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말 권하는 사회: 우리사회의 폭력현상과 언어문화에 대해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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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231

말 권하는 사회 - 우리 사회의 폭력 현상과 언어 문화에 대해 생각하며

 

 

최근 한국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사건들은 사건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또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건의 사회적 의미'는 사람들의 의식 저편으로 잠수해 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현상, 체벌 시행의 문제와 이에 연관된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교사 폭행 사건은 한국에서의 그 유난한 '교육열' 덕분으로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인기 이슈'이기도 하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휴대 전화를 사용하던 여대생과 그를 나무라던 노교수 사이의 상호 폭행 사건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울 지하철 노동 조합의 4월 파업 사태는 노조원들의 업무 복귀로, 한 고비를 넘긴 듯해 보이고 지하철의 정상 운행은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운 듯하다. 그러나 식사 때가 조금 지났다고 밥상을 뒤엎고 투정하는 아이처럼, 파업 기간 중 매표소 등 공공 시설물을 부수고 지하철 관계자에 폭행을 가했던 일부 시민들의 범법 행동은 ― 언론에서도 대충 넘어갔지만 ― 시민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경제와 고용이라는 당면 과제를 넘어서 사회 문화 전반에 스며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하게도 시민 의식의 뒷전에 있다. 이번 파업은 끝났다. 투정을 부리던 시민들은 배고파 미칠 지경(?)인 때에 밥 한 술 먹은 것이다. 그들에겐 '왜 밥을 제때에 먹을 수 없었나?'라고 물을 필요는 이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휴대 전화 사건'과 '노조 파업시 시민들의 행동'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더 큰 폭으로 재현될 수 있는 사건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오늘날의 다차원적 문화와 복합적 사회가 배태하는 본질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건들이 수반하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폭력적일 수 있는 사회'에서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현대 문화와 현대인의 과제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두 사건을 들여다보며

 

1) '휴대 전화 사건'은 평범한 시민들뿐 아니라 시사 평론가나 이른바 문화 평론가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으리 만치, 그 상황의 사회성을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매우 미묘한 것이었다. 사건 후 언론 매체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입장들은, 대중 교통 수단 안에서 먼저 큰소리로 통화를 하던 여대생이 원인 제공자이므로 그에게 사건의 책임이 있다는 입장과, 버스 안이 조금 시끄럽더라도 인내심을 가졌으면 되었을 것을, 야단을 치다가 분을 못 참고 먼저 여대생을 때렸으니 교수에게 잘못이 있다는 입장으로 대별되었다. 이에 덧붙여 그렇다고 아버지뻘 되는 교수를 발차기로 가격한 여대생의 행동이 더 나쁘다는 입장도 있었다. 다시 말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논쟁과 반드시 '한 사람의 죄인'을 가려내고자 하는 시도가 주를 이루었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별과 도식적인 책임론에 앞서서, 필자는 '훈계(訓戒)의 권리'와 '사회 속의 사회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좀더 건설적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먼저 훈계의 권리가,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양의 전통적 도덕관에 따라 어른(정신적 귀감과 도덕적 권위의 소지자로서)은 젊은이들의 비도덕적 행위를 꾸짖을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공공 장소가 아무 때, 아무에게나 어른이 즉각적으로 훈계의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더구나 상대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성인일 경우, 공중 도덕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대등한 인격체라는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예절을 갖추어 항의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불편을 입은 사람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와 장소와 의사 전달의 방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순히 '나이 든 어른이 젊은이를 야단도 못 친단 말이냐'라는 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훈계의 권리는 그 권리를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서로 인정한 사회적 공간에서 '당연한 것처럼'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은 굉장히 많다. 예를 들면, 가정, 친족간의 모임, 친목 단체, 학교, 일부 직장 등, 도덕적 권위의 기준으로서 장유유서의 질서를 무리 없이 서로 인정하는 일정한 사회적 모임들이 그러한 공간이다. 그러한 곳에서 훈계는 훌륭한 사회적 역할과 효과 있는 사회적 기능을 한다. 그러나 '무작위적인 사회 공간'에서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에 대해 공중 생활에서의 불편 때문에 훈계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사회적 충돌을 자초하는 것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 동양적 도덕관이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사건의 주인공인 노교수가, 야단을 친다는 생각에 앞서, 정중하게 동년배를 대하듯이 여대생에게 낮은 목소리로 통화해 줄 것을 부탁했어야 한다. 서로 전혀 모르는 타인들의 무작위적인 만남의 공간에서 공중 도덕을 위반하는 상대에 대해 해야 할 행동은 훈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불편이 있어도 무조건 인내심을 갖고 참는 것도 아니다. 예의 있게 항의하며 합리적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곧 상대에게 '비판적 요청'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그 여대생은,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위는 어떤 개인의 훈계보다 더 따끔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심했어야 한다. 따라서, 그 사건에서 두 주인공이 ― 언론과 세태 평론에서 너무 안이하고 상투적으로 논쟁의 초점을 맞추었지만 ― '딸같이 어린' 여대생과 '아버지뻘 되는' 교수라는 요소는 핵심적이지 않다. 조금 차갑게 들릴지 모르지만, 두 명의 시민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는 맥락에서 우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둘째로 '사회 속의 사회 구성'이라는 문제는 오늘날의 정보 통신 수단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문명 이기의 사용이 사회화 과정에 미치는 영향은 계속 있어 왔다. 뉴미디어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인터넷 같은 미디어는 새로운 성격의 주체 구성과 사회적 공간을 형성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이론가들도 이동 통신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론적 관심이 없지만, 그것에는 사실 더 중요한 면이 있다. 사건의 여대생은 휴대 전화로 통화를 하는 순간 자기 나름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는 통화 상대자와의 사회 관계만이 염두에 있었지 자신의 실체가 있는 버스라는 사회적 공간과 버스 안 승객들과의 사회 관계는 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버스 안의 다른 승객들과 고립되어 있음과 동시에 자신의 통화자와 '통화 순간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보 미디어와 통신 미디어의 합성 사용이 늘어나면 공공 장소에서 사용자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그 장소의 다른 시민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사건은 자주 일어날 수 있다. 다양한 사회 관계의 중첩(重疊) 현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이것은 미디어 사용자인 시민들의 더욱 성숙된 시민 의식과, 공중 예절의 기술적 매너를 요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신경을 더욱 써야' 하는 사회 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 장소에서 시민 각자가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사태도 빈번해질 수 있다. 그럴수록 무작위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회 공간에서는 합리적 사고와 신중한 연설이 필요해진다. 사건이 전혀 안 일어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현명하게 무리 없이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2) 서울 지하철 노조 파업시 일부 시민들의 행위는 노(勞)-사(使)-정(政)의 쟁점에 가려서 부각되지 않았고, 언론의 비판적 화살도 비켜 갔다. 노조 파업과 같이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표출될 경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민들의 합리적이고 성숙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노-사-정 모두가 시민을 볼모로 하고 시민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감정을 이용하고 그들에게서 호감을 얻기 위해 아부해야 하는 노-사-정 스스로 시민을 비판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언론과 학계가 그렇지 못했던 것은 그 사회적 임무를 유기(遺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하철 노조 파업시 시민들이 보여 준 다양한 폭력 행위들은 심각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것은 보통이고, 전철표 환불을 위해 매표소로 몰려간 사람들이 곧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역무원에게 달려들었으며, 매표구 유리창을 박살냈다. 기관사를 구타하려 해 놀란 기관사가 도망간 사건까지 있었고, 일부 승객은 선로를 점거한 채 새벽까지 농성을 했다고 한다. 서울 지하철 공사 소속이 아니라서 파업과 관계가 없는 국철 구간의 역사(驛舍)에서도 역무원들이 구타와 폭행을 면하고 시설물 파괴 행위를 막기 위해, 몰려 온 승객들에게 울며 겨자 먹기로 표를 환불해 주어야 했다(적지 않은 그 금액은 재정상 어떤 항목으로 처리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국민의 세금은 나간다.). 더 나아가, 등산용 빨간 조끼를 입고 전철을 기다리던 애꿎은 시민 한 사람이 노조원으로 오인되어 다른 시민에게 구타를 당했던 사건은 '시민의 권리'를 위해 분노한 시민들의 '시민 정신 상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문의 사설이나, 경제 노동 전문가들의 칼럼은 '시민과의 전쟁을 선포한 파업', '시민을 볼모로 한 파업' 등의 표현으로 시민을 옹호하고 시민의 침해된 권리를 위해 대갈일성(大喝一聲)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시민들의 범법 행위에 대해서 따끔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폭력 행위를 보도하는 기사들도 사실 보도에 제한했으며, '이해할 만하다'는 식의 위로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어떤 기자는 시민들의 폭행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IMF 사태 여파로 고통받고 피곤한 세상에서 지하철마저 서 버린 상황은 "인내의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고 시민들의 행동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무엇을 하든 허용된다는 말인가? 이보다 좀더 큰 사회적 고통이 온다면, 이 나라는 갖가지 폭력 사태로 쑥대밭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우리의 상황은 장기간 계속된 전국적 기근과 기아, 아니면 내란의 상태가 아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J. Ortega y Gasset)가 20세기 초 당시 군중의 우매하고 폭력적인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은 20세기 말 우리 사회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하다. 그는 "옛날에 기근이 닥쳤을 때, 빵을 얻기 위해서 군중들이 흔히 하는 행동은 빵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결국은 빵집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당시 군중들의 비합리적 폭력성을 우려했다. '서울 시민'(사람들이 쉽게 지나치지만 이 말은 대한 민국에서는 특별한 엘리트적 의미를 갖는다)은 표 값을 환불받기 위해 매표소로 달려가 창구를 박살냈다. 우리의 시민 의식과 행동 방식은 21세기를 문턱에 앞둔 지금, 20세기 초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

 

한 신문 논설은 서울시와 정부의 강경한 입장으로 무조건 파업 철회 결정이 나자, 불법 파업을 비판하며 이번 사태는 "노동자도 국민들도 법을 어기면 손해라는 교훈과 메시지를 던져 준 것이다." 하고 논평했다. 옳은 말이다. 법을 어겼다면 누구든 비판받고 처벌받아야 한다는 말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준법과 불법의 기준으로 이번 파업 사태를 총체적으로 논한다면, 공공 교통 수단 이용의 불편으로 '분노한 시민'들의 범법 행위는 묵과(?過)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옹호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민주주의를 민중 선동주의나 민중에게 아부하는 실리주의 정도로 인식하기 쉬운 세상에서는, 시민을 옹호하는 것보다 시민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지 모른다. 시민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반성의 길이다. 우리 모두 누구든 시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 위험 사회의 요소

 

전혀 별개의 사건 같지만, '휴대 전화 사건'과 '파업 기간 중 일부 시민들의 과격한 행동'은 모두 너무 쉽게 물리적 폭력을 행위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두 사건 모두 폭력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할 수 있는 주장들이 그 정당성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는 유사성이 있다. 물론 물리적 힘의 우열에 따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던 시기도 있었다. 원시 시대에는 이성적 토론보다는 야성적 완력(腕力)이 문제 해결과 의사 결정을 위한 지배적인 방법이었을 수도 있고, 이러한 것의 잔재로 금세기 초까지 문명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실재했던 문제 해결 수단으로서 결투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에 맞는 해결 방법은 아니다. 누군가 그 시절의 간단하고 낭만적인(?) 해결 방법의 상황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모두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지금까지 이루어 왔던 대부분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성과를 무위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간은 야성(野性)에 대한 향수를 갖더라도 사회적 공동 생활의 영역에서는 그 낭만적 자연의 세계에서처럼 행동하며 살아갈 수가 없다.

 

연설이나 사고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사회, 특히 물리적 폭력을 쉽게 사용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사회는 '위험 사회'다. '휴대 전화 사건'에서 여대생은 처음 교수의 꾸지람에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큰소리로 맞받아 쳤다는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으로 나가는 것도 물론 폭력적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폭력적인 것은 물리적 힘을 사용한 것이다(꾸중하던 교수가 손으로 먼저 때렸고, 태권도 선수이기도 한 여대생은 발차기로 응수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직접적 상해를 입힐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치사(致死)의 사태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불행한 사건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그러한 가능성은 항상 잠재해 있다). 물리적 폭력을 쉽게 행사하는 것은 현대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폭력은 설사 그 행위의 이유가 타당할지라도 한마디로 항상 끔찍한 것이다. 간디(M. K. Gandhi)가 폭력을 거부한 것도 바로 폭력이 생명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폭력을 몸소 실행한다는 것은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를 위한 구체적이고 매우 실리적인 태도였던 것이다. 만일 물리적 힘을 사회 생활에서 일상적 인간사 해결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완력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모든 결정권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사람의 몸, 곧 생명에 대한 존중심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노조 파업시 시민들의 폭력 행위도 단순한 시설물 파괴나 구타에 의한 상해를 넘어서 더욱 심각하고 불행한 사태로 번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군중 심리에 휩싸인 시민들은 대도시의 모든 기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곧 '자연적'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어서, 조그마한 불편에도 예민해지고 과격해질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기능들의 부분적 파손으로도 전체적인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문명 발달에 따른 복지 상태는 사회 구성원들의 엄청난 노력과 주의, 세심한 배려와 인내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문명과 사회는 인간 노력의 결과이고, 노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옳지 못한 것, 불공정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들이 많다. 이러한 것들 없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폭력으로 해결하려 할 때에 문제는 생긴다. 그것은 올바른 대안과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순간적이고 단순한 반응일 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위험 사회의 요소이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는 언론이 있을 때에 그 위험의 수위는 높아진다. 니체(F. Nietzsche)가 말했듯이 괴물들과 싸워야 할 때는 누구든 그 싸움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 '말 권하는 사회'를 위하여

 

인간의 역사가 총체적 관점에서 보아, 발전의 과정인지 아니면 퇴보의 과정인지는 아직도 충분히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인간의 몸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줄여가도록 노력해 오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류에게 해(害)가 아니라 고통을 덜어 주는 득(得)의 과정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비폭력적인 사회를 향한 역정(歷程)에서 인류는 실패도 많이 했고, 수없는 시행 착오를 겪었으며, 그러한 노력이 폭력적 행위에 의해 배신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권 신장의 역사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 언어 문화이다.

 

언어 문화는 기본적으로 이성적 판단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칸트(I. Kant)도 이러한 문화는 폭 넓고 보편적인 소통(疏通)의 즐거움을 주고 세련미와 사회적 교양을 키워줌으로써 ―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최상의 조건에 이르게까지는 못할지라도 ― 적어도 감각적, 물리적 힘의 폭정(Tyrannei)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칸트가 '합리적일 수 있는 동물'(animal rationabile)인 인간에게 거는 기대이다. 칸트 자신도 경계했듯이 합리성의 세계도 물론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스페인 화가 고야(F. Goya y Lucientes)가 '이성의 꿈은 괴물들을 만들어 낸다'(El sueno de la razotusg produce monstruos)라고 타이틀을 붙인 그림에는 말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든 남자(이성적 인간을 상징)의 꿈속에 나타나는 온갖 괴물들이 그려져 있다. 고야의 그림이 상징하듯 이성은 그 나름의 어두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명민한 이성과 합리적 판단을 담은 언어의 소통으로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적어도 타인의 몸에 폭력을 가해 직접적 상해를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언어 문화의 구체적 현상은 서로 말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을 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라는 조건이다. 사람들은 격한 감정의 개입에 의한 물리적 폭력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흔히 '말로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냥 말로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대방에게 '말을 권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내 입장만 말로 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말로 하다 보면 자칫 자기 말만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은 기본이고, 나의 말이 나의 의사 표시만을 위한 것을 넘어서 상대방의 의사 표시를 북돋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곧 '말을 권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로'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길이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고전적 개념도 '함께 하기'(being in company), '같이 나눔'(sharing in common) 등의 뜻을 함의한 커뮤니온(communion)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서로라는 상호성을 본질로 하고, 일방적임을 배제하는 개념이었다. 바로 이 점에 '말을 권하는 태도'의 감성적 요인이 있는 것이다. 나의 의사를 조리 있게 표현하는 것은 이성적 판단의 작업이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고, 말을 하도록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느낌을 포착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말을 권하는 태도는 이성의 냉철함을 감성의 수용성으로 보완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만원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거의 밀치고 타고, 밀치고 내린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실 겁니까?" 하고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내립시다."라는 말을 더 자주 듣는다. 후자의 경우는 자기 말만 한 것이고 말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답을 유도하는, 일종의 말을 권하는 작은 실례이다. 이동 전화기 사건의 경우 교수와 여대생 사이에서 오고간 말이 순전히 고성의 훈계(어른이 야단을 칠 때, 유난히 목청을 높이는 것은 그 의사 표시가 일방적임을 상대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다. 언급했듯이 물론 그것이 필요한 때와 장소, 상대가 따로 있다)와 일방적 자기 정당화의 주장이었다면 그것은 서로 말을 권하는 대화가 아니고 이미 말싸움이었을 것이다. 지하철 매표구에서 환불을 요구하는 시민의 큰 목소리는 해당 직원의 해명을 말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대답을 미리 차단하고 내 입장만 전달하는 것이다. 그랬으니까 파업과 무관한 국철의 매표소 역무원이 입장 해명도 못하고 '불법' 환불을 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폭력적 태도는 곳곳에서 불법적 결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쓸데없이 목소리 큰 자가 내는 것은 목소리일 뿐이다. 그것은 말이 아니다. 따라서 대화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화가 없으면 서로를 위하는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새로운 미디어의 확산과 다양한 문화 장르의 수용이 일상화되어 가면서 개인적 활동을 자극하는 오늘날 같은 '개인화' 시대에서는 서로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구체적 가능성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말을 권하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될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문화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맞는 방식의 인간 관계 맺기와 사회화 과정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말 권하는 사회'의 시민이라는 인식과 그에 따른 구체적 실행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곧 이성적 판단, 감성적 포착, 사교적 언어 표현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 문화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21세기에 다방면에서 언어 문화가 주된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은 막연한 예측이 아니다.

 

[사목, 1999년 6월호, 김용석(전 그레고리안 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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