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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칼럼: 도서 우정일기 - 서울 한복판의 신비가를 그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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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칼럼] 도서 ‘우정일기’ 서울 한복판의 신비가를 그리며
‘신비가’란 말을 들으면 흔히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처럼 특별하게 하느님의 신비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 하느님과 우정을 나누고 그 우정으로 사람들을 초대한 ‘신비가’도 많습니다. 에지드 반 브루크호벤(1933-1967)도 그런 사람입니다.
에지드는 벨기에 출신으로 브뤼셀의 공장에 들어가 노동 사제로 살다가 34살에 산업재해로 생을 마감한 예수회원입니다. 그는 10대에 하느님과 친밀함에 빠져들어 예수회원이 되고 한때는 봉쇄수도회인 카르투시오회로 이적도 고려했지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느님과 나누는 우정에 응답해 가며 노동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여정을 담은 일기를 꾸준히 썼는데 그의 사후에 《우정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일기에서 그는 말합니다. “사랑을 감당할 힘이 없는 자는 법 안으로 피신한다.”(1959/9/27) “사도직이란 가장 깊은 우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우정은 이런 하느님 나라 사랑의 메신저이다.”(1960/1/23) 친분이 생기자, 아랍 출신의 15살 소년 노동자는 그에게 말했답니다. “담배 필요하면 얘기해요. … 나 아저씨 집에 … 살고 싶다.”(1967/9/12) 그는 점차 그가 살던 브뤼셀을 ‘불타는 떨기나무’와 비교합니다. “혹시 내가 불타는 떨기나무와 브뤼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단연코 브뤼셀을 택할 것입니다.”(1966/3/13) 브뤼셀은 하느님 현존으로 불타는 떨기나무이다.”(1967/8/10) 신비가의 말입니다.
1960년대 교회는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전후로 수에넨스 추기경 같은 지도자, 샤르댕이나 콩가르, 라너 같은 신학자, 또는 예수회의 개혁을 이끌었던 아루페 신부 등 여러 거장이 교회의 쇄신을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은 에지드와 깊이 사귀고 있었고, 이 청년은 브뤼셀 한구석 공장에서 무슬림, (이주) 노동자들과 우정을 맺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국의 중심 로마에서 정치와 문화와 군사의 중요한 일들이 전개되고 있을 때 변방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제자들과 친밀하게 우정을 나누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뿌연 하늘 아래 약삭빠른 사람들이 숨 가쁘게 살아가고, 피상적으로 ‘매일의 틀에 박힌 시시한 삶’을 살기 쉬운 바로 이 서울 한복판에서, 하느님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여주며 젊은 영혼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계실 것입니다.
[2023년 9월 17일(가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서울주보 5면, 김우선 데니스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교수)] 0 5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