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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결혼과 가족에 대한 두 개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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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78

결혼과 가족에 대한 두 개의 영화

 

 

1997년에 “나쁜 영화”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거리로 내몰린 청소년들과 행려자들에 대해 다큐멘터리처럼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상은 아름다운 것이 거의 없었다. 영화를 통해 그들의 아픔과 상처들을 다룸으로써 사회의 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을 테니까.

 

이런 부류의 영화는 고발과 경고를 담고 있으며, 타산지석의 효과를 기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나쁜 사건을 다루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고발하는 사건보도를 통해, 인간의 사악한 부분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사악함을 사용하는 방법을 은연중에 전수받기도 한다. 자신의 ‘가치 필터’가 견고하지 않거나 분별력이 부족하다면 말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는 타산지석의 효과가 크겠지만, 나쁜 영화는 나쁜 가치관과 행동을 전해줄 가능성이 짙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바람난 가족”

 

2002년에 개봉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와 작년에 나온 “바람난 가족”을 본 사람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줄거리는 이렇다.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보는 대가로 ‘소개팅’을 하게 된 준영은 지적이고 매너 좋은 대학 강사이며, 연애지상주의자다. 민트 향을 풍기며 나타난 연희는 섹시하고 당돌한 조명 디자이너이다. 가식적인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 3차로 술집까지 가게 된 두 사람은 택시비보다 여관비가 더 쌀 것 같다는 대화를 나누다 어느새 여관으로 직행하고, 이후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준영은 겉으로는 지적이고 여자한테 잘하는 매력적인 남자지만 결혼 얘기만 나오면 냉소적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하는 연희를 밀치듯 조건 좋은 의사에게 떠민다. 의사와 결혼한 뒤 연희는 경제력 때문에 독립하지 못하는 준영에게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옥탑방을 마련해 주고 신혼부부처럼 주말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준영은 남편과 자기 사이를 왕래하는 연희에게 더 이상 옥탑방에 오지 말라고 화를 내고, 연희는 준영이 없을 때만 왔다 간다. 영화는 연희가 틈틈이 찍어둔 둘만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담은 사진 앨범을 보며 준영이 연희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과, 준영이 없는 옥탑방을 방문하는 연희의 모습으로 결론 없이 끝난다.

 

영화 “바람난 가족”의 내용은 이렇다.

 

영작은 돈 안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올바른 일이라면 도맡아 하는, 비교적 정의로운 30대 변호사이다. 그의 아내 호정은 전직 무용수였지만 현재는 동네 무용학원에서 춤추는 것이 전부인 30대 주부이다. 모범적인 변호사이자 가장이 되기를 희망하는 영작과 평범한 삶에 질린 호정 그리고 입양한 7세 아들 수인, 이렇게 셋이 한 가족이다.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이 단란한 가정이다.

 

그러나 영작은 한참 나이 어린 애인과 바람이 났다. 이에 호정은 고2 중퇴에 곧 프랑스로 떠날 예정인 옆집 고등학생과 맞바람을 낸다. 영작의 아버지 창근은 6?25 전쟁 때 가족을 잃어버린 아픈 기억 때문에 평생을 오로지 술에 의존하여 살아온 중증 알코올 중독자로 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아내인 병한과는 부부관계가 15년 동안 없었다. 호정의 60살 먹은 시어머니 병한은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났다. 술병을 끼고 사는 남편과의 섹스에서는 얻을 수 없는 만족을 애인이 준다고 기뻐한다.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창근이 죽자, 아내 병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창인 애인과 재혼을 한다. 영작은 출장 간다는 핑계로 애인 연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술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몰던 지루를 차로 친다. 그리고 된통 잘못 걸린 바람에 지루의 손에 어처구니없게도 아들 수인을 잃는다.

 

아들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호정과 영작, 서로의 바람을 빌미로 심한 다툼 끝에 호정이 다쳐 결국 병원에 간다. 다친 호정을 치료한 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택시를 타고 각자의 애인에게로 간다. 영작이 찾아간 애인의 집에는 그녀의 또 다른 애인이 있다. 한편 아내는 고2 지운과 관계를 맺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는 따로 방을 마련한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영작은 호정의 연습실에 와서 이제부터 잘하겠다고 한다. 그 아이가 자기 아기가 아닌데도….

 

 

영화에는 감정적인 사랑만이 있다

 

이 두 영화는 결혼생활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 근래에 나타나는 결혼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 과연 우리 신자들은 이 두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선전 팸플릿에 나오는 연희에 대한 문구를 살펴보자.

 

“조명 디자이너인 연희는 솔직하고 사랑스런 여자. 그녀가 지극히 현실적으로 된 건 27살이 넘어가면서부터다. 삶을 윤택하게 해줄 ‘조건’을 만나려고 한 달에 열 번이 넘게 맞선을 보고, 자신의 감성을 자극시켜줄 로맨틱한 애인도 가지려 한다. 이 두 가지를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연희는 그저 남들보다 좀 바쁘게 사는 정도. 어쩌면 연희는 요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물론 감독의 의도에 맞게 팸플릿이 제작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선전문구는 사람들 안에 스며들어 묘하게 작용하는 게시물이다. 위에 밑줄 친 구절은 연희야말로 요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원하고 닮아야 하는 캐릭터처럼 들린다. 과연 그럴까?

 

연희의 결혼은 사랑 없는 조건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불손한 결혼이다. 남편에게 해주는 행위는 가식적이고 무료한 일상의 행위인 반면에 애인인 준영에게 해주는 행위는 행복하게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행복하다는 진리는 감정적으로는 맞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감정에 충실한 것이 찬양받아야 할 사랑일까? 남편과 애인 사이를 오가며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녀가 용감한 것일까? 그런 연희의 모습이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원하는 현대 여성의 모습일까?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남녀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되씹어보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면 감정에 충실한 것이 올바른 사랑이라는 통념을 갖게 될 것이다.

 

과연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상대를 그 사람으로써 인정하는 행위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에서 절대적인 무소유는 어렵다. 약간의 소유욕이 있어야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약간의 소유욕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서로를 소유하며) 살려고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랑에는 소유욕이 포함된다. 그러나 소유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결혼한 연희와 옥탑방에서 주말에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점점 연희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지는 준영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연애주의자가 사랑의 맛을 안 것이다. 그러나 부족하다. 왜냐하면 소유욕을 느낀다고 해서 사랑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남편에 대한 존중과 책임적 사랑, 결혼한 여인인 연희에 대한 존중과 책임이 결여된 질투만 보이는 사랑, 남편과 애인 사이를 오가며 애인에게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감정적인 사랑만이 있다. 여기에는 사랑의 본질적 특성인 상대에 대한 존중과 책임의식이 없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고 거짓말할 자신이 없다.’는 준영의 대사가 더 솔직하며 책임감 있는 말이 아닐까.

 

 

신앙인으로서 보는 두 영화

 

“바람난 가족”은 콩가루 집안 같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바람’과 ‘불륜’을 소재로 한 ‘문제의 영화’이다. 낯 뜨거운 장면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근래의 결혼생활의 불완전함을 극명하게 표현하면서, 동시에 역기능도 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역기능이란, “저런 남편이라면 나도 바람피우겠다.”라는 심리를 부추기는 기능을 말한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가치관을 살펴봄으로써,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관과 비교해 보고 싶다.

 

6?25 전쟁 때 가족을 잃어버린 아픈 기억에 평생을 오로지 술에 의존하여 살아온 중증 알코올 중독자로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남편에게, 한 치의 희망이나 행복을 찾지 못하는 아내 병한이 남편이 죽자 초등학교 동창과 재혼을 하는 내용을 보자. 섹스가 부부사랑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부애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부부를 위한 프로그램인 ME(Marriage Encounter)에서도 무언의 대화가 부부애에 꽤 많은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무언의 대화 중에 비중이 큰 것이 섹스이다. 그렇다고 부부애의 전부는 아니다. 

 

병한은 남편 창근과 15년 동안 섹스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60의 나이인 요즘에 섹스도 하면서 오르가슴도 느낀다고 행복해한다. 그것이 마치 부부사랑의 전부인 양 표현된다. 그래서 병한은 남편이 죽어가는데도 옆에서 담배만 피우고, 남편이 피를 토하는데도 며느리가 치우도록 놔두는 것일까? 그리고 남편이 죽자마자 행복한 재혼을 하는 것일까? 병한의 태도에는 남편에 대한 냉랭함과 미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 모습만이 보인다고 하면 나의 편협된 생각일까?

 

영화의 다른 면을 보면, 남편 창근은 어머니와 형제들을 6?25 전쟁으로 다 잃고 아버지와 살다가 아내 병한을 만났을 것이다. 그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아픈 기억 때문에 술에 의존하며 살게 된 상처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충실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상처를 술로 달래는 남편에게 병한은 아내로서 어떤 내조와 사랑을 보여주었을까? 영화에서 다루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영화 안에서는 남편이 15년 동안 자신과 섹스를 하지 않았고, 술만 먹고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기에 그런 남편에서 벗어나, 섹스도 나누고 오르가슴도 주는 동창과 함께, 남은 인생을 자신의 육체와 감정 모두에 솔직하게 살기로 한 그녀는 이제야말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재혼한 동창이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을 줄 수 없다면 그도 싫어질 것인가?

 

부부는 서로에게 치유자이어야 한다. 남자가 우위권을 갖고 권위주의에 싸여 아내를 마치 식모 다루듯이 하여, 여성의 지위가 뭉개진 듯한 가정구조도 잘못이다. 그렇다고 여성이 우위권을 갖고 자유와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진정한 부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부부는 나약하고 결점이 많은 두 존재가 만나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나약함과 상처를 안고 있는 존재들이다. 부부의 진정한 행복은 서로가 서로의 결함을 보완해 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부부의 사랑은 더 영글고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맞바람을 피는 방법만이 용기 있는 여성의 행위일까?

 

이런 부모에게서 자라나 결혼을 하게 된 영작이 올바른 가치관을 지니고 부부생활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어려울지 모른다. 변호사로서 사회생활을 잘하고, 돈도 잘 벌어오며 입양아들 수인과 잘 지내는 영작은 정작 아내 호정에게는 남편으로서 충실하지 못하다. 오히려 젊은 애인 연에게 충실하다. 바람난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바람피우도록(?) 놔두는 호정은 옆집 고등학생과 맞바람을 핀다. 그리고 임신한 다음, “니 애 아냐.”라고 당당하게 남편에게 말할 정도이다.

 

이 집안의 부부도 올바른 가치관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입양아들을 친자식 못지않게 잘 키우고 있는 부부이며, 부부관계에서도 서로의 영역과 자유를 존중하는 듯 보이는 관계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호정이 고등학생과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자, 남편 영작이 말한 ‘아내의 임신이 기적과 같은 사실’이라는 대사에서처럼, 입양아들을 두고 아내에게 정을 못 붙이고 애인에게 정을 붙이는 영작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숙한 남편의 모습은 아니다. 그는 아내에게 더더욱 충실하여야 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한 남편의 행위 때문에 맞바람을 피는 방법만이 용기 있는 여성의 행위일까? 이것이 옛 전통에 대항하는 용기 있는 여성의 모습일까? 낙태와 외도라는 비그리스도적인 행위가 당연시되는 부분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말이다.

 

나의 관점에선 이 부부는 서로 파워게임을 하고 있다고 본다. 호정의 배에 있는 아이가 남의 아이라 해도 수인과 별 다를 바 없으니, “이제부터 너에게 잘하겠다.”라는 영작의 대사와 그의 말을 듣고 마치 이제 남편을 되찾아서 행복하다는 듯이 경쾌하게 걸레질을 하는 호정의 행동에서 이들이 파워게임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올바른 부부의 가치관이란, 서로의 결함을 보완하는 상호 보조자요, 협력자며 조력자로서 서로가 안고 있는 상처를 치유해 가는 치유자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아이는 부부사랑의 결실이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서 부부가 그 아이를 중심으로 또 다른 결속력을 갖게 된다. 필요에 따라 끼웠다 뺐다 하는 부속품이 아닌 것이다. 아이를 통해 부부는 더욱 결속력을 다지는 공동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요즘 부부들은 서로가 맞지 않으면, 쉽게 이혼을 한다. 부부 이기주의에 싸여있다. “우리 부부는 성격이 맞지 않아요.”, “믿었던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요. 그래서 각자의 행복을 위해 우린 헤어지기로 했어요.” 물론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부는 관계성을 지닌다. 이는 서로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부는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관계여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친밀함을 가진 관계라고 부른다.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얽매임으로서의 관계성이 아니라, 친밀함을 지닌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아이가 있다면 책임을 띤 성숙한 관계를 지녀야 한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자녀들은 나 몰라라 하는 요즘 세태는 분명 올바른 사랑의 가치관을 가진 사회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부부는 서로가 성숙으로 향하게 하는 관계이다. 서로의 결함을 보완하는 관계이다. 그래서 더더욱 친밀해질 수 있는 관계이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로서 훌륭한 치유자의 관계이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존중하고, 속박과 소유가 아닌 자유로운 관계가 될 것이다. 이것이 부부관계를 통한 성숙이며, 사랑이고, 행복일 것이다.

 

 

영화의 역기능과 타산지석

 

이 두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은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고발과 질책만 난무할 뿐, 영화를 통한 치유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고발과 질책의 내용은 역기능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마치 ‘남들도 저러는데 나라고…’, ‘시대가 그런 시대니깐 나도 괜찮아.’ 하는 식으로 부추기는 역기능 말이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영화가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다. 그 영화가 갖는 고발적 실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말이다.

 

치유와 보완의 기능이 없는 영화는 올바른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의한 분별력을 가지고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가치관을 가지고 영화와 만나야 한다.

 

[사목, 2004년 4월호, 황광우(꼰벤뚜알 프란치스꼬 피정의 집 책임자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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