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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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2000년 제86차 세계 이민의 날 교황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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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7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86차 세계 이민의 날 담화문


너희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 교황청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 뒤의 세 번째 주일을 세계 이민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새 천년기의 문턱에서 인류는 활발한 이동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한 인류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주는 서로 다른 문화, 종교, 인종, 국적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촉진시킵니다. 현대의 교통 수단은 지구의 이편과 저편을 더욱 빠르게 연결해 주고 있으며, 날마다 수많은 이민과 난민, 유랑민과 관광객들이 국경을 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복잡한 이주 양상의 직접적인 이유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 원인은 정의와 자유와 평화의 초월적인 지평에 대한 갈망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이주는 간접적이지만 하느님과 관련된 염원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기의 모든 기대가 충족된다는 것을 압니다. 많은 국가가 이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많은 이민들이 힘겨운 적응 과정을 이겨내고 그 사회에 잘 융화됩니다. 그러나 때때로 외국인으로서 당하는 오해는 구조와 마음자세의 변화가 시급함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변화는 2000년 대희년이 그리스도인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희년, 순례와 만남의 시간

 

2. 대희년을 맞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합니다. 이 은총의 시간을 뜻깊게 보내기 위하여 많은 신자가 성지와 로마 그리고 전세계의 순례지로 순례를 떠날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든 사람, 특히 자기와 다른 사람들, 곧 투숙객, 외국인, 이민, 난민, 다른 종교인들과 비신자들에게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순례는 시대마다 문화적으로 다른 형태를 띠긴 했지만, 신자들의 생활에서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습니다. "순례는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신자의 개인적 여정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순례는 고행의 실천, 인간적 결점에 대한 참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 회심을 위한 내적 준비입니다"([강생의 신비], 7항). 이러한 내적 여정을 경험하는 많은 순례자들은 배경과 문화와 역사가 다른 신앙인들과 다양한 만남을 가짐으로써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순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특별한 기회가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친척과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세 12,1 참조) 먼저 노력해 온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기꺼이 자신을 열고자 합니다. 이주의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주는 사람들을 '그들 밖으로 이끌어냄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회 환경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평화로운 공존에 필요한 조건이 성립될 때에 사람들을 그 속에 융화할 수 있습니다.

 

 

교회, '일치의 성사'

 

3. 기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고"(요한 11,52) 그들을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묵시 21,3 참조) 하나의 인류 가족으로 결합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상기시키셨습니다. "교회의 마음에 이방인이란 없습니다. 교회의 봉사에서 무시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의 적이 되고자 하는 사람 말고는 교회에 적이란 없습니다. 가톨릭이라는 교회의 이름은 공연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일치와 사랑과 평화를 증진하도록 교회가 받은 사명도 헛된 것이 아닙니다"(회칙 Ecclesiam suam, 94항). 이 말씀을 되풀이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메시아 백성은 비록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지도 못하고, 가끔 작은 무리로 보이지만,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강력한 싹입니다"(교회 헌장, 9항). 교회는 자기 사명을 잘 알며,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일치의 표징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도 압니다. 교회가 이주 현상을 바라보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입니다. 오늘날 이주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지닌 세계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Ecclesia in America, 20-22항 참조). 한편으로, 세계화는 사람들 사이에 자본의 흐름과 상품과 용역의 교류를 촉진하며, 사람들의 동향에 필연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세계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사건이 지구 전체에 반향을 일으키며, 모든 나라가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지구를 이제 '지구촌'으로 생각하며,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초월하여 친교를 맺고 있습니다. 공존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화는 새로운 단절을 낳습니다. 자유주의 구조 안에서 적절한 규제도 없이, '앞서가는' 국가와 ' 뒤 처진' 국가 사이의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세계의 자원을 마음대로 누리게 해 주는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국가가 늘 연대와 나눔의 정신으로 그러한 자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후자는 적절한 인간 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손쉽게 얻을 수 없고, 심지어는 생계 수단마저 부족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 국가는 외채와 내분에 시달리며, 결국 얼마 안 되는 재화마저 전쟁에 탕진하기 일쑤입니다(회칙 [백주년], 33항 참조). 제가 1998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상기시켰듯이, 우리 시대의 과제는 연대를 통한 세계화, 소외 없는 세계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3항 참조).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이주

 

4.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빵과 존엄과 평화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탈출을 계획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국을 떠나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사람들, 흔히는 젊은이들의 필사적인 이주입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미래도 없는 삶에서 탈출하고자 목숨을 건 모험까지 감행합니다. 불행히도 그들이 찾아간 나라에서 마주치는 현실은 흔히 더욱 큰 실망만을 안겨 줍니다. 동시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들은 이주 현상이 수반하는 불편을 참지 못하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는 불법체류자들의 처리로 고심하고 있습니다. 조직 범죄나 악덕 중개인들의 희생자인 이들 불법체류자들은 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국가에서 아무런 권리도 없습니다. 교회가 인류 가족에 대한 봉사 사명을 새로이 인식하는 2000년 대희년의 문턱에서, 이러한 상황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문화의 차이를 만남과 대화의 기회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세계 자원의 불공평한 분배가 인류 가족을 일치시키는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킨다면, 세계화 과정은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불평등이 증대되면, 더 가난한 사람들은 필사의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부유한 국가들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자기네 손아귀에 넣으려는 끝없는 탐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강생의 신비에 대한 관상'

 

5. 교회는 이주 현상에 내재해 있는 비극뿐만 아니라 기회를 의식하고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의 신비를 관상하며, 제삼천년기의 문턱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강생의 신비], 1항). 교회는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일을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9-10). 그리스도인은 투신할 수 있는 힘을 그리스도의 사랑, 곧 모든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에서 얻습니다. 어머니이며 교사인 교회는 계시에 비추어 활동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이민들이 형제 자매로 받아들여지며, 온 인류가 여러 문화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단일 가족을 이루게 해 줍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오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환대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신자들의 특징적인 덕목으로 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머무를 곳조차 찾지 못했던 가정을 택하여 태어나셨고(루가 2,7 참조), 이집트에서 피난 생활을 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2,14 참조).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마태 8,20)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뜻이 맞아주도록 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가 19,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마태 25,35) 하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처할 곳 없는 나그네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을 환대하는 사람은 곧 당신 자신을 환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 이 희년을 맞이하고 또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환대의 촉구는 시기 적절하고 절실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나그네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맞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셨으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 외국인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셨습니다. 나자렛에서 사명을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며,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는 메시아로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은총의 해"(루가 4,18 참조)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그것은 형제애와 연대가 넘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며 해방을 가리킵니다. "희년, '주님의 은총의 해'는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지닌 특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희년은 단지 때마다 돌아오는 주년의 반복이 아닙니다"(교황 교서 [제삼천년기], 11항). 당신 교회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은 소외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을 새로운 형제 공동체 안에 맞아들이고자 합니다. 또한 그분의 제자들은 그러한 자비의 종이 됨으로써 한 사람도 잃지 않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요한 6,39 참조).

 

 

희년 경축과 인류 가족의 일치 증진

 

6.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경축하며 지난 세기를 얼룩지게 했던 비극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온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피비린내 나는 전쟁, 강제 이주, 죽음의 수용소, '인종 청소', 지금도 계속해서 인류 역사를 암울하게 하는 증오심 등이 그것입니다. 교회는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강제로 헤어지게 된 가족들, 오늘날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안정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듣습니다. 교회는 아무런 권리도 방어 수단도 없이 온갖 착취에 내맡겨진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불행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지원합니다. 세계 곳곳의 망명자, 난민, 추방자, 불법체류자, 이민, '노숙자'들의 모습은 희년 거행에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에게 희년은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신 그리스도의 호소에 따라서 그들의 마음 자세와 생활 태도를 바꾸라는 촉구입니다. 지극히 커다란 노력을 요하고 지극히 숭고한 동기를 가진 이러한 회개의 촉구는 당연히 이민들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인정할 것을 내포합니다. "이민들과 관련하여 시급한 것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그들의 이주 권리를 인정하며 그들의 융합을 장려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참된 정의의 필수적 토대이며 지속적인 평화의 조건인 보편적 형제애의 구축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모든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교황 바오로 6세, 회칙 [팔십주년], 17항). 인류 가족의 일치를 위하여 일한다 함은 하느님의 계획에 위배되는 모든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차별을 철폐하는 데 앞장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복음에 바탕을 둔 형제적 삶, 곧 문화의 차이를 존중하며 진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대화에 열려 있는 형제적 삶을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 모든 사람이 자기 조국에서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증진하며, 모든 국가의 이민법이 인간의 기본권 인정을 바탕으로 하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포함됩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러 서둘러 길을 떠나셨고, 환대를 받으셨으며, 구세주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셨던 동정 마리아께서(루가 1,39-47 참조) 이 희년에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떠나는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이 형제 자매로서, 또 같은 아버지의 자녀(마태 23,9 참조)로서 만나도록 도와 주시기를 빕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도로서 진심 어린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1999년 11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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