, 나아가 순교정신을 함양하려는 정 신부 노력은 공세리에서도 이어졌다.

 

1939년은 기해박해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한국교회는 1925년 로마에서 열린 시복식을 통해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를 복자로 모시고 있었다.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그해 가을 공세리본당 청년회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는 성극 '고양'을 13차례나 공연했는데 관람객이 2000명이 넘었을 정도로 호응이 컸다고 한다.

 

- 대전교구 공세리성당으로 이장된 박의서, 원서, 익서 삼형제 묘. 정규량 신부는 이들 삼형제 순교자가 해암리 맹고개에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했다.

 

 

정 신부는 본당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병인박해 때 수원으로 끌려가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인주면 걸매리에 살던 박의서(사바), 박원서(마르코), 박익서(세례명 미상) 삼형제가 인주면 해암리 맹렬(속칭 맹고개)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사에 착수한 정 신부는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록을 작성하고 맹고개에 묻혀진 삼형제 묘를 확인했으며, 순교자 행사를 통해 순교정신을 교우들에게 일깨워줬다. 이 삼형제 순교자 묘는 1988년 공세리성당 앞뜰로 이장됐다.

 

공세리에서 8ㆍ15 광복을 맞은 정 신부는 이듬해인 19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성당 오르는 길에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나아가 정 신부는 내포 지역을 직접 답사해서 작성한 지명을 바탕으로 달레의 「대한성교사기」(한국천주교회사)에 인용된 지명과 대조해 '대지도'(大地圖)를 제작했다. 이 지도는 후일 분실돼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1948년 5월 서울교구에서 대전교구가 갈라져 나오고 그해 7월 공세리에서 온양본당이 분가, 신설되면서 정 신부도 공세리 사목 10년을 마치고 서울 용산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된다.

 

약현본당 산하 공소로 있다가 1942년 1월 본당으로 승격한 용산본당의 초대 주임은 막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원 하드리아노 주교였다. 교구장을 지낸 주교 후임으로 부임한 정 신부는 본당 관할 구역과 교적을 정리하는 등 안정적으로 사목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곧 이어 닥친 6ㆍ25 전쟁은 이런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정 신부에게 치명적 상처를 안겨 줬다.

 

전쟁이 일어나자 정 신부는 성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성당을 떠나지 않았으며 피란가지 않고 남아 있던 신자들을 위해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하며 지냈다. 어느날 시민들이 비행기 폭격을 피해 산 위에 있는 성당 쪽으로 몰려왔다. 위험을 느낀 정 신부가 이들을 안전한 산 속으로 돌려보내고 성당 문을 닫으려는 순간 폭탄이 몇 발이 성당에 떨어졌고, 정 신부는 의식을 잃은 채 폭풍에 날아가 버렸다.

 

겨우 교우들의 손에 목숨을 구해 치료를 받은 정 신부는 교우들 집에서 피해 지내다가 9ㆍ28 수복 후 다시 신자들과 함께 사제관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서울이 재수복된 후에는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 수녀 1명의 지원을 받아 사목을 계속했다.

 

하지만 1952년 10월 7일 정 신부는 폭격 당시 받은 후유증과 지병으로 안고 있었던 심장병이 재발해 70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정 신부는 생전에 자신이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들의 은혜 특히 증조부 정은 바오로의 전구와 모친의 열심한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에 선종한 것이다. 정 신부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다.

 

[평화신문, 2009년 11월 29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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