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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현대의 문화 사조와 교회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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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247

현대의 문화 사조와 교회의 사명

 

 

1. 종교, 예술, 문화

 

역사적으로 모든 종교는 예술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문학 작품인 경전, 건축으로서의 성전, 극적 구조를 가진 전례 양식, 소리와 화성을 통해 신과 교감하는 음악적 장치, 제반 조각과 회화로 표현되는 신앙 고백, 그리고 춤으로서 몸짓 등을 생각하면, 종교는 모든 예술의 총체적 현현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위대한 예술 작품은 대부분 종교적 경지를 보여 준다. 인간 조건의 한계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 상대적 존재의 절대를 향한 갈망, 유한함을 포용함으로써 무한으로 넘어서는 역설 등, 비록 그 작가가 특정 종교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을 수록 그는 '익명의 신앙인'인 것이다. 

 

"주방의 요리 기구도 문화의 산물이란 점에서는 베토벤의 소나타와 다를 바 없다."고 한 클럭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늘에 이르러 예술의 개념이 그 독립적 영역을 벗어나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문화는 세상의 변화에 처하여 예언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그러한 세상을 놓치지 않고 따라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문화는 이제 인류의 현대적 생활 방식을 총칭하는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즈음에, 현대의 종교, 특히 가톨릭이 독존(獨存)하지 않고 동시대를 향하여 어떻게 '문화적 발언'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필자는 한국 교회의 상황을 의식하면서 이 글을 쓴다. 

 

 

2.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하나의 예술 사조 또는 문화 사조는 인류의 역사적 체험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인 사상의 자장(磁場)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사상사적 흐름 안에서 석학들은 질주하는 시대의 가속도를 거대 문화적 배경 안에서 성찰해 내고 있다. 현대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생활 방식이고 거기에는 역사적 계기성과 필연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모방 이론에 근거해서 삶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의 리얼리즘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이상향을 향하여 부단하게 질주하는 역사적 전망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적 사고에서 싹터 나오기 시작한 이러한 의식은, 이른바 기독교 전통 안에서 '최후의 심판'을 통하여 도래할 새로운 시대가 세속의 과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그 바탕에 있었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허구성이, 그리고 과학적 합리주의의 오류가, 더 나아가 불완전한 우주의 실상이 실증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리얼리즘적 세계관은 벽에 부딪히면서 모더니즘의 싹이 돋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의 예술적 이상처럼 삶의 실재가 인간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상상력으로써 창조되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는 이미 '깨져버린 세상'(the broken-world)이라는 세계관을 전제한다. 이는 현대 물리학의 획기적 발견이었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등에 영향받은 바 크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 어그러진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욕망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모더니즘적 상상력은 끊임없이 부서진 세계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세계의 형상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린다. 텍스트는 은밀하게 세계에 대한 지시 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인간이 만든 빛은 동시에 더 큰 어둠을 양산하게 되는데, 전쟁, 핵, 빈곤, 환경, 민족 갈등 등 인간 이성의 역기능적 부작용이 그 순기능을 압도함으로써, 유토피아적 사유의 가능성은 완전히 차단된다. 인간 이성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서 모더니즘의 은밀한 욕망은 퇴화하게 되고, 점차 모더니즘의 그 상대적 성격과 다원성, 그리고 비결정성의 특질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경향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것이 20세기 후반의 문화 전반을 특징지우며 새로운 세기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3. 시대 정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을 계승하지만 동시에 권위를 탈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과 선을 긋는다. 삶의 실재에 대한 재현보다는 텍스트 행위 자체의 내적 탐색을 더 즐김으로써 리얼리즘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완전히 차단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포스트모던한 사고에서 세계는 깨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어졌다는 사실이 이미 완전한 형태의 세계 기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필연에 따른 결정론보다는 우연성이 언제나 삶을 지배하여 삶은 항상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심은 언제나 원심력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고, 획일화보다는 다원적인 것이 우월하기 때문에 개성이 강조된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던한 세계관에서는 전통, 기원, 중심, 권위, 창조, 필연, 결정론, 의미 등이 무화되어 버리고, 삶은 우연에 의해, 유희적으로, 어느 순간도 예상된 것 없이 한 순간 한 순간을 보내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영위해 가는 것이다. 

 

이 방종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시대 정신인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적 특성과 강하게 결합해 나간다. 그리고 이는 가치관의 혼돈, 개인주의의 극대화, 소비 지상주의와 생명 경시 풍조 등을 만연시킨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도 삶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식자들 사이에 던져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나 정치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소비적 향락주의를 확산시킴으로써 공동체를 저해시킨다는 점은 특히나 심각하다. 

 

그러나 위에서 살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사의 역사적 흐름 안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던 사조이다. 이는 인류 역사에 대한 정직한 반응에 기초하고 있고,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이런 경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역으로 이 역사적 산물 안에서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고 새롭게 선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즈음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그 주변부적 성격과 다원적 특성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하나의 대안보다는 다양한 접근 방식을 존중하는 특성은 인류 역사상 세계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 방식이다. 그 결과 이는 오히려 더욱 자유롭고 개성적인 인간 활동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적으로 이는 소위 전통적으로 중심을 이루던 획일화된 문화 예술 장르들을 해체시키기 시작함으로써 예술과 문화 사이의 경계선을 없애고, 엘리트주의 고급 문화와 대중들의 저급 문화의 벽을 허무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심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4. 한국적 포스트모던 상황

 

우리 나라의 현대사 안에서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필연성 안에서 배양되어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서구 사조를 학문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학습적으로 터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4월 혁명의 좌절 이후 올바른 현실 인식에 기초한 사회적 자아가 싹트기 시작한 이래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적 사고는 우리의 정치 현실과 민족 현실 앞에서 단순히 외래 사조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그 순기능을 가다듬어 가기 시작했다. 독재와 분단이라는 한국의 현실에서, 거센 리얼리즘의 흐름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역사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가 물길을 잡기 시작했고, 순간 순간의 좌절과 자기 모순 앞에서 토해 내는 모더니즘적인 고백이 또 다른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1970년대의 유신을 겪으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학문과 예술의 순수 영역을 고집하며 귀족적 모더니즘을 견지하려던 일부의 흐름을 제외하고는, 사회의 모든 분야로 확산되어 갔다. 때때로 상호 반박하는 만남 안에서도 이들은 1980년대 초까지는 거시적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4.19의 1980년대적 발현인 6월 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두 사건은 일단 성공한 혁명이면서 선거로 촉발된 전국적 사건이며, 민중과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결합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외견상 동질적이지만, 또 다른 억압에 의해 좌절된 혁명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이질적이다. 

 

양대 사건의 이질성은 억압의 주체가 다르다는 데 있다. 4.19는 외부의 힘에 의해 좌절되지만, 6월 항쟁은 내부 모순 때문에 함몰된다. 그래서 전자는 그 순수성을 지키며 계속 부활을 꿈꿀 수 있었지만, 후자는 그 후 진과 위, 선과 악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는 혼돈의 상황 안에서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내부 모순의 주체들의 농단으로 역사는 방향을 잃어 버린다. 

 

6월 정신의 함몰은 우리 민족이 30여 년 동안 민족적 권위를 부여하고 따랐던 정치적 실체의 배신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 후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는 민족 구성원을 정치적 무기력의 상태에 빠지게 했고, 전통과 권위, 역사적 필연, 정의니 민족이니 하는 유토피아적 명제들은 시들어 갔다. 이를 책임져야 할 주체들은 오히려 이 혼돈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역사의 전면부에 계속 눌러 앉았다. 이와 연계된 많은 사회 운동 단체들은 계급적 세계관을 외피로 삼아 이해 집단의 정치 세력화에 골몰하면서 역사의 정도에서 확실하게 스스로 비켜섰다.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와해되었고, 그 텅빈 자리에 무질서와 방종의 논리를 통한 '이유 있는 반항'이 모든 문화에 만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그 자체의 혼돈을 즐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이렇듯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은 정치적 소수에 의해 야기되었고, 올림픽을 계기로 외래사조의 외피를 그럴듯하게 접목 받게 된다. 그리고 분수에 넘치는 자본주의의 소비적 향락성과 적절히 결합하는데, 이것이 현재 소돔의 성 안에서 카오스 축제를 벌이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더 나아가 내부 모순의 주체들이 1990년대를 장악하고 교대로 10년 동안 정치적 축제를 벌이는 상황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채로 현대사의 치욕적인 기억이 의식의 진공 상태 안에서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우리의 문화적 상황은 이러한 모순의 연장선상에서 순기능적으로 또는 역기능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5. 현대의 대중 문화와 복음적 사명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 상황이 유사 포스트모던(pseudo-post-modern)이건, 내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건, 중요한 것은 이제 교회가 이 문화적 상황의 실상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중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인의 삶 전반을 지배하는 대중 문화의 가치관은 분명 복음적 관점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그 문화적 양식(樣式)에 대해서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 주지되어야 한다. 본래 종교의 자기 표현이 그랬듯이,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신앙은 전례적으로 고백되는 것만큼이나 문화적으로 발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겠다. 

 

1) 21세기의 보편 현실 - '모든 것 안에서'

 

교회는 먼저 교회적 문화 양식과 세속적 문화 양식 사이의 구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교회가 생기기 이전부터 하느님의 섭리가 세상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인간에게 직접 전해졌다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하다. 성과 속 사이의 지나친 구별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편견을, 편견은 독선으로 이어지고, 독선은 언제나 악과 뿌리가 맞닿기 쉽다는 것이 저간의 교회적 성찰의 결과이다. 

 

21세기의 보편 현실은 다양한 것들의 공존에 있다. 따라서 상대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공존 논리의 핵심이다. 이것이 차이를 극복하고 다양성 속의 일치로 이끄는 지혜이다. 우리는 다양한 대중 문화의 양상 안에서 드물기는 하지만 먼저 익명의 복음 선포 행위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접목되고 향유되는지도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안목이 길러지면 우리는 대중 문화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어질 것이다. 

 

교회적 방식으로 세상을 복음화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정복론에 근거한다. 세상의 방식 안에서 복음을 발견하겠다면 이는 존재론이다. 오늘날 토착화(inculturation)의 개념은 착근이 아니라 발견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을 다 미사에 불러모을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나 삶의 장 안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 대화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직접 쓰이지 않아도 모든 것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볼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차원의 선교이고 교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양식이 언제나 집안 잔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만 알아듣는 언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폭력이다. 

 

21세기의 보편 현실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는 어떻게 동시대적 문화 상황 안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이 올바로 이해된다면 교회 자체의 문화 양식과 존재 양식도 스스로 변화시켜 가고자 할 것이다. 토착화는 이렇게 선교 방법론이 아니라 교회론 자체의 문제이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세상 속의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다. 세속의 존재 양식과 문화 양식을 백안시하면 할수록 21세기의 교회는 고립될 것이다, '모든 것 안에서'. 

 

2) 21세기의 민족 현실 - '한반도 안에서' 

 

앞에서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외피는 정치적 내부 모순에서 주로 기인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세기말의 우리 문화 상황도 여기에 연유하여 후기 자본주의적 특성을 일찌감치 모방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문화적 상황에는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사이의 표리가 있다. 명제적으로는 대개 고고한 윤리적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이면에서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회적으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현대사를 통하여 받은 상처에서 오염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적 과오인 1987년의 상황은 200여 년의 서구 역사의 좌절 체험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우리가 멀지 않은 그 기억의 잔상을 끄집어내어 다시 올곧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민족적 권위의 실체를 다시 세워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화적 상황의 혼돈의 고삐를 제대로 틀어쥐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민족 현실 앞에서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비본질적인 소모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H. 마르쿠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욕구가 억압될 때 이들은 사회 제도와 관습에 맞서서 이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 실현을 위하여 '탈승화'를 꾀하게 되고, 인위적 욕구로 '거짓 욕망'에 사로잡혀 사치와 지배욕이 유발된다고 한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우리의 문화 상황은 마르쿠제의 비판과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점이 있다. 6월 정신 파탄의 내부 요인은 민족적 상처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욕구를 포기하게 만들었으며, 올림픽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광풍에 노출되며 사치와 지배욕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인위적 욕구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무한 욕망의 종착점에서 우리는 IMF 체제에 있는 민족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본의 논리로 급격히 세뇌된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 간다는 것은 내적 동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 버린 이 시대의 질주를 스스로 제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IMF보다 더 본질적인, 무언가 외부의 강제적 요인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대 자본주의의 논리가 복음의 정신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교회는 체험적으로 선언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 사이에서 오랫동안 줄타기를 해 왔지만, 이것이 가져다 준 교회적 혼돈 또한 심각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 민족은 외적 동인과 교회적 선언의 계기를 언젠가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분단을 청산하면서 맞게 될 통일의 순간이다. 이는 한꺼번에 모든 구조악과 혼돈을 정돈할 급진적인 그러나 하늘이 준 기회임이 분명하다. 이해 집단들의 조정으로써가 아니라, 거시적으로 남북 체제의 공동체적 장점을 선택적으로 결합시킬 때, 통일은 단순히 재결합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제전이 될 것이다. 적어도 교회는 이런 차원에서 통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 체제의 참회의 예식에서부터 새로운 삶의 양식은 가다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전망을 가지고 통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교회는 치밀하게 앞장서야 한다. 통일 이후의 교세 확장이나 주도권을 의식한 차원에서의 통일 준비는 모두에게 불행한 21세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3) 21세기 교회 현실 - '새로운 교회'

 

설사 오늘날의 우리 상황이 유사 포스트모던하다고 하더라도, 문화분석의 틀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기능까지 배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즈음에 21세기의 화두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변부성과 다원성에 주목하는 것은 시의 적절하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 역사는 인류가 이룩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빛과 어둠이 함께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분의 말씀과 행적에 의지해서 선하고 정의로운 의지를 사랑으로 가다듬어 가고자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하고 장엄하다. 

 

이 아름다운 성사인 교회가 현대에 들어오면서 벽에 부딪힌 것은 교회가 급격한 사회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건 사회의 계급적 질서 의식이 붕괴되고 사회적 신분 질서가 수평적으로 재편되면서, 봉건제하의 질서에 기초한 교계 제도와 사회 제도가 상호 조화롭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한국 교회에 위기라고 불릴 만한 징후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유교적 신분 질서의 분위기가 아직도 강하기 때문에 교계 제도의 권위가 크게 위협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21세기에도 그럴까. 

 

교계 제도는 모든 권한과 더불어서 모든 책임도 함께 한다. 신자들은 사제 중심의 한국 교회에서 대개 자신의 교회적 삶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사제들의 삶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앙 행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사제들 스스로 이를 조장하는 측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곧 성당이고, 문을 나서면 세상의 논리가 그들의 십계명이 된다. 자신들이 신앙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은 대개 현재 한국 교회의 논리 안에서 고사당하기 십상이다. 

 

중심에 서서, 권위 있게, 기원에 대한 확신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교회의 전통 안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은 모든 신자에게 다 허용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사고의 유연성은 교회에서 이렇게 발휘될 수 있다. 교회는 주변부에서 서성대는 신자들에게 이 고유한, 그러나 보편적인 이 권한을 지체없이 나누어야 한다. 가르침을 통해서, 전례를 통해서, 제도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스스로 나누고,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이를 깨닫고 지녀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변부에 대한 강조는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의 교계 제도를 해치지 않고도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다. 이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세상 모든 곳에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도 통한다. 신앙의 다원적 접근은 인간의 모든 삶의 양태가 다 성소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제 중심의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사제들은 빨리 '중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의 중심은 본당이나 제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세상 속에 뛰어들어 중심이 흩어지도록 해야 한다. 로만 칼라의 프리미엄을 던지고 세상과 수평적으로 만나 가는 방식을 사제들도 찾아야 한다. 세상 안에서 성사를 집행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 안에서 복음을 발견하고 격려하는 사도직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문화적 차원에서의 특수 사목은 논지의 핵심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새로운 교회는 세속에서 발생할 것이다. 생활 속의 다양한 교회의 움직임이 주변부에서 다양한 중심들을 만들면서 연대해 나갈 것이다. 싫든 좋든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교회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것이다.' 

 

 

맺음말

 

현대 문화와 사상을 주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아직 유동적이고 복잡한 정의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현대 세계를 혼돈에 빠뜨리는 주범으로서 혐의를 받기조차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날 거부할 수 없는 문화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을 깊이 숙고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실제 현실이기 때문이고, 이 지배적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복음의 방법론은 다시 모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뼈아픈 성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세상에 절대의 영역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적 세계관에 복음을 접목해서 절대의 영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설적 사명을 21세기의 목전에서 다짐해야 할 것이다.

 

[사목, 1999년 6월호, 김광엽(전 서강대학교 대우 교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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