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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가족과 미세스 다웃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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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303

영화 <가족>과 <미세스 다웃파이어>

 

 

가족이라는 이름 

 

지난 9월 초 개봉한 한국 영화 <가족>은 영화가 단순히 사회의 잘못된 점만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像)과 그 정서를 표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소극적인 접근 방식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직 경찰이었던 주석은 한쪽 눈을 다치고는 생선가게를 하고 있다.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미용사가 꿈인 27살의 딸 정은이와 축구선수가 꿈인 10살의 아들 정환이와 함께 지낸다. 정은이는 엄마가 죽은 뒤 방황하다가 깡패인 창원이와 어울렸는데, 그를 대신해 감옥에서 살다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버지 주석은 그녀를 무뚝뚝하게 맞이하고, 정은 역시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막내인 정환이는 아버지와 누나의 어색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둘이 화해하기를 바란다.

 

정은이는 미용실에 취직하지만, 깡패 창원이는 3년 전 정은이가 가져간 돈을 찾으려 아버지를 협박한다. 정은이와 정환이를 지키려는 아버지 주석은 창원이에게 돈을 갚고 무릎을 꿇어가면서 정은이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창원이는 정은이를 맘에 들어하는 부사장에게 넘기려 한다. 

 

한편, 정은이는 아버지가 백혈병이며, 만성에서 급성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구나 그토록 미워하며 그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던 아버지의 눈을 다치게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게 된다. 한편 깡패 창원이는 아버지와 동생을 볼모로 정은이의 몸을 요구하자 그녀는 그를 죽이려고 결심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신파조의 영화라고 말한다. 틀리지 않다. 그러나 난 그렇게만 보고 싶지는 않다.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배우의 연기와 음악과 영상이 있다. 그리고 영화 안에 흐르는 가족의 따스함과 그것에 가슴으로 감동한 관객들의 눈물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무뚝뚝한 아버지인 주석의 모습은 어려운 시대를 지내며 묵묵히 자녀들을 키워왔던 이 땅의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속으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한 선물로 여겨지는 딸아이여서 혹시라도 나쁜 길에 빠져들지 않고 사랑스럽게 자라기를 바라지만,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딸아이가 무척이나 서운하다. 그러나 그 속내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이의 실수를 20여 년 동안 숨길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병도 숨기고, 자식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을 꿇을 수도 있는 이들이 부모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문화방송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가족>을 보고도 느낀 것이지만,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라는 존재는 과묵하고 때로는 폭력적이다.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사회에서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엄하고,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부정적인 모습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딸. 그들에겐 모녀 간의 살가움, 부자 간의 속 깊은 의리와 같이 정형화된 정서가 거의 없다. “난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던 어린 딸이 사춘기가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조차 영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것이다. 영화 <가족>은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의 서먹한 관계를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단 한 번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이미 오랜 갈등으로 어긋나버린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해 나가는지를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금은 곁에 계시지 않지만, 필자의 아버지 역시 전형적인 가부장적 모습을 가졌었다고 형제들은 말한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던 해에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늦둥이 막내인 나와 함께 장난을 치고, 놀아주고, 목말을 태워주기도 하셨다. 엄하셨지만 난 다른 형제들이 느끼지 못했을 아버지의 속내를 많이 체험한 자식이었다.

 

우리네 아버지는 속내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오셨던 것 같다.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아버지는 가정의 중심이고, 약한 모습으로 가족을 흔들지 않도록, 자신은 강하지 않아도 강한 척해야 할 책임을 무게로 지니고 사셨던 분들이 아닌가 싶다. 중심이 흔들리면 가족 모두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방법과 자신의 약한 감정을 가족에게는 보이지 않으려 일부러 강한 척, 지배적인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었다고 본다. 비록 그것이 자녀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모습이었다고 하더라도.

 

영화 <가족>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딸 정은이가 3년 만에 출소해서 집에 왔을 때 무뚝뚝한 아버지 주석의 첫 대사는 “왜 왔어? 언제 나갈 거냐?”였다. 속으로는 다른 데 가지 않고 집에 돌아온 정은이가 고맙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정은이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딸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 만한 말이었다. 왜 따뜻한 말로 딸아이를 맞이하지 못할까? 왜 우리네 아버지는 속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할까? 그러한 답답한 아버지상을 거부하는 요즈음 신세대 아버지들은 다를까? 다르다면 어떻게 표현할까?

 

“너도 나중에 애 낳아서 키워봐라. 그러면 부모 맘 안다.”라는 말이 있다. 자식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 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워볼 때에야 그때 나의 부모가 이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자식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많은 것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뜻이다. 그 가슴에 품은 것을 뒤늦게 자식이 부모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알게 된다. 

 

한 부모가, 잘못한 딸과 아들을 꾸중한 뒤 우유를 건네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트로트를 틀어놓고 온갖 막춤을 추며 어머니를 웃게 만드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선 아버지의 인생을 응원하는 일반인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가족을 주제로 한 광고들이다. 영화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가족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흉악한 범죄와 불경기로 힘들고 각박한 요즘 세상에서 이런 따뜻한 가족의 모습은 더욱 가치 있게 다가온다. 이 시대에 유일하게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과 위안이 있다면 그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영화 <가족>은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다시는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마요!” 한쪽 눈을 다친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에 동네 녀석들에게 애꾸눈 딸이라는 놀림을 받았던 딸은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엄마를 죽게 한 것 같고, 자신의 삶에 관여하는 부담스러운 존재이며, 냄새나는 생선장수이며, 술주정뱅이, 한쪽 눈을 다쳐 흉측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이다. 이런 집안의 딸이라는 것이 싫고, 이러한 환경이 싫다. 그런 정은이가 아버지의 속마음을 훔쳐볼 수 있는 계기가 영화에 나온다. 아버지의 병을 위해 검사를 받고, 깡패 창원을 죽이고 감옥에 갈 것을 결심하고 아버지의 수염을 깎아드리는 정은이와 아버지의 포옹은 너무나 아픈 결말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슬픈 장면으로 각인된다. 마치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를 위해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에게 선물하려고 결심할 때처럼. 

 

“나가! 나가서 너는 네 식대로 살아!” 아버지는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내에게서 얻은 소중한 보물과 같은 딸아이 정은이가 걱정된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깡패와 어울리더니 형무소까지 갔다 왔다. 마음을 잡고 사는가 싶더니 다시 깡패와 어울리는 것 같다. 해서는 안 될 말로 딸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었다. 정은이가 제발 그 위험한 놈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 녀석, 왜 그리도 내 맘을 모르는 걸까? 내가 그 놈들한테서 두 아이, 정은이와 정환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무런 힘없는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미안하다, 정은아! 너무 가난해서 결혼식도 제대로 못해서 늘 미안했던 아내의 유언대로 딸아이 정은이는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려주고 싶은데, 그 애는 자꾸만 내 뜻과 다르게 커간다. 

 

아버지 주석의 속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가 보다. 그렇게 부모는 속으로 애태우면서 그 애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투기’인 것 같다.

 

 

화해에 이르는 길 

 

부모 자식 간에 다투기가 시작되었을 때, ‘가족 간의 대화’는 참으로 다투기를 통해 더 나은 가족 치유를 시작할 수 있다. 더 적극적인 가족 치유를 그린 미국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년)를 소개한다. 이 영화도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다룬 영화이다.

 

만화영화 더빙 성우이며 거리낌 없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다니엘은 주변 사람들을 늘 즐겁게 해준다. 특히, 그의 아이들에게 아빠는 영웅이다. 그 또한 세 아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나 그는 실직을 거듭한다. 경제적으로는 빵점인 것이다. 한편, 매사가 정확한 아내 미란다는 그의 장점이라 여겼던 것들이 현실생활에선 단점이 될 뿐임을 깨닫는다. 미란다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되며, 다니엘은 매번 진지한 대화를 거부한다. 

 

결국 14년을 지낸 결혼생활은 무너지고 만다. 세 아이의 양육권은 미란다에게 주어지고, 다니엘에겐 주 1회 방문만이 허락된다. 토요일만 기다리며 사는 다니엘이 어느 날 미란다의 가정부 구인 광고를 보게 된다. 갑자기 묘책을 떠올린 다니엘은 분장 전문가인 남동생에게 소리 지른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 미란다와 아이들 앞에 나타난 은발의 가정부 할머니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폭소를 유발시키는 실수와 해프닝을 연발한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다니엘로서는 듣지 못한 미란다의 진심을 알게 되고, 다니엘로서는 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며, 다니엘로서 해주지 못한 가족의 울타리 역할을 하게 된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더욱 건강한 다니엘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여기서 다니엘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족>의 주석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족>과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결말은 매우 다르다. <가족>에서 정은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지만 (개선되지 못하고) 그냥 그리움으로 끝을 맺고,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는 아내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안 다니엘이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건강한 존재로 돌아온다. 

 

한국 영화 <가족>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리워하는 데 그치는 소극적인 접근방식에서 끝나지만, 미국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자식에게는 더 나은 아버지로, 아내에게는 더 나은 남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동서양의 정서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관객들이 <가족>을 신파조의 영화라고 평하는 것도 이런 이유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영화가 잘 되고 못 되고, 신파조의 영화이건 아니건 이 영화를 만든 이정철 감독은 이 시대의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근래의 파괴되어 가는 가족의 모습 안에서 부모의 속내를 느껴볼 수 있는 감동의 영화이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을 그냥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맘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것은 소극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악순환이다. 30여 년이 흘러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더욱 치유적인 과정과 결말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파괴되는 가정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물론 치유의 첫 단계엔 각성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각성한다고 해서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적극적인 행동이 있어야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영화 <가족>에서 정은이가 아버지를 면도해 주는 장면과 몇몇 장면은 한국 영화의 소극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정은이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눈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고, 더 나은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대화와 나눔이 필요했지만 그런 대화의 모습을 영화는 그리지 않는다. 반면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다웃파이어가 된 다니엘은 아내와 자녀들의 속내를 들어볼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는 변화된다. 다니엘의 변화는 아내와 자녀들과 속내를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다웃파이어로 변장하지 않았다면 들어볼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영화적 요소라 할지라도 관계의 치유에 무엇이 필요한지는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영화는 치유와 화해를 위해 더 적극적인 행동방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영화적 요소가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즐거움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이다. ‘즐거움의 욕구’는 모든 관객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욕구 충족과 영화를 만드는 이의 욕구 충족(돈벌이, 명예 등)이 가장 잘 결합한 영화가 허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일 것이다. 관객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며, 아무 생각 없이 멋진 배우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켜 대리만족의 즐거움까지 줄 수 있는 영화이며, 동시에 많이 이들이 보게 되면 대박으로 돈도 왕창 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뭔가를 표현하고 담아내고 싶은 영화라면, 더 적극적인 영상적 치유를 욕심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어떤 것을 극복하고 치유해 낼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영상에 담는 영화 말이다. 치유와 교육적인 것을 담는다고 해서 다큐멘터리 방식을 꾀할 필요는 없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처럼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이고, 더 치유적인 결말을 내는 데는 시나리오의 구성과 연출 기술이 필요한 것이라고 나의 소견을 말하고 싶다.

 

올 가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네 신앙인들은 이 두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보고 대화를 나누면 좋을 것 같다. 두 영화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고, 감명 깊은 장면들을 나누기도 하고, 반드시 ‘왜 그 장면이 감명 깊었는지’도 나누어 보라. “왜?”라는 질문은 영화 나눔에서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장면이 감명 깊었다는 말은, 그 사람의 어느 삶과 연관이 되어 감명 깊은 장면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보면서, 다니엘이 다웃파이어가 되어 가족들과 어떻게 만나는지 보라. 그 접근방식이 가족 간의 대화방식이므로. 그리하여 가족애가 더욱 두터워지고, 치유의 계기와 나눔의 마당이 되길 기도한다. 그동안의 기고를 끝내면서 영화가 단순한 즐거움의 욕구 충족으로 끝나지 않고, 삶을 변화시켜 주고 치유를 제공하는 문화(Culture)로 우리 삶의 자리에 남아있기를 기도한다.

 

사목, 2004년 10월호, 황광우(꼰벤뚜알 프란치스꼬 피정의 집 책임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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