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교구 사제의 영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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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305

교구 사제의 영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사제는 공동체 안에서 거룩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품을 받은 사제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의 교역을 실천할지라도 사제 교역의 근본적 모범은 신앙 공동체 내의 사목 지도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성품성사를 통해서 교회는 공동체의 중추가 되는 사목자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한다. 여기서 공동체와의 관계는 사제의 신원과 영성에서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사제의 성덕은 사제 홀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신앙 공동체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제는 공동체에 봉사하고 공동체를 지도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거룩해진다. 참된 사제 영성은,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여 봉사하고, 자신이 봉사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풍요로워지고 활력을 얻도록 스스로를 개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모범적인 상으로 제시될 수 있다.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서는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먼저, 성품성사를 통해 그는 교회와 성령의 활동으로 주교로 임명받았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성품성사를 통해 주어진 은총은 그가 산살바도르의 민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때까지는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산살바도르 민중이 로메로가 주교직을 수행하도록 하였고, 로메로는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다.

 

살해되기 얼마 전에 로메로 대주교는, 만일 자신이 죽음을 당한다면 산살바도르 민중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주교와 백성은 함께 산살바도르의 민중을 위한 착한 목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의, 필요, 용기, 사랑을 주교와 공유하였고, 로메로는 그들의 신심 충만한 열정을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능동적 배려와 참여로 변화시켰다. 로메로는 수품을 통해, 그리고 백성의 신뢰에 의해서 목자가 되었다. 그는 착한 목자의 성사적 현존이지만, 그의 목자로서 역할은 공동체 전체의 세례 은총을 촉진시켰을 때에만 유효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체들은 각자가 세례 받은 그 날에 사제, 예언자, 목자(왕)로 기름 부음 받았다. 백성 속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로메로에게 말하도록 한 것은 단순한 몽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 심원한 신학적 통찰이었다. 주교나 신부가 갖는 목자로서의 임무는 본성상 평신도의 목자적인 임무와 관련된다. 목자로서 홀로 고독하게 남아있는 주교나 신부들은 아직 서품의 은총 또는 세례의 은총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다. 공동체의 목자인 사제는 자신의 교역을 통해 탁월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할 뿐 아니라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신함으로써 전체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지원하고, 권한을 부여한다.

 

군중이 하루 종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난 뒤 사막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놀랍고도 당혹스런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루가 9,13) 하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줄 방법이 거의 없었기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목자 임무를 대신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고, 그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또한 모든 사목자의 삶 안에 있는 두 개의 유혹을 보여주셨다. 첫째는, 평신도의 목자 임무를 자기가 대신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경험, 기술, 자원 등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 공동체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협력하시어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셨다. 이런 상호성은 제자들이 교회 안에서 목자로서 적절한 자기 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목자는 공동체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존재한다. 사목자로서 사제는 자신이 표현하는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스스로 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사제가 거룩해지는 방식이다. 전체 공동체에 주어진 선물을 활성화하면서, 사제 역시 목자적인 교회로부터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고, 지원받고 있음을 경험한다. 지도자는 종종 힘든 중압감과 외로운 책임감에 놓일 수 있다. 사목자는 용기를 내서 인기 없는 입장을 취하기도 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해야 할 뿐 아니라 공동체와 맞서기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목자는 신앙 공동체에 봉사하고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동시에 사제는 교회의 보살핌 안에서 하느님과 자신의 사제 생활에 대한 후원을 발견한다.

 

 

강론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증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의 첫 번째 의무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확인했다(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 4항). 사람들이 사제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고 사제들은 배우고 있다. 공의회 뒤에 나온 전례서와 예식서는 말씀의 선포와 강론을 각 성사 거행에 결합시켰다. 오늘의 사제는 성서에 흠뻑 젖어야 하고, 교회는 사제의 강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을 얻기를 갈망한다.

 

사제는 성서 연구자 이상의 존재이어야 한다. 사제는 하느님 말씀을 교회의 일상에 집어넣는 예언자가 되는 권한을 받는다. 성서 연구자는 성서 본문과 그 맥락을 연구한다. 사제 역시 훌륭한 교사가 되려면 성서를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사제는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도록 불린 사목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임무는 훨씬 중대하다. 사제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백성을 이해해야 하며, 하느님 말씀과 이 특별한 신앙 공동체, 그리고 거기 있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가르침의 목적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곧 복음의 능력을 통한 공동체의 변화, 그리고 자신의 예언자적 임무와 사명에 대한 공동체의 자각이 그것이다.

 

사제의 영성은 그 임무의 본성상 기도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고자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내면화해야 한다. 사제에게서는 말씀의 향기가 뿜어져 나와야 하고, 그 의미심장함과 능력의 살아있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사제의 성덕은 우선적인 것이고 가장 효과적인 말씀의 선포가 된다. 사제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개인 기도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적극적 묵상은 효과적인 강론의 토대이다. 강론은 연설이 아니다. 강론은 명제나 통찰, 또는 교리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강론은 기도의 결실이다. 그것은 교회의 체험에 대한 증언이다. 강론은 ‘지금 여기’, 인간의 삶 한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사제의 증언이다. 참으로 예언자적인 강론은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에서 나와야 한다.

 

사제의 기도생활은 그가 섬기는 사람들, 그리고 진실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포함한다. 말씀이 진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면 사제는 삶 자체를 알고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계속해서 주지한 바대로 인간 존재는 교회생활의 중심에 있다. 이런 연유로 사목자는 인간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수품을 통해 사제는 경제, 정치, 예술, 심지어 가정생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유능한 사목자는 그가 섬기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평신도의 일상적 현실에 무관심한 본당신부는 결코 좋은 사목자가 아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인데, 평신도는 어떤 별나라가 아닌 이 일상적 현실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고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사제에게 가장 적합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돌려보자. 통찰력 있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하느님 말씀을 인간 현실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 바로 사제의 임무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르치고, 성사들을 거행하고, 기도를 인도함으로써, 그리고 회개한 생활의 증거를 통해 이 현실에 이미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임무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고자, 다리의 건설 과정을 감독하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잊지 않으면서 사제는 다리 양쪽의 지형을 알아야 한다.

 

제대로 된 영성생활은 그들이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리를 건설하는 사제의 능력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유능한 사제들은 다리의 양 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자신의 삶에서 이 두 가지를 연결하지 않고 하느님 쪽이나 인간 쪽의 어느 한군데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사제는 좋은 본당신부가 아니다. 이런 사제들은 지나치게 내세적이거나 수도승과 같은 신부고, 또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신부로 생각될 것이다. 본당신부의 영성은 하느님 은총의 길들과 그리스도께 온전히 매료된 사제에게서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다. 동시에 그는 복음을 위한 지성적인 참여자로서 일상의 현실 안으로 들어간다. 평신도에게 유익한 영적 지도를 하려면 무엇보다 세상과 복음 그리고 현세와 내세 사이의 주요 긴장 관계가 사제의 영성에서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나는 보통 월요일 아침부터 주일미사 강론 준비를 시작한다. 먼저 복음을 읽으며 기도하고 다가오는 주일 독서를 읽는 데 전념한다. 독서를 읽는 직접적인 목적은 강론 준비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을 잘 알아듣도록 그 말씀을 마음 안에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화요일 아침에는 다가오는 주일 제1독서를 읽고 그 말씀을 기도 속에서 경청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수요일에는 제2독서를 읽는다. 목요일에는 다시 복음을 읽고, 나머지 날 동안에는 그 과정을 반복한다. 나는 독서와 복음을 내 마음의 뚝배기에 담아서 일주일 내내 그것을 보글보글 끓이는데, 무언가 놀랍고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그것을 반복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미사에서 선포될 때 가장 강력하다. 통찰력과 은총이 공동체와 강론자를 놀라게 하고 도전하면서 설교 행위에 결합된다. 사제는 공동체와 함께 살고, 기도하고, 교역을 수행하면서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강생하신 말씀에 대해 말한다. 동시에 그 말씀은 이 공동체에 아주 적절한 것이 된다. 공동체의 목자가 행하는 설교는 그가 공동체의 일원이며 지도자이기 때문에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주일미사에서 말씀의 선포는 사목자가 자신의 지도력을 실천하는 첫째가는 방식의 하나이다. 강론 준비와 매주 이루어지는 하느님 말씀 선포는 사제생활에서 회심과 성화를 위한 가장 좋은 길이다. 강론은 인간의 삶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자리이다. 강론자는 성서, 개인적 경험, 그가 봉사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체험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이 독특하고 좋은 위치에서, 사제는 자신이 보는 것을 선포하고 또 자신이 선포한 것에 의해 변화된다.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때로 강론에 의해 변화되지만, 역으로 공동체는 이 선포된 말씀을 다시 사제에게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 사제에게 말씀에 대한 응답을 더욱 깊게 할 것을 촉구한다.

 

 

성체성사와 교구 사제의 영성

 

성찬례는 최상의 경신례이다.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변화시키시는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성찬례의 가장 큰 효과는 교회의 일치라고 가르쳤다. 성찬례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데서 경배받고 영광을 받으신다. 마더 데레사는 사제가 없는 곳에 수녀들이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더 데레사에 따르면, 사제 없이는 성찬례가 없고, 성찬례 없이는 자신의 수도회인 사랑의 선교회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적 소명은 성찬례에 뿌리박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힘을 받고 방향을 찾고자 성찬례의 모임으로 계속해서 돌아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왕국의 첫 결실이시고, 희생적 사랑 안에서 자신을 주신 탁월한 분이시며, 새 생명으로 일어서신 첫 번째 분이시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 변화의 원천이 되는 분이시다. 사제 교역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제적 백성을 일으키시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재창조하신다.

 

사제의 성찬례 영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사명과 교회의 변화 안에서의 성찬례의 역할에 바탕을 둔다. 성찬례는 단지 주어진 선물이나 흠숭을 받는 현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탁월하게 힘을 불어넣는다. 역동적인 사제 영성은 그들이 집전하는 성찬례 안에서, 그 회중의 충만한 참여에서, 공동체의 삶 안에서 성찬례를 실현하면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사제들을 초대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왕국에 우리를 온전히 의탁하게 하는 예배와 기도 안에서 성별(축성)되고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선택된 민족, 왕다운 사제,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백성”(미사통상문 연중주일 감사송 1)으로 하느님 앞에 선다. 회중과 함께 회중을 위해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사제는 공동체 안에 구현된 하느님의 구원과 교회의 삶 안에서 성찬례가 갖는 강력한 효과를 접한다. 성찬례의 구성 요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세례 받은 신자들의 사제적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불가분한 실재를 이룬다. 본당신부로서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현존의 이 상호 관련된 차원을 살아내는 것이다.

 

전체 교회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표지이다. 그리고 이 큰 성사인 (교회 안에서) 주교와 신부 역시 성사이다. 사제직은 지금, 여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착한 목자의 현존에 대한 독특하고 강력한 표지이다. 곧 사제직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이 아니다. 그것은 성사적 현존이다. 전례의 집전자로서 사제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품성사를 받은 사람은 잘 훈련된 기술자 이상의 존재이다. 교회에 대한 가톨릭적 이해의 핵심에는 성사적 통찰이 놓여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제는 단순 기능인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그 존재만으로도 공동체에 영향력을 주는 성사적 인격이다.

 

사제는 공동체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표지이고 참된 현존이기에, 인격의 성화는 아주 중요하다. 사제는 전례를 잘 집전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재현하는 목자의 모습으로 직접 변화됨으로써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회중의 규모가 커지고 사제 수가 계속해서 감소함에 따라, 성사적 현존, 상징적 행위들, 개인적 증거를 통해 교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중추적 교역자로서 사제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이 증가할 것이다. 사제 교역의 성사적 이해는 사제의 신원과 행위의 상징적 특성을 강조한다. 사제는 상징적인 말과 행위를 통해서 전체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권고하고 힘을 준다.

 

사제품을 받은 교역의 이런 성사의 영성은 교회 안에서 목자, 예언자, 사제로서의 그들의 임무를 증명하는 성덕으로 초대한다. 사제들은 그들이 서품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표지가 되고자, 타고난 재능, 혼란과 대립, 이보다 더한 것들을 다룰 수 있는 비전과 확신, 용기를 지닌 지도자, 경청하는 사람, 일치시키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제는 오늘날 착한 목자가 되는 길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다루면서 거룩해진다. 착한 목자가 된다는 것은 긴 회개의 과정이다. 성품성사로 이미 존재하는 은총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

 

사제는 신자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언젠가 어느 본당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사회자의 실수로 내가 예수회 신부로 소개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 교구 사제임을 강하게 주장한 적이 있다. 말을 하고 나서 나는 내 말에 힘이 실려있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나는 새롭게 발견된 수도자들의 은사를 오랫동안 부러워했다. 반면에 교구 사제는 특징 없는 평범한 일꾼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번갯불처럼 나를 때리는 분명한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했다. 교구 사제는 교회의 사명의 핵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독특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제가 되도록 평신도 중에서 선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남녀 평신도 공동체를 지도하고, 평신도의 사명과 영성에 교역의 초점을 맞추도록 선택되었다.

 

평신도는 세상 안에 머물고 거기서 그들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하느님을 찾고 성화된다. 교회와 세상은 평신도 안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만난다. 하느님의 일과 세속의 일은 평신도의 삶 안에서 모인다. 평신도의 봉사 없이 교회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의 외적 지향에서 평신도는 본질적인 역할을 하고, 평신도의 봉사자로 그들 속에서 살아갈 것을 선택한 성직자들은 여기에 큰 책임을 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과 이후의 신학적 발전을 이해할 때, 교구 사제 또는 재속 사제의 은사가 평신도의 사명과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하찮은 일이 아니다.

 

평신도와 교구 사제의 상황은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양자는 모두 세속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세상 안에 머물기를 추구한다. 양자는 일상의 불가예측성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공의회 후 수년 동안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그들과 그들의 사명에 적절한 영성을 발견하고자 노력해 왔다. 본당의 성직자도 이와 유사한 것을 추구하여 왔다. 교구의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책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느님을 추구하는 데는 공통의 환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수도자와 수도 공동체들의 은사는 세상을 순례하는 본당신부들과 평신도 공동체들에게 필요한 종말론적 전망과 귀중한 통찰력, 필요한 지원을 제공한다. 나는 신학과 예수회의 영성 수련, 트라피스트회의 관상 기도를 배우고 익혔는데, 이에 대해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 현실의 우여곡절 속에서 영성생활을 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수도회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배치된 환경에서 하느님을 찾는 길이 있는 반면에, 하느님을 멀리하도록 하는 세상의 무질서와 혼란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찾는 방법도 있다. 여기서 본당의 성직자와 신실한 신자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평신도에게 잘 봉사하려면, 사제들은 평신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가정, 문화, 경제, 정치 세계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교구 사제는 그가 비록 성인이 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추구하는 평신도를 돕기는 힘들다. 사제는 가정을 갖거나 사업을 하거나 직접적인 정치 행위를 하도록 불리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들에 무지한 사제는 평신도를 위한 그들의 교역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다. 교구 사제는 하느님의 일에 대해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인간의 현실도 잘 알아야 하고,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사제 자신의 영성생활과 그가 봉사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지 인식해야 한다.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삼위일체의 신비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상호 협력은 오늘날 본당 사목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먼저, 상호 협력은 새롭고도 혁신적인 것으로 효과적인 리더십과 심리학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다. 만일 상호 협력에서 우리의 태도가 실용적인 가치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로운 역동성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서방교회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지성적이거나 사변적인 접근에만 치중해 왔다. 한 분 하느님 안의 세 위격은 풀리고 설명되어야 하는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심지어 그것이 논리적 모순으로 나타낼 때조차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커다란 신비였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의식은 전례와 신자들의 영성 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중요한 것은 이를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열심히 따르고 실천해야 할 거룩한 신비로 본다는 점이다. 교회생활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동등한 세 위격으로서 서로 구별되지만 상호 관련된 방식 안에서 하나의 구원 사명을 공유하는 사랑의 친교인 것처럼, 교회 또한 다양하지만 상호 관련된 방식으로 같은 사명에 참여하는 동등한 인격체들의 친교이다. 우리의 신관(神觀)은 사제의 교역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준다. 하늘에 거하는 외로운 노인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는 홀로 자신의 교역을 수행하고 권위를 행사하는 사제상을 낳는다.

 

협력을 통해 교역을 수행하려는 의지는 하느님의 내적 삶과 은총이 어떻게 부여되는지에 대한 이해에서 자라난다. 만일 은총이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시라면 우리가 은총에 충실한 생활을 하려 할 때, 상호 협력적인 것 이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본당 신자, 직원, 사목자로서의 우리의 임무는 삼위일체의 은총을 구현하는 것이고, 조각난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삼위일체의 은총의 힘을 증언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추구에서 사제의 독신생활은 그가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사제를 고립시키는 생활방식이 되거나, 아니면 덜 복잡한 생활방식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여건을 제공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독신생활은 수도자의 은사가 되어왔는데,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단순한 삶의 방식으로 이를 권장한 바 있다(1고린 7,25-35). 독신생활이 사제의 마음속에서 생성시키는 공허함은 사제를 차갑고 냉담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고, 하느님을 영접하고 신자들을 불러모으는 환대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에게 독신생활은 훨씬 더 구체적인 것이다. 독신생활은 인간적 애착, 친교, 사랑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체험하게 하는 넓은 범위의 교회적 관계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성숙한 독신생활을 영위하는 본당신부들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게 함으로써 영적으로 풍성해지고 거룩해진다. 독신생활이 더욱 효과적인 것이 되려면 소유욕, 탐닉, 자기 중심성을 거두고 자신 안에 가난과 비움의 공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묘사할 때,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를 활용한다(요한 15,5). 그리고 마더 데레사는 이를 통해 포도나무의 모든 아름다움과 결실이 그 가지에서 드러남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그분의 아름다움과 결실을 드러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셨다. 사목자가 교회의 삶 안에서 아주 다른 중요성을 갖는 한, 마더 데레사가 얘기한 이미지는 본당신부들에게도 역시 적용될 수 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내가 사목자로 있었던 모든 본당의 신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들은 나의 결실이고 나의 기쁨이다. 내가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봉사한 것은 무한한 은총이었다. 나는 그들에 대해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 원문 : Donald B. Cozzens(ed.), “Servant of the Servants of God: A Pastor’s Spirituality”, The Spirituality of the Diocesan Priest, The Liturgical Press, 1997년, 1-19면, 엄재중 기자 편역. 로버트 슈바르츠 신부는 미국 사제평생교육을 위한 전국 기구 의장이었고, 미네소타의 성 토마스, 성 바오로 대학에서 영적 지도자로 일했다. 저서로는 『하느님 백성의 종으로서의 지도자:미국 사제들을 위한 교회적 영성』(Servant Leaders of the People of God: an Ecclesial Spirituality for American Priests)이 있다.

 

[사목, 2004년 11월호, 로버트 M. 슈바르츠(미국 미네소타 주 존 노이만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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