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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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하느님께로 이끄는 성사: 사제와 성사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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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3-12 ㅣ No.504

[사제의 해] 하느님께로 이끄는 성사 - 사제와 성사집전

 

 

사제는 성사집전을 통해 성덕으로 나아간다. 성사집전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충실치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성사는 나를 하느님께로 한 걸음씩 좀 더 나아가게 만들어준다.

 

 

“오소서, 성령님!”

 

1994년 부제품을 받고, 여름방학에 한 본당으로 파견을 나갔다. 본당신부님은 “부제는 말씀 식탁의 봉사자이니 모든 미사의 강론을 하라.”고 하셨다. 마음속으로 ‘그렇지, 이런 삶이 하느님의 일꾼의 모습이지!’ 하면서 기쁘게 강론을 준비해서는 미사 때마다 열심히 강론을 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요한 복음(14,6-7)을 가지고 강론을 준비하는데 도무지 강론 주제가 잡히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강론집을 읽어보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없고, 성경 주해서를 읽어도 모르겠고, 미사 시간은 다가오고, 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강론집 내용을 대충 짜맞추어 마무리 짓고는 제의방으로 뛰어가니 미사 5분 전이었다. 제의를 입고 기다리시는 본당신부님께 강론 원고를 드리고는 부제복을 입었다. 그러자 강론을 읽어본 본당신부님은 “이거 너무 어려운 내용 아닌가? 우리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며 걱정하셨다. 그렇게 미사는 시작되고, 참회예절, 대영광송, 제1, 2독서를 하는 동안 본당신부님의 말씀만 내 귀에 맴돌 뿐 다른 말씀들은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복음을 읽고는 강론을 시작하면서 걱정이 되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신자 여러분, 오늘 제가 강론을 준비해 본당신부님께 보여드렸더니, 내용이 어렵다고 합니다. 제가 강론을 잘 할 수 있도록, 제가 잘 못해도 여러분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알아들은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십사 성령께 도움을 청합시다. 먼저 눈을 감고 ‘오소서, 성령님!’ 하고 마음속으로 세 번 불러봅시다.”

 

그리고 ‘오소서, 성령님!’ 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는 강론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어릴 때 우리 동네에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날마다 주전자를 들고 동네가게로 가서는 막걸리를 사갔지. 그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런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아버지도 사랑 자체이시지. 아들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지.’

 

그래서 곧바로 이 말씀을 해드렸더니 신자들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해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후에 공소미사 강론 때도 성령께 도움을 청하고, 막걸리를 사러 다닌 친구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공소신자들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공소미사를 끝내고 본당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본당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본당 신자들도, 공소신자들도 굉장히 똑똑한가봐. 서 부제의 그 어려운 강론을 다 알아듣고!” 이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께서 이렇게 나를 이끌어주시는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주일미사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는 꼭 성령께 도움을 청하고 강론을 시작한다. 어떨 때는 강론을 하고 뒤돌아서면 뒤통수가 따갑고 미안할 때가 있다. 강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때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 도움을 청하고 준비된 강론을 외워서 하되, 마음을 항상 성령께 열어놓을 때, 성령께서 이끄심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미사의 말씀의 식탁은 언제나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체험하는 자리이다.

 

 

일주일 먼저 살다보면

 

이렇게 강론은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일주일간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살도록 도와준다. 월요일 새벽미사가 끝나면 다음 주일 복음을 읽는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외운다. 대림 제3주일 복음을 읽으면서는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루카 3,10)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를 되도록 하루 종일 외우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최근까지는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한 단어나 구절만 찾아 외우고, 마음에 새기면서 묵상을 했다. 그런데 몇달 전 베네딕도회 수사신부님에게 수도승들의 ‘렉시오 디비나(성독)’하는 방법을 듣고 나서는 다음과 같이 한다.

 

먼저 주일 복음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다. 손으로 성경을 들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를 내고, 귀로 성경 말씀을 들으며, 머리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눈을 감고 복음을 떠올려본다. 첫 번째 눈을 감았을 때는 거의 생각나는 구절이 없다. 그러면 다시 눈을 뜨고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다. 온 몸으로 성경을 읽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성경 말씀을 떠올려본다. 이렇게 열 번 정도를 반복해서 읽으면,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주요 단어를 찾아내고, 거의 외울 정도가 된다. 그래도 잘 외워지지 않으면 감동을 받아야 외울 수 있다는 어느 주교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그 말씀들에서 감동을 받도록, 내 마음을 흔들도록 기도하며 읽는다.

 

그리고 일주일간 반복해서 묵상을 한다. 그러면 특별히 마음을 움직이는 성경구절이 생기거나, 성경과 연결된 작은 체험이 생긴다. 이를 바탕으로 강론의 가닥을 잡고, 다른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기타 자료를 참고해 살을 붙인다. 대림 제3주일에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제2독서의 말씀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답으로 들렸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4-6).

 

또 화요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복음인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는 말씀이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도와주었다. ‘주님 안에서’의 의미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와 연결되어 늘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고,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하느님 품 안에 있는 나를 떠올리며, 모든 걱정을 떨쳐버리고 지금 이 순간 기쁘게 충실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성체성사를 준비하고, 강론을 준비하는 시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시간이다. 그래서 일상의 삶이 성체성사와 연결이 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에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될 때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읽게 되는 경문들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요즘은 성찬전례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감동으로 전해진다. 몇 년 전 40일 피정을 할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네가 울부짖으며 나를 찾을 때마다 만나주던 나다. 내가 너를 위하여 있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 말씀에 감사의 정이 올라오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한 분시고, 제가 부르짖을 때마다 이렇게 만나주시니 감사하고, 또 임마누엘 하느님으로서 저와 항상 함께해 주시니 더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이 기도는 부제품을 앞두고, ‘내가 정말 부제품을 받아도 될까? 이렇게 부족하고 죄 많고 약한 내가 하느님의 일꾼이어도 되는가? 교회가 나를 받아줄까? 끝까지 잘해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면서 하느님을 찾을 때 얻은 답이었다. 그때 너무나 불안하고 힘이 들어 매일 아침 다른 신학생들보다 30분 먼저 일어나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말씀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코 복음 6장 50절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뒤 제자들을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군중을 돌려보내신다. 그리고 기도를 하신 뒤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뭔가 시커먼 물체가 나타나자 유령으로 생각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꿈꾸던 사제가 되고자 지금까지 왔으면서도, 부제품 앞에서 더 이상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겁에 질려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두려움이 밀려오고 힘이 빠질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주님이 ‘야훼 하느님’과 연결되면서 ‘나는 너를 위하여 있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위해 계시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하면서 용기를 내게 되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멎고 배가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닿았다. ‘그렇구나! 내 안에, 내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평화를 얻게 되고, 어느 순간 목적지에 가있겠구나!’ 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찾았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말씀을 기도하면서 성체와 성혈을 들어올릴 때마다, 이 두 번의 체험과 말씀이 하나 되어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니 나도 이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것을 기도한다. 이렇게 성사는 나를 날마다 조금씩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어준다.

 

[경향잡지, 2010년 1월호, 서철 바오로(청주교구 모충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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