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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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2007년 사제 성화의 날 성직자성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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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6-16 ㅣ No.241

예수성심대축일(2007년 6월 15일)에 거행하는

사제 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성직자성이 발표한 서한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다가오는 예수성심대축일에 기념할 사제 성화의 날은 우리가 모든 신자들과 전인류를 향한 사제들의 사목적 관심과 특히 여러분이 가장 소중한 협조자로서 일하는 교구의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여러분의 사목적 관심을 함께 나누며 우리의 사제 직무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볼 좋은 기회입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제는 그리스도 사랑의 보편적 증인입니다.’라는 올해의 주제는 최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가르침, 특히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사랑의 성사」(Sacramentum Caritatis, 2007.2.22.)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여기에서 “우리가 성체성사로 거행하는 사랑은 우리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본성상 모든 이와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뵙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찬례는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교회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곧 ‘진정한 성찬의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제안서 42항).”(「사랑의 성사」, 84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하느님의 사람

 

선교하는 인간

 

하느님을 인류에게 모셔오기: 이것은 사제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사제는 이러한 사명을 수행할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제는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 백성이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선교사’를 주제로 한 제5차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주교회의(2007.5.13.)의 개막 연설에서 사제들에게 “제자직과 선교를 가장 장려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고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도록’(마르 3,14 참조)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 사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직접 알고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우정을 나누며 그리스도께서 느끼셨던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필리 2,5 참조) ‘하느님의 사람’(1티모 6,11)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사람들을 이끌고 가 하느님 사랑의 대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영문판, 2007.5.16, 18면 5항].

 

이 진리는 전에 사제직에 오르는 전례에 사용되었던 다음과 같은 사제의 시편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 당신께서 저의 제비를 쥐고 계십니다”(시편 16[15],5).

 

우리는 신명기(10장 9절 참조)에서 약속된 땅에 들어선 모든 지파가 제비를 뽑아 거룩한 땅을 나누어 가져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만 아무런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레위 지파의 상속 재산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확언에는 분명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사제는 다른 지파처럼 땅을 일구어 사는 것이 아니라 제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말 한 것은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진 표징이며 상징입니다. 사제 생활의 참다운 기초, 그 삶의 근거, 그가 생활하는 땅은 하느님 자체입니다. 교회는 이 구약적 해석에서 사도들을 따르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사제적 사명의 의미와 해석을 발견하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와 연관하여 “사제는 오늘날에도 레위 지파와 더불어 ‘주님께서는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내 땅의 몫이며 내 삶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사제 생활의 이러한 하느님 중심주의는 모든 것이 계산적이고 검증 가능한 결과에 근거한 기능 중심주의적인 우리 세상에서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참으로 알고 내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해서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최고의 봉사입니다”(‘성탄 축하 때의 교황청에 대한 연설’, 2006. 12.22., 『로세로바토레 로마노』, 2007.1.3., 6면).

 

사제 생활에서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초점을 상실하면 사제 활동 전체의 기초가 무너지고,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사목 활동의 내용과 의미를 잃어버리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과장되고 오도하는 자기중심주의가 일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본질이 헛되이 사라지고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소진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운 이들만이 주님의 권한으로 참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할”(마르 3,14 참조) 준비가 된 것입니다. 확신에 차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비밀은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 사랑에 놓여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제들에게 스승님의 학교에서 기도의 사도들이 될 것을 권유하면서 “그리스도교 교사들은 선포하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그리스도교 교양」, 4,15,32, PL 34, 100 참조)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성심대축일을 거행하면서 교회는 모든 신자가 신앙의 눈으로 “자신들이 찌른”(요한 19,37) 하느님 승리의 표징이며 무한한 자비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성심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교회는 사제들이 이러한 표징을 그리스도 성심의 부요함의 보고요 관리자인 자신 안에서 찾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쏟아 붓도록 합니다.

 

참으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여러분의 자비를 온 세상에 펼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온 세상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서 강해」, 10,5)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가 선교적인, 진정으로 ‘가톨릭’ 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6) 우리의 구원자에 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제는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적극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길인 십자가의 길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하느님에 대한 사제의 사랑의 진실성이 검증되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얼굴이 모두를 비추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우리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선한 사람임을 보여줄 때, 이 모습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우리 안에서 빛납니다”[티베르의 부제와 친구들에 관한 숙고 II, 성 요한 복음(Tractatus ad Tiberium Diaconum socioque, II, in divi Johannis Evangelium]라고 말했습니다.

 

 

2.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 사랑의 참다운 증인이 되기

 

사제가 수품식에서 받은 사명은 축성과 나란한 외적요소가 아니라 내적이고 중요한 목표입니다. “축성되는 것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Pastores Dabo Vobis), 24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안에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15항].

 

교회의 커다란 보화인 성찬례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영원한 생명의 빵의 집전자가 되어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신비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관상하고, 지속적이고 겸손되이 가능한 한 자주 실행하는 숨겨진 사랑의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성심의 열정을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 중에 가장 가난한 죄인들에게 쏟아 붓도록 끊임없이 초대됩니다.

 

선교 열정은 사제 생활의 성찬 형식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이와 연관하여 “우리가 거행하는 그 거룩한 신비에서 받는 으뜸가는 근본적 사명은 삶의 증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주신 그 선물 앞에서 경이로움을 체험한 우리는 삶에 새로운 자극을 받고 그분 사랑의 증인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우리 행동과 말과 존재 방식을 통하여 그분(Alter)께서 현존하시게 될 때에 우리는 증인이 됩니다.”(「사랑의 성사」, 85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사랑하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세상의 생명을 위한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사제 생활에서 성찬례 거행이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해방의 신비입니다.

 

모든 사제는 정의와 연대를 위해 활동하고자하는 사람들 안에서 똑같이 강한 욕구를 자신 안에서 진정으로 느낍니다. 사제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제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보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호하고 선포하는 싸움에서 주변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거행하는 신비의 힘으로, 인간 존엄에 위배되는 상황들을 고발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며 각 개인의 드높은 가치를 확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사랑의 성사」, 89항)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사목적 사랑(「요한 복음 강해」, 123, 5, CCL 36, 678)인 사랑의 직무(amoris officium)의 참다운 의미를 찾아봅시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제가 온전히 그리고 오로지 교회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라틴 교회법의 사제독신제의 신학적 동기, 그리고 이것과 하느님의 측정할 수 없는 선물, 하느님의 부성에 대한 독특한 참여, 교회의 부요 안에서 커다란 선교적 역동성, 더 큰 사랑,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언인 성품과의 연관성을 이해해봅시다.

 

자유롭고 사랑에 넘친 결단으로 받아들인 사제 독신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자기 선물,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교회에 대한 사제의 봉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Presbyterorum Ordinis), 16항; 「현대 사제의 양성」, 29항 참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사제적 증언의 상황은 무엇인가?

 

가) 무엇보다도 선교, 강론, 교리교육입니다. 이 교리교육은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젊은이와 어른들을 위한 것입니다. 교리교육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온전하고 명료한 형식으로 전해집니다. 오늘날 신앙에 관한 적절한 지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내용은『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떨어져 나간 가톨릭 신자들과 그리스도에 관해 거의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최근 브라질 주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적 책임만큼이나 그리스도교의 개인적 사회적 덕성을 함양하는 것도 교리교육의 핵심 분야입니다. ......”

 

“우리 사제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에 관한 어떤 환원적이고 잘못된 생각을 삼가면서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 신앙의 관점에서만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합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자극을 받은 어떤 해석에서도 벗어나, 복음을 손에 들고 활동하며 사도 전승의 올바른 전통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저녁미사 후 브라질 주교들에게 한 연설’, 사웅 파울로의 세 대성당, 2007.5.11. 4-5항, 『로세로바토레 로마노』, 2007.5.16., 8면).

 

이 분야에서 학과, 강연, 성경 공부 신학 공부 등 교리교육의 전통적인 방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계 문화의 다른 새로운 광장들(areophagi)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론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인쇄 매체, 라디오, 텔레비전에 더해 전자우편과 인터넷사이트, 웹사이트와 화상대화, 그 밖의 최근 방식들을 자주 활용해야 합니다. 사제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태도와 행동인 사제의 현존 자체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리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비록 찬성의 표시라고 해도 형식주의가 아닌 본질적인 것을 전하는 적절한 방법인 이러한 측면을 과소평가한 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나) 이러한 증언의 또 다른 방식은 여러 계층의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중한 봉사를 수행하는 교회 자선 기구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위에서 말한 연설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살고 있다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 것처럼 연대를 실천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며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저녁미사 후 브라질 주교들에게 한 연설’, 3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드높이 울부짖게 하는(야고 5,4 참조) 불평등을 조장하며 지구상의 부를 낭비하는 이들을 고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빈곤의 상황을 유념하도록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이는 인류가 명백하고도 진지하게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입니다.”(「사랑의 성사」, 90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생명의 문화의 지지: 사제는 주교와 친교를 이루어 모든 곳에서 생명의 문화를 북돋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생명의 문화는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빈곤에서의 해방과 생활에 필요한 재화 획득에로의 진보”와 “문화의 획득 ...... 공동 복지를 위한 협력 ......  최고의 선과 그 선의 원천이요 극치인 하느님을 인정하는 일”(교황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21항)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와 연관하여 평신도 양성에서 참다운 발전이 통합적인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재화에 대한 접근의 심각한 불균형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온전한 인간과 전체 인간의 증진을 지향해야 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 평신도 양성: 성찬례 학교에서 양성된 평신도들이 세례와 일치하고 용기를 얻어 점차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직접 짊어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모든 세례 받은 사람은 교회 안에서 그들이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을 통하여 사제이시며 예언자이시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복음, 특히 교회의 사회 교리의 기준에 따라 사회를 건설하는 데 공동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교회사 전체의 결실인 이 가르침은 실제적이면서도 치우침이 없기 때문에, 그릇된 타협이나 허황된 이상향을 피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사랑의 성사」, 91항).

 

교황님들의 가르침에서 여러 번 상기하였듯이, 평신도들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에 필요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러한 가치들의 본보기에 맞게 살아가는 힘을 구축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의한 구조를 바꾸고 정의로운 구조를 세울 특별한 책임이 있습니다(베네딕토 16세,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주교회의들의 제5차 정기 총회 개막식 축하 연설, 2007.5.13., 4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7.5.16., 18면). 

 

마) 가정 지원: 모든 사제는 다른 성소의 은사들과 맡은 사명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각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유기적인 가정 사목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리스도인 가정을 지원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47항 참조].

 

특히 남편과 아내로 하느님 사랑의 창조 활동에 동참하는 남녀 간의 평생의 결합으로서 혼인이 지닌 유일한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정치 이론과 사상의 조류가 계속 문화에 주입되어, 다양한 측면에서 혼인과 가정에 대한 진리를 무시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인간 존엄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사제는 가정이 인간의 탁월한 스승으로서 참다운 ‘인류 생태계’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합니다[요한 바오로 2세, 『백주년』(Centesimus Annus), 39항 참조].

 

 

3.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15), 12-13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2년 성목요일에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 성소는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참으로 우리는 시편 작가와 함께 되뇔 수 있습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15],12-13).”

 

이 잔은 축복의 잔(1코린 10,16), 새 계약의 잔(루카 22,20; 1코린 11,25 참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실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으로 주님께 갚겠습니까? 희생제도 번제도 아니라 …… 저의 온 생애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시편 작가는 ‘구원의 잔을 들고서’라고 말하며 이 잔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죄에 저항하는 영적 투쟁의 고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시편 강론」(Homily on Psalm), 116(115): PG XXX, 109].

 

많은 거룩한 사제들이 영웅적으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며 경험하였듯이, 우리도 마찬가지로 양보나 거짓 평화주의 없이, 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독일 주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상기시켜 주신 대로 “복음을 희석시키는 그릇된 타협 없이”(쾰른 대교구 신학교에서 한 연설, 2005.8.2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5.8.31., 3면) 진리를 증언하는 데에 필요한 힘을 성찬례에서 얻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흔히 초월적인 것에 닫혀 있고, 소비주의적 행태가 만연하며,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여러 형태의 우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우리는 성찬 신비의 놀라운 의미를 재발견합니다.

 

전례 거행이 교구에서, 특히 본당에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는 더욱 분명한 표징이 될 수 있도록 전례 거행을 쇄신합시다. 침묵과 기도와 성체를 찬미하는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우리가 참으로 살아있는 선교 정신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우리 형제들인 포르투갈 주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집의 파수꾼으로서, 모든 교회 생활이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이루어진 미사의 두 요소를 반영할 수 있도록,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여러분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13-35 참조)”(사도좌 정기 방문에서 포르투갈 주교들에게 한 연설, 6항, 1999.11.30.,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999.12.15., 10면). 

 

성찬례 안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충실하고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안전하고 평온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말씀과 성사로 이루어진 우리의 사목 활동에서, 영원한 생명의 빵을 모심으로써, 우리는 행동을 위하여 행동하는 행동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고 그분의 자리도 없는 비성직주의와 세속주의의 공격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교구의 연결 조직인 본당(교회법 제374조 1항 참조)이 지닌 선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모든 본당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본당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성찬 공동체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선교 정신으로 성찬을 거행하는 데 온전히 부합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찬은 본당 형성의 살아 있는 원천이며 보편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게 하는 성사적 유대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 1988.12.30., 26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989.2.6., 6항, 8면 참조].

 

본당 신부들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수품 사제들만이 본당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성찬 전례와 말씀 전례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고유의 의견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나이가 젊든 많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모든 사제는 자신의 성품 직무에 고유한 특성에 따라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선물을 재발견하는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제 생활은 더없이 귀중한 선물로서 멋지고 특별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형태라는 것을 용감하게 말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현대의 사제 양성」, 39항).

 

따라서 말씀과 성사들의 교회는 사제 직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회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매순간 스승에게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행동하도록 부름받은 그 소명을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거룩한 사제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최근 캐나다 퀘벡 주교회의의 사도좌 정기 방문 때(2006.5.11.) 캐나다 주교들에게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 …… 사제 수의 감소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 성사성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목 기구의 필요성이 그 안에 표현된 교회론의 진정성을 위협해서는 안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고 다스리는 사제의 주요 역할이 축소되어서는 안됩니다. 직무 사제직은 교회 공동체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기꺼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평신도에게 주어진 역할의 비중 때문에 교회 생활에 꼭 없어서는 안 되는 사제 직무가 가려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6.5.24., 3면).

 

우리 사제들이 우리의 참다운 존재론적 신원을 밝히고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우리의 신원에서 비롯되는 선교 직무를 열심히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신자와 더불어, 당신 밭에 일꾼을 보내시는 수확할 밭의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드립시다. 성소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러한 수단들을 가지고 성소자들이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도록 격려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교회가 그 활력과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번영과 새로운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이제 사도들의 모후이시며 사제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그분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목 직무와 모든 사제를 맡겨 드리고, 성모님께서 우리가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감실과 성광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장관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

차관 마우로 피아첸차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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