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2014-0504.....부활3주일 가해 |
---|
부활3주일 (가해) 사도행전 2,14. 22ㄴ-33 1베드로 1,17-21 루카 24,13-35 2014. 5. 4. 등촌3동. 주제 : 부활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세상에서 늘 기쁘고 늘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원하는 대답을 담는다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도 실제로 찾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오늘은 부활3주일입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만나는 일이면서도 정성을 갖춘 마음으로 대하기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삶을 좋고도 행복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라고 말은 하지만, 말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만들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부활의 첫 모습은 2000년쯤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보여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온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환호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일이지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나섰던 사람들과 군중심리에 휩쓸렸던 방관자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거나 아무상관이 없을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보여주신 부활은 현실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부활은 우리 삶에 기쁨을 주는 환호일까요, 아니면 두려운 일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대답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사는 우리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 쉬운 표현으로, 하느님은 당신에게 올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부활이라는 놀라운 일의 실현여부에 따라 하느님에게 봉헌될 영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기 위한 일’이었다고 우리가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반대급부를 요구할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시간도 냈고, 찬송도 함께 했으니 하느님도 내게 축복을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하느님의 축복이 내 맘에 차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겠다고 내던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허약한 존재로 만들면, 하느님이 비천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위에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주장하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끝을 알 수 없는 나락(那落,=①불교용어, 지옥. ②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 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으로 떨어져도 좋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대상으로 만들면, 오늘 복음에 나온 엠마오로 가던 두 명의 제자가 한 행동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 것이고, 그들이 가졌던 단단한 마음을 다시 부드럽게 만드신 일이라는 것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이야기’의 본질입니다. 이 과정을 잘못 해석하면, 우리는 삶에서 엉터리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엠마오로 갔던 두 명의 제자가 한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일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실제로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놀랍게 생각한다면 ‘그 밤중에 그 먼길을 되돌아오다니!! 그들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하느님보다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움직인 것보다는 그들이 한밤중에 그렇게 움직이도록 해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크게 봐야 합니다. 한밤중에 움직인 인간의 행동도 놀랍다고 하겠지만, 그 초점을 잘못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 삶에 바쁜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얼마나 굼뜨고,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들이겠습니까? 그렇지 않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어떤 소리를 들으면, 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고 미몽(迷夢,=흐릿한 꿈이란 뜻으로, 무엇에 홀린 듯 똑똑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정신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신앙교육과정과 신앙고백을 통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지만, 언제쯤 되면 그렇게 배우고 익힌 것대로 올바르게 행동하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른 기준에 따라 올바르게 움직인다면, 우리의 행동은 자신에게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가져오는 힘이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에 초대하는 초청장이 될 것입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사도가 성령을 받은 뒤, 유대인들에게서 오는 죽음의 위협은 겁내지 않고 놀라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살고 있을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고 구원을 누릴 사람들이 되는 것은, 사람의 방식을 벗어나서 하느님의 방식과 일치할 때 가능하게 되는 일입니다. 부활3주일, 성모성월을 지내는 달에,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을 우리도 함께 고백하고 그분께서 누리고 있을 행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0 66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