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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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주교회의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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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4 ㅣ No.84

'2002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인류는 21세기의 막을 올리며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지구촌의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국가 간의 협력과 지원 체제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여러 기회에 군비축소를 통한 평화 정착, 빈부 격차 줄이기, 부채 탕감, 환경문제의 공동대처 등을 논의하며 하나뿐인 지구촌을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국가와 국가 간의 긴장 고조, 종족 간의 갈등과 대결 구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와 세계인은 대결과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역사의 산 체험을 통해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땅에서는 아직 같은 민족이 냉전 시대의 대결적 사고와 전투 태세를 갖추고 서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2년 전 남·북한의 정상은 분단 뒤 처음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6·15 공동선언에 합의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며 감격하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2년이 지나도록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이렇다 할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50년 전에 헤어진 가족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최근 들어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를 헤매면서 하루하루 불안과 공포 속에 생활하는 수많은 북한 난민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더욱 가슴이 저려옴을 느낍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가족과 헤어지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팔려 다니며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번의 기획 망명으로 인하여 중국 내부의 탈북 주민들과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극을 우리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이 우리 탓만으로 분단되지 않았듯이 이 땅의 통일도 우리 뜻만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지정학적인 역학 관계가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임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역시 당사자인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되려는 의지와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제 남·북 어느 쪽도 무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평화통일만이 유일한 선택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힘에 의한 강압적인 통일이 아니라 화합과 일치를 통한 평화적 통일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많은 인내와 양보를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협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정부로서 해야할 일이 있고 국민은 국민으로서, 교회는 교회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여러 사제들과 신자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평양의 장충성당을 찾아 그 곳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북한의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장충 성당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나 북한 땅에서 유일하게 성찬의 전례가 거행되고 있는 곳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 7년 동안 북한에 적지 않은 식량, 농업기자재, 비료, 약품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이는 북한 동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남한에 대한 북한 동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의 외부 구조적인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족의 통일이요, 남북한 사람들의 하나됨입니다. 독일의 통일은 시작되었으나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일은 국가로서 하나가 되었지만 동·서독 주민의 마음에는 아직 적지 않은 앙금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서독인에게는 동독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었다. 늘 징징거리는 가난한 친척쯤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동독인들이 자신을 이등시민으로 여기고 있다. 통일된 뒤 부유한 남한이 가난한 북한에게 승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한국도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2002. 5. 29. '통일과 문화' 국제 심포지엄에서)

 

우리는 한 해에 10조 원이 넘는 음식 쓰레기를 버리면서 기아에 허덕이는 몇 천만의 동족과 집도 없이 타국을 유랑하는 몇 만 명인지도 모르는 형제들을 모르는 체할 수는 없습니다. 국경을 사이에 놓고 한 민족이 그런 극도의 불균형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를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들, 떠돌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모르는 체하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진실히 말하거니와, 너희가 지극히 작은 형제 중에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고 재차 확인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과 지원은 북한 형제들의 마음을 대결과 경계에서 화합과 일치로 돌아서게 할 것이며 그러한 화합과 일치가 무르익을 때 비로소 통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우리의 기도와 행동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기념일에 치르는 많은 연중 행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매일의 우리 밥상에서 우리는 북한 형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매주일 미사 때마다 우리는 북한 동포를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상 이것은 주님께서 명하시는 책무이며 이 땅에 복음을 실현하는 효과적인 길입니다.

 

2002년 6월 23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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