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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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2002년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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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4 ㅣ No.90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의 2002년도 성탄 메시지


구세주를 맞이하는 가장 합당한 기다림!

 

 

'너희는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루가 2,12)

 

갓 태어난 아기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장 미력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자기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자기 손으로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자기 먹을 것을 챙기지도 못하며 아무런 의사표시도 할 줄 모르는 채 엄마가 덮어준 포대기에 싸여 그냥 누워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표입니다.

 

그분은 한 처음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고, 생겨난 세상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자신을 낮추어 나약하고 미천한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약하고 작은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몰라 뵈었습니다. 세상에 그분보다 더 작고 더 나약한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세상의 누구도 억누르거나 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유에 눕혀진 채 두 손과 두 발을 허공에 쳐들고 온전히 내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 모든 이에게 평화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아기 때만이 아니라 평생 작은 자로 남으시고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는 사람들이 당신을 매질하고 십자가에 당신 두 손과 두 발을 못박는 데도 묵묵히 내버려두셨습니다. 불의와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인데도 그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표시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큰 힘을 가지고 계셨지만 힘을 사용하여 복수하지 않으셨고 누구보다도 분노하실 자격이 있으셨지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상은 불의와 폭력과 단죄와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습니다. 그분만이 참된 평화의 길이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시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단체 그리고 개인들도 힘을 축적하고 힘으로 남을 제압하고, 심판하고, 보복하는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입장만 내세우며 분노하고, 남을 단죄하여 힘으로 응징하려고 합니다. 남북한과 주변 강대국들의 관계가 그러하고 우리 사회 안의 정치단체 사이, 경영진과 노동단체 사이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분노와 규탄과 응징으로는 새로운 폭력만이 태어날 뿐입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 아이들이 둘이나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넘어가는 강대국의 오만과 불평등에 분노하며 우리들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자들이 이 나라에서 당하는 비인간적인 처우와 불의와 차별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와 원한은 얼마나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꿈을 안고 이 나라에 찾아왔다가 좌절과 울분을 가슴 가득히 품고 돌아갑니다.

 

오늘도 이 나라에선 하루에 4천명이 넘는 태아들이 수술실에서 의도적으로 제거되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병자나 장애인들도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존엄한 인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를 침범할 권한은 없습니다. 아직 어머니 태 속에 있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태아도 이미 똑같은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고귀한 생명을 일년에 몇 백 만 명씩 고의로 말살하고 있는데도 우리들은 침묵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규탄을 하기에는 우리 자신 안에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 남을 비판하고 응징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죄를 살피고 통회하며 하느님의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침묵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죄가 없으셨지만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용서를 청하시기 위하여 입을 다물고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침묵과 의탁이야말로 세상에 평화를 꽃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된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탓하며 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과 의탁을 먼저 이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힘있는 사람들에게 짓밟혀 상처받은 우리 주변의 작은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힘이 되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께 드리는 가장 진실한 예배요 찬양이며 다시 오실 구세주를 맞이하는 가장 합당한 기다림이 될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2년 성탄절에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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