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본 한국교회의 사목 방향: 집단주의 문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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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83

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본 한국교회의 사목 방향 - 집단주의 문화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하고 일렀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마태 21,28-31)

 

우리는 이미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은 물론 맏아들이다. 이렇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의중까지 우리는 안다. 곧 둘째 아들로 비유되는 대사제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보다 맏아들로 비유되는 세리나 창녀들이 하느님의 뜻을 더욱 옳게 따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맏아들이 상징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된다. 

 

그런데 성서적 문맥이나 합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당연한 이 대답은 우리의 생활이 실제로 벌어지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할 때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 삶의 현장을 한번 상상해 보자. 만일 아버지나 학교 선생님, 직장 상사가 우리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을 지시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둘째 아들처럼 “예.” 하고 일단 대답하는 것이 아직까지 우리 문화에서 당연한 것이지, 맏아들같이 “싫습니다.” 하고 자기의 속내를 바로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건 무례하고 미숙한 짓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그 일을 실제로 나중에 하고 안 하고는 이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서양에서 벌어졌다면 당연히 둘째 아들은 거짓말쟁이요 믿지 못할 무책임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문화적 맥락이란 이처럼 중요하다. 문화라는 말은 그 정의를 두고도 엄청나게 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여기서 우리는 문화를 넓은 의미로, 대략 ‘어떤 인간 공동체의 집단적 정신 프로그램’ 또는 온라인 시대의 용어를 써서 ‘한 인간 집단의 정신적 소프트웨어’ 정도로 정의해 두자.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일정한 형태의 생각이나 느낌, 잠재적 행동을 내장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대개 어릴 때 습득된 것으로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평생 동안 지속되기 마련이다. 

 

이런 정신적 프로그램 또는 정신적 소프트웨어는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난 사회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형성된다. 먼저 가족을 시작으로, 학교, 서클, 직장, 지역사회 등을 통해 이 프로그램은 형성된다. 따라서 사람의 이 정신적 프로그램 또는 소프트웨어는 집단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문화적 차이 곧 집단적 정신 프로그램의 차이에 대해 주목하면서 한국교회에 시급히 요청되는 사목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서 살펴보게 될 문화에 대한 분석은 단지 한국교회의 사목 방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만큼의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2. 집단주의 문화 대 개인주의 문화1)

 

문화를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로 양분해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빛을 던져준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순수한 집단주의도, 백 퍼센트 개인주의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집단주의 문화가 더 강하거나 아니면 개인주의 문화가 더 강할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가 전반적으로 집단주의 문화의 경향 또는 개인주의 문화 경향을 띤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학문적 분석에도 반드시 동반되는 법이다. 

 

집단주의 문화 안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보다도 집단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며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집단의 힘이 항상 개인의 힘을 압도한다. 집단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된 원천이다. 예컨대, 우리 한국 신부들은 자기를 정식으로 소개할 때 “천주교 OO교구 OOO 신부”라고 한다. 나의 정체성에서 내가 소속된 집단이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자기를 소개하는 순서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먼저 소속된 제일 큰 집단에서부터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 이름 석 자 역시 자기가 속한 가문을 나타내는 성이 먼저 오고 자기에게 고유한 이름이 온다. 

 

이러한 자기 소개를 개인주의 문화권에 사는 서양 신부에게 하라고 했다면 필경 그 순서는 거꾸로 될 것이다. 먼저 자기 이름을 말하고 소속 교구가 따를 것이다. 물론 이름 자체도 항상 자기의 고유한 이름(first name)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성(family name)이 따른다. 아무튼 집단주의 문화에서와 달리 개인주의 문화 안에서는 개인이 집단을 우선한다. 집단의 힘이 개인을 압도한다는 것은 전쟁과 같은 비상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다.

 

이 두 문화 안에서 한 개인의 삶을 간단하게 그려보자. 

 

먼저 가정을 보면, 집단주의 문화 안에서 가족은 대가족으로 구성된다. 비록 물리적으로 대가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대가족 제도의 영향 아래 있다. 여기서 태어난 한 아이는 낮이건 밤이건 혼자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이는 여러 사람과 접촉하며 그들에게 배우면서 자란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자신의 사회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것은 가족 밖의 다른 영역에까지 적용된다. 이런 문화에서는 남에게 정면으로 대드는 것은 무례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아이가 어떤 의견을 말할 때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개인적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의견 자체가 집단에 의해 미리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개인주의 문화 안에서 가족은 핵가족이다. 아이는 갓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 잠을 잔다. 자라면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는 시간보다 자기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 문화 안에서는 자기 생각을 표명하는 것이 미덕이다. 자기가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진지하고 정직한 사람의 특성으로 통한다. 대드는 것도 괜찮다. 의견충돌로 한 차원 높은 진실에 도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자기의 고유한 의견을 갖도록 장려된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 심어진 개인과 집단의 관계는 학교에서 한층 더 강화된다. 집단주의 문화권의 학생들은 수업 중에 전체 앞에서 말하기를 극히 꺼린다. 은연중에 집단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수업은 대체로 교사 중심의 일방통행적 주입식 교육이다. 반대로 개인주의 문화권의 학생들은 자기 의견을 수업 중에 스스럼없이 말한다. 수업은 학생과 교사 간의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진다. 

 

교육의 목적 또한 서로 차이가 난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교육을 통해 올바른 집단 구성원이 되는 데 필요한 기술이나 품성을 가르친다. 따라서 전통의 산물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교육은 주로 젊은이만 받아야 하는 일회적 과정으로 여겨진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학생에게, 사회 안에서 어떻게 자기 개인의 위치를 찾으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이것은 학생이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육은 끝이 없다. 

 

학업을 마치고 얻게 되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의 역할도 서로 다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당사자의 성취감과 자존심을 고취시키며, 그의 경제적 가치를 상승시킨다. 하지만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그 개인뿐 아니라 자기가 소속된 집단에까지 명예를 안겨주며, 나아가서 상류집단과 교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준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돈을 들여서라도 얻으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하여 성인이 된 사람들의 결혼 과정, 그리고 직장과 사회 안에서의 일상적인 삶 역시 집단주의 문화권이냐 개인주의 문화권이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성인 남녀가 결합하는 결혼의 의미와 풍습도 두 문화권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결혼은 사랑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개인적인 결합이다. 가족과 친지는 결코 이 결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결혼이란 결코 두 남녀의 개인적인 결합만이 아니다. 결혼이란 일차적인 내집단(內集團 또는 우리 집단)인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며 따라서 가문을 대표하는 가족과 친지의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실질적인 결혼 절차가 항상 양가 부모의 상견례로 시작되며 가족 친지를 위한 혼수 문제가 결혼의 주요 사안이 되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또한 요즘 관심과 비판의 초점이 되고 있는 한국 상류층의 정계, 재계, 관계, 언론계를 두루 포섭해 형성되는 이른바 “혼맥(婚脈)”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생각해 보라. 

 

직장에서도 고용에서 승진을 거쳐 퇴직에 이르는 전 과정, 근무성적 평가의 기준, 작업 목표와 그 목표 달성의 방법, 인센티브 제공이나 보너스 지급 방법, 잘못에 대한 견책과 처벌에 이르기까지 직장의 모든 일에서 두 범주의 문화는 판이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밖의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도 사고방식, 의사소통의 방식, 행위 규범, 삶의 목표 등이 두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뚜렷한 차이를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을 살펴보자.

 

 

3. 한국 집단주의의 특징

 

한국 문화가 개인주의가 아닌 집단주의 문화에 훨씬 가깝다는 것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다. 집단주의에도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한국의 집단주의는 특별히 가족을 모든 집단의 원형으로 하는 가족형 집단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이 가족형 집단주의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집단 구성원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관계주의적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집단주의는 “가족형 관계 중심 집단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집단주의 문화에서건 집단의 원초적 단위는 가족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가족은 단순한 혈연집단 이상의 일종의 유기체적 단위라고 할 수 있다. 곧 한국 사회에서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가족이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자신에 의해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가족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것은 오직 내가 속해있는 가족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자기를 어떤 외적인 존재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로 여기며 자기 스스로 자아실현을 도모하려 하기보다는 여러 관계에 의존해 이 관계들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성취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요, 내가 속해있는 나라도 ‘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나라’며, 심지어 나와만 잠자리를 같이하는 아내도 ‘나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 아내’라고 표현하는 언어 습관 역시 결국 나를 가족 집단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하는 이 가족형 관계 집단주의의 발로인 것이다.

 

이러한 가족형 관계 중심의 집단주의라는 한국 문화의 특성은 윤리생활과 사회생활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에서 모든 집단의 원형은 가족이며, 모든 집단 구성원 간의 관계의 모형은 가족 간의 관계이다. 한국 가족 안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와 형제(兄弟) 관계이며, 이 두 관계를 지배하는 윤리가 바로 효(孝)와 제(悌)이다. 이러한 가족 관계는 범위를 확장하여 학교, 직장, 지역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버지, 선배는 형, 후배는 동생과 같으며, 직장에서 사장은 아버지, 상사는 형, 부하는 동생과 같다. 

 

어떤 모임이든 그 모임 구성원 상호 관계의 모형은 바로 가족 안에서의 이 두 관계, 곧 부자 관계와 형제 관계가 된다. 이 관계를 지배하는 윤리는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존경과 충성,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배려와 돌봄이다. 이러한 윤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금수만도 못한 자로 낙인이 찍힌다. 한국의 사회적 관계를 여전히 지배하는 효(孝)와 제(悌)의 윤리는 개인의 인격적 윤리생활의 기초인 양심과 갈등을 일으키며, 개인적 양심이 사회적 윤리 가치에 억압을 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와 관련해 문화 인류학자들은 보통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수치감이,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죄책감이 사람들의 주된 윤리적 감각이라고 이야기한다. 수치감은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가 알았을 때 느끼는 감각으로 본질적으로 사회적 감각이다. 따라서 수치감을 느끼고 안 느끼고는 잘못 그 자체보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아느냐 모르냐에 달려있다. 반면에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는 내면의 양심에서 나오는 느낌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느끼는 윤리적 감각이다. 

 

수치심의 문화에서 발달한 또 하나의 윤리적 감각이 체면이다. 체면 또한 사회적인 감각으로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거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체면이란 누군가가 하는 언행이 그가 점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개인주의 문화에서 이에 상응하는 개념을 굳이 들라면 자존심 정도가 될 것이다. 수치심과 체면의 문화에서는 대부분의 집단들, 특히 가족은 그 구성원들에게만 유보된 비밀을 간직한다. 그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한 가족이 핏줄을 중요시하는 가족주의 가치관에 따라 사내아이를 입양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서는 아이의 입양 사실이 해당 가족에게만, 그것도 가족 중 몇몇 사람에게만 유보되는 비밀이 된다. 물론 당사자인 아이에게도 가능한 한 이 사실을 숨긴다. 집단주의 문화가 중요시하는 사회적 가치에 한 개인에 관한 진실이라는 더 기본적인 가치가 압도당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사항이 있다. 곧 관계 중심의 집단주의 문화 속에 사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속한 어떤 집단의 목표보다 그 집단의 구성원들과의 관계 유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족과 같은 원초적인 집단에서는 문화를 막론하고 그 집단 구성원, 곧 가족 간의 좋은 관계 유지가 대단히 중요한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원초적 집단이 아닌 일반적인 집단은 그 집단의 성격에 따라 성취해야 할 나름대로 고유한 목표가 항상 있게 마련이며, 집단 구성원은 이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런데 한국 문화의 특징은 사람들이 사회생활 안에서조차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목표보다도 오히려 집단 안에서 연결되는 인간관계를 더욱 중요시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집단 안에도 보통 특별한 관계망을 형성하는 소집단들이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며, 더구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목표나 규범이 이 특별한 관계망과 대치되는 경우 전자보다 후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흔히 한국의 조직사회 안에서 공식적인 기구와 의사소통 양식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이보다는 사적인 인맥이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 채널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 곳곳에 뿌리 깊이 만연해 있는 혈연 · 지연 · 학연 중심의 연고주의, 정실주의, 밀실주의 등의 병폐도 바로 우리 문화가 지닌 이 관계 중심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4. 한국형 집단주의와 복음의 만남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4-39).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국 초대교회의 순교 역사 안에서 따로 해석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말씀대로 오롯이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집단주의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국교회의 초대 역사를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한국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00년이 훨씬 더 지났고 그간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격동의 시대를 겪어왔다. 하지만 이 변화의 와중에서도 한국인이 공통으로 지녀온 집단적 정신 프로그램, 다시 말해 가족형 집단주의의 경향은 아직 한국의 주된 문화적 요소로 건재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복음과 우리 문화의 만남과 여기에 따른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물론 오늘날 이 양자의 만남에 피를 흘리는 순교는 따르지 않지만,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그 괴리는 여전히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복음과 우리 문화와의 이러한 만남은 계속되어야 하며 그 괴리도 점점 더 좁혀져 가야만 한다. 이를 위한 노력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집단주의 문화를 비판적인 눈으로 살펴왔다.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이 집단주의 문화에 대해 좀 더 명시적으로 평가해 보자.

 

신앙의 눈으로 집단주의 문화, 특히 한국형 집단주의 문화를 바라볼 때, 제일 우선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그것이 갖는 인간관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집단주의가 갖는 관계주의적 특성은 한 인간에게 그 고유한 존재론적 지위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업적으로 구원되었다고 봄으로써 지극히 명료하게 인간의 고귀한 존재론적 지위를 보장해 준다. 인간을 제외한 어떤 피조물에게도 이러한 지위가 주어지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권리와 의무까지 주어진다. 그리고 이 인간은 자신을 창조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절대자 하느님께 자신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진다. 하느님과 한 인간의 이 유일무이한 관계는 인간의 모든 관계를 지탱해 주는 근거이며 또한 그 관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된다.

 

반면, 한국형 집단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되는 성리학(性理學)은 하느님과 같은 초자연적 실체를 명백히 인정하지 않고 자연 자체에 만물을 움직이는 원리가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태극(太極), 이(理), 기(氣), 음양오행(陰陽五行)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에 내재해 있는 원리가 일종의 논리적 선후 과정을 거쳐 천지만물로 분화한다는 것이 성리학의 우주론적 형이상학인 셈이다. 여기서 천지만물이란 인간과 사물은 물론이요,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나아가서 역사현상, 정신현상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전체로서 이들은 기(氣)로 인해 각각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만물은 그 생명의 특성인 성(性)을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으며, 자연도 인간도 이 천지만물의 한 부분으로서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갖는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이라고 하여 특별히 자연과 구별되는 형이상학적 지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질서는 가족 관계를 그 원형으로 삼는 인간 상호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질서는 절대적이고 항구한 자연질서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질서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선험적 정당성이 부여된다. 이렇게 절대적인 자연질서를 등에 업은 절대적 사회질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를 확인하는 존재가 바로 유교적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따를 때 인간은 결코 자신에 의해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란 자연의 질서인 이(理)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본분인 성(性)을 바탕으로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외부 세계와의 합일을 통해서 자아를 발견하고 성취해 나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결국 개인을 갖가지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 독립되지 못하게 하는 미분화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의 차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한국 문화와의 만남이 그 시초부터 바로 인간의 문제, 특히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엄격한 봉건적 신분 위계질서를 기본으로 하던 전통사회를 향해 그 질서를 뿌리째 흔드는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던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인간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자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 존재는 평등하다는 가르침, 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천지개벽적 폭발력에 대한 당시 사회 지배계층의 우려와 분노가 잔인하고 혹독한 박해로 드러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봉건시대와 일제 암흑기를 거쳐 불과 얼마 전까지의 정치적 권위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이 존엄성에 따른 인권을 찾고자 한국교회가 벌인 갖가지 활동들은 눈부신 것이었다.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금 한국교회는 이제 더욱 보편적인 인간 존중의 문화, 특별히 여성, 어린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노약자, 장애인, 재소자, 부랑자의 인권을 옹호해야 할 소명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5. 요청되는 사목 방향

 

인간의 구원을 위한 봉사인 교회의 사목적 배려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바로 사목적 배려의 대상이 되는 양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처지, 그리고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지금까지 살펴본 문화적 맥락이 포함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사목 방향에서 두드러지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소공동체 운동과 가정 중심의 사목인 듯하다. 본당의 대형화와 거기에 따른 신자들의 익명화 현상, 그리고 가정의 붕괴와 이와 연관된 갖가지 생명경시 풍조(낙태, 자살, 안락사, 인신 매매, 장기 매매), 성 윤리, 혼인 윤리와 사회 윤리 전반의 와해,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집단 이기주의 현상 등을 염두에 둘 때 한국교회가 겨냥하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과 가정 중심의 사목 방향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당을 생활여건에 따른 지역(또는 직능) 단위의 소공동체로 나누고, 이들 소공동체 안에서 적극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더욱 온전히 실현하고자 하는 취지의 이 운동은 세속화 · 대중화 · 익명화의 이 시대를 겨냥한 적절한 사목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소공동체 운동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전체의 기본 세포인 가정을, 현재 처해진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가정 중심의 사목 역시 시기 적절하고 당연한 사목적 대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소공동체 운동과 가정 중심의 사목이 참으로 그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데 먼저 실행해야 하거나 적어도 함께 병행해야 할 사목적 배려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문화적 맥락에 대한 분석에서 이미 시사되었듯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참된 개인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사목적 노력이 그것이다.

 

한 인간 존재의 참된 정체성의 원천은 그가 자신을 창조하고 구원해 주신 하느님과 갖는 관계에 있다. 이 관계는 다른 어느 누구도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독자적이고 유일무이한 관계이다. 이 관계를 원천으로 나는 나 자신과 관계를 맺고, 또 나 아닌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맺는다. 또한 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참된 존엄성은 물론이요 여기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모든 권리와 의무가 흘러나온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인간의 모든 윤리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흔히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 내면의 지성소는 바로 하느님과 한 개인의 이러한 관계를 반영하는 실질적인 표지이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윤리생활이란 눈치나 체면 또는 수치심과 같이 인격성이 결여된 사회적 감각에 의해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생활이 아니라, 올바른 양심을 바탕으로 자유와 책임이라는 진정한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인격적인 생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참된 윤리생활이 인간에게 지혜와 절제, 용기와 정의, 사랑과 연대성 등의 더욱 보편적인 덕목을 추구하게 한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이 같은 견해를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사람이 비록 하느님과의 이 관계를 의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그는 이미 이 관계 안에 있으며 이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살아간다고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양심을 수호하고 자유와 책임이라는 가치와 보편적인 덕목을 추구하는 참된 인격성에 대한 마르지 않는 갈망이 담겨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에 대한 이 보편적인 진리가 참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보편적인 진리가 되게 해야 할 사명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인의 여정에서 가장 초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진리를 실제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직 어렵고 낯설게 느껴진다. 바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문화적 유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실제로 있을 때 ‘참된 나’가 된다. 그 밖의 사회적 관계는 이 근본적인 존재론적 관계 이후에 온다. 여기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소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결여될 때, 한국의 소공동체는 참된 공동선을 구현하는 작은 교회가 아니라, 한국사회를 온통 채우고 있는 수많은 소집단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의 소집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병폐로 일컬어지는 고질적인 당파성에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하느님과의 독자적인 관계를 갖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이라는 사실이 망각될 때, 한국의 가정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사랑과 배려를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가족 이기주의라는 장벽으로 둘러싸이고 내적으로는 나를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하는 심리적 미분화의 자기소외 때문에 드러나지 않게 고통받는 어두운 감옥에 머물 수 있다.

 

집단주의 경향이라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범주에 주목하면서 한국교회의 사목적 방향을 진단해 본 지금까지의 고찰은 이에 따른 시급한 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목 방향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 다시 말해 가족형 집단주의를 문화적 유산으로 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과연 어떻게 개인의 참된 정체성 확립이라는 사목적 과제를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하겠는가 말이다. 유감스럽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의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연구로 주어질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더욱 깊고 광범위한 연구와 토론이 교회 안팎을 망라하여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먼저 한국 문화를 다각적인 관점에서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분석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해야 하며, 이러한 분석과 판단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사목적 프로그램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집단주의라는 범주는 문화에 대한 이해 접근을 위한 수많은 범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라는 범주 못지않게 권위주의 대 평등주의, 남성적 문화 대 여성적 문화, 배타적 문화 대 개방적 문화 등의 범주도 대단히 중요한 분석 도구이다. 따라서 집단주의라는 범주를 이용하여 얻은 문화적 실재는 문화라는 전체의 한 부분을 드러낼 뿐이며, 더욱 온전한 문화의 이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범주를 통한 연구 분석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6. 나오는 말

 

흔히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일컬어진다. 이 말의 저변에는 오늘날의 다원주의 시대에 걸맞은 문화 상대주의의 이념이 깊이 깔려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정의했듯이, 문화를 간단하게, 한 인간 공동체의 집단적 정신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문화란 한 인간 공동체가 수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역사를 통해 형성해 온 삶에 대한 통찰과 가치 체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에 대해서 그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같은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든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윤리적 의무이다.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 입각하여 다른 문화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무지요 야만의 소치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화가 과연 인간을 참으로 진리와 자유, 궁극적인 자기실현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방해하는지를 살펴보고 판단하는 일 또한 모든 사람에게 맡겨진 중요한 의무이다. 더구나 모든 인간을 위해 진리를 위탁받았고 이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소명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인간 구원을 위한 사목적 배려의 책임을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부여받은 사목자에게, 인간의 삶 전체를 두루 감싸면서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식별은 사목활동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된다.

 

문화는 변한다. 비록 문화의 변화 속도를 감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느릴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십 년 동안 한국에서는 높은 경제성장의 열매로 특히 이 집단주의적 문화 경향이 눈에 띄게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듯하다. 

 

경제적 성장은 한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에서부터 사회생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개인에 대한 존중의 비율을 꾸준히 높여왔다. 때로는 지나친 개인주의를 우려해야 할 경우도 쉽사리 발견된다. 이 변화의 흐름 안에서 우리는 인간을 진리로부터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요소를 지닌 우리 한국 문화를 진정한 문화, 곧 인간을 진리와 참된 자기실현으로 이끌어주는 문화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희망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조들이 살았던 순교자적 정신과 삶을 이 시대에 새로이 구현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1) 이 두 문화에 대한 분석은 Geert Hofstede(Culture and Organization: Software of the Min, London, McGraw Hills, 1991년)에 힘입은 바 크다.

 

[사목, 2004년 5월호, 이상택(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아시아 담당 서기관, 대구대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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