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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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보통 사제의 작은 고백입니다: 사제와 기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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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511

[사제의 해] 보통 사제의 작은 고백입니다 - 사제와 기도생활

 

 

내가 너를 알아본 것은 아마도 철이 든다고 하는 그 시절부터인 지 모르겠다. 네가 “나도 신부가 될 거야.” 들떠 말하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결국 신학교를 갔다. 그런 네가 언젠가부터“아, 나도 참 먼 길을 왔구나!” 웃음 머금고 되뇌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네가 소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1956년쯤이요, 사제가 된 것이 1973년이었지. 그런 네가 ‘그동안 뭘 했나?’ 상념에 빠지며 ‘마이 웨이’인가 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요즘은 자주 보겠더라.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볼 곳 없네.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볼 곳 없네….”

 

 

“좀 더 잘할 걸!”

 

사람이 무엇을 해놓으려고 세상에 왔겠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자비로운 그만큼의 너를 이루어놓은 것이 그동안 해놓은 것 아니겠는가. 잘한 것이 왜 없겠으며 보람된 일이 왜 없었겠는가. 네게는 얼굴도 이름도 잊혀져가는 이들한테서 “신부님, 그때 신부님 아니셨으면, 지금쯤 제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 때마다 너는 마음이 뿌듯했고 너 자신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도 네 이름이 교우들 사이에서 좋게 회자된다는 말을 꽤 들었다. 욕먹을 짓만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지난날을 생각하면 ‘좀 더 잘할 걸!’ 후회만 남는다.”는 네 말에는 공감한다. “그때 기도를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너는 아쉬워했다. 지금이라도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 봅니다”

 

너는 사제이다. 신자들을 보살피고 천상의 신비로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어야 한다. 언젠가 성무일도의 독서기도를 바칠 때였다. “양들의 허물은 거의 보편적입니다. 튼실하고 살진 양들 곧 진리의 양식으로 튼튼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의 풀을 잘 먹는 양들은 드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강론을 읽으면서 너는 “맞다!” 했지. 무슨 큰 진리라도 깨달은 양. 나도 참 소중한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좀 더 일찍이 이 말씀을 깨달았더라면 그 많은 실수들을 하지 않았을 텐데…. 손해를 많이 봤다면서도 너는 기뻐했다. 손해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깨달음 때문에 기뻤겠지. 그도 그럴 것이 너는 자주 신자들의 부족한 점을 마땅치 않게 여기곤 했다. 마치 신자들은 온전해야 함이 마땅한 것처럼, 결점이 보이면 보살필 양으로 보기 전에 튼실한 양이 못된다고 불평했던 너였다. 언젠가 어느 주교님이 우리들 모임에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겠지.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를 봅니다.”

 

그 뒤로 너는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신자들의 허물을 탓하는 버릇이 줄어드는 듯하더라. “진작 기도를 더 잘 했더라면 신자들을 더 잘 모셨을 터인데.” 하며 아쉬워하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실 진리의 양식으로 튼튼해지고 하느님 은총의 풀을 잘 먹는 양들은 드물다는 이 보편적인 사실만이라도 잘 이해한다면, 너의 사제생활도 더 넉넉했을 것이다. 세상의 지도자들처럼 힘으로 내리누르려는 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는 너의 얼굴이 평화를 머금고 있구나.

 

 

“그 부분은 내 말이 아니다”

 

네가 해야 할 소임 중에 강론만큼 중압감을 갖게 하는 부분도 없었을지 모른다. 강론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압감을 느낄 만큼 중차대한 소임이기 때문이다. 네가 강론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다행스러운 점이 많았다. 아마 그것은 네가 칭찬듣기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론이 참 좋았습니다.” 하는 칭찬을. 너는 마음이 소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너는 칭찬을 들을 만한 강론을 스스로 준비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다행히 알고 있었다. 강론 준비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열심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비추심이 아쉬워서. 주님의 영감을 청하며, 받아 적을 테니 빨리 말씀해 달라고 매번 주님께 매달리곤 했지.

 

강론 준비가 끝나면 너는 감실을 찾아갔다. “주님, 제대로 받아 적었는지 들어보십시오. 들어보시고 당신의 뜻이 아닌 것은 지적해 주십시오.” 하며 소리 내어 읽은 일은 잘한 일이다. 읽어 내려가다 보면, 평상시의 너의 사심이 반영된 부분에서는“그 부분은 내 말이 아니라, 네가 속 풀이 하려는 것 아니냐?” 하시며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지적하셨고, 너는 그 부분을 수정하였다. 좀 격하다 싶은 말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꼬집고 싶어 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너는 “또 들켰구나!” 하며 지웠다. 잘한 일이다.

 

강론이 없었다면 네가 그나마 기도생활을 계속했을지 알 수 없다. 강론은 먼저 너를 키워주었다. 너도 네가 한 강론 말씀을 양식으로 한 주간을 살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는 “주님, 저를 통해 제게 말씀하심이 경이롭고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지. 앞으로도 강론만은 주님께 여쭙고, 준비가 되면 꼭 주님께 먼저 결재를 받아서 교우들에게 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분노에 느리시고 자비에 빠르신 주님께서 너와 교우들을 지켜주실 것이다.

 

 

“내가 왜 여기 와있지?”

 

강론 준비에 비하면, 젊은 날의 너의 일상의 기도생활은 많이 부족하여 책망을 들어 마땅할 것이다. 처음에 너는 활동으로 기도를 삼으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이 교회 일인데 구태여 정해진 기도를 꼬박꼬박 바칠 것 없다는 생각이었지. 이 점에서 너는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야 할 것이다. 정말 네가 사목적인 일로 바빴더냐? ‘귀찮아서 하기 싫다, 귀찮아도 해야 하는데…. 신부가 기도하는 것을 귀찮아하면 어쩌겠단 거야.’ 하며 너는 자주 갈등을 하였다. 게으름 때문에 기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느냐.

 

시간에 대해서도 좀 더 솔직하자. 네가 정말 바빴더냐? 너도 네가 놀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지. 사람을 만나러 갈 땐 “예수님, 함께하여 주십시오.”라거나, 무슨 일을 하면서 “이렇게 해도 될까요?” 하며 주님을 습관처럼 찾았다. 그러나 절실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너의 기도는 주님의 뜻을 찾는다기보다 주님께서 너의 청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너의 기도 내용은 하느님께는 별로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들으려 하셨겠는가!

 

잘못된 열정은 네 한계를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런 나날들이 오래 지난 어느 날 너는 “내가 왜 여기 와있지?” 하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탕자처럼! 너는 걸레처럼 살았다고도 했다. 네가 하느님 앞에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도 안다. 네가 악의가 있어 그랬던 것이 아님을. 오히려 나름대로는 선의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너는 이상하다, 잘하려고 하면 왜 더 안 되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렇다. 매일 성무를 집전하고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 사제가 헛길을 간다 해서 얼마나 벗어나겠느냐? 그 차이는 보일 듯 말 듯 아주 미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잠심하여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는 자신을 제대로 살필 수 없었던 것이다.

 

 

“분수도 모르고 살았구나!”

 

너는 “좌충우돌 분수도 모르고 살았구나!” 비탄 속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너는 그 비탄의 시간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느님 앞에 잠심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더구나. 네가 아는 형제가 “악은 만족이 없고 사람을 더욱 자극적인 것에로 빠져들게 하지만, 선은 작은 일도 만족을 주더라.”고 했을 때 너는 고개를 끄덕였고, “죄 짓는 것도 은총입디다.” 하고 그 형제가 말할 때 네가 넉넉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한참 뒤였다. “가장 처참했던 때 나는 가장 많이 배웠다.”던 평상시의 네 말이 떠올랐다. 그 뒤부터 너는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시편 30,12-13) 하는 말씀을 무척 고맙게 가슴에 안고 살게 됐지.

 

“후회스럽던 비탄의 순간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감싸 안은 때였다.”며 네 생애의 찬란함을 보기 시작했다. “후회하는 동안은 마음이 어둠에 갇혀있었지만, 회개하는 순간 주님께선 나를 평화로 인도하셨다.”며 너는 기뻐하였다. 너의 마음이 여유롭고 웃음이 더 많아진 것도 그 뒤부터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는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분의 업적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집회 42,22) 이 모든 변화는 비탄의 노래를 배우면서 잠심하고 다시 기도의 품안에 안기면서 찾게 된 복이다. 그러니 기도를 소홀히 했던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손해를 봤겠는가!

 

 

“하느님의 개구쟁이가 되자!”

 

내가 할 일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됐다면서 네가 내게 들려준 성경말씀이다.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마라.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시어 세상에서 칭송받게 하시기까지 너희는 그분을 쉬시게 하지 마라”(이사 62,6-7). 너는 무척 흥미롭게 이 말씀을 읽었다. 하느님을 성가시게 해드리고 잠드실라 치면 못 주무시게 방해하는 개구쟁이나 된 것처럼. 기도는 하느님 앞에 개구쟁이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좋아했다. 우리 교우들이, 우리 본당이, 우리 교회가 세상에서 칭송을 받을 때까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 것만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 기도를 그렇게 정겹게 생각해라.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놀이로 생각해라. 하느님의 개구쟁이가 되자! ‘하느님,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일 당신께서 이루소서.’

 

* 이춘우 프란치스코 - 안동교구 신부. 1973년 사제품을 받았고, 현재 다인성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이춘우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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