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노인사목] 본당에서의 어르신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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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2-23 ㅣ No.316

나의 사목 체험담 - 본당에서의 어르신 사목

 

 

“늙은 사람을 괄시하지 마라. 우리 또한 늙어가지 않느냐? 노인들의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그들도 조상들로부터 배웠다. 네가 그들에게서 현명함을 배울 것이요 적절히 대답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집회 8,6.9).

 

 

노인문제가 문제다

 

국제연합(UN)에서는 65세 이상을 ‘노령’이라 하고 노령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7%이면 고령화 사회, 14%이면 고령 사회, 그리고 20%이면 초고령 사회라고 규정하였습니다. 1860년 중반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령화 사회가 된 프랑스는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가 되는데 115년, 이웃 일본은 24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19년 만에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접어들게 되어 벌써부터 노인문제 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노인문제’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의 어르신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셨습니까? 도대체 자식들을 기르느라 온 생애를 바치신 분들, 이 땅의 조국 근대화를 위하여 모든 고난을 이겨내신 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편히 모시겠다는 생각은 없고 마치 치워버려졌으면 좋겠다는 발상에서부터 시작하니 그것이 더 큰 문제이지요. 

 

어쩌면 이 사회가 도무지 위아래가 없고 점점 더 흉악스러워지는 것도 윗분 섬기는 모범과 교육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젊은이들은 지극히 이기적으로 자신만 생각하고 버릇이 없어집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이제껏 자식 걱정과 자식 교육에 주안점을 두느라 어르신들에 대한 배려와 효행에서는 부족했습니다. 교회에서마저도 어르신들의 교육은 거의 없었으며, 언저리에서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가정에서도 어르신들은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성서대학을 시작하다

 

보좌신부 시절, 주임신부님의 명으로 할머니들의 단체인 안나회 회합에 참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도 겨우 열렸던 회합이었는데, 먼저 회장 할머니가 시작기도를 하시고 출석을 부르십니다. 잘 듣지 못하시는 분은 몇 번씩 반복하여 부르시고, 조금 시끄러우면 조용히 하라고 몇 번씩 다그치시기를 거듭하여 일흔 분이 넘는 분들을 모두 부르는 데는 족히 30-40분이 걸렸습니다.

 

이윽고 새로 온 보좌신부를 소개하셨습니다. 저는 약 2분 정도 간단히 소개하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마침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한 달에 한 번 출석 부르는 것이 전부인, 그 꼴 같지(?) 않은 회합 때문에 그토록 멀리서 그것도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시고 높은 언덕 위 성당까지 올라들 오셨던 것입니다.

 

그 꼴 같지 않은 회합이 바뀔 수 있도록 배려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너무도 분하고 속이 상했습니다. 이 땅의 어르신들은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해방의 기쁨을 잠시 맛보았을 뿐, 또다시 민족상잔의 쓰라린 6·25 전쟁을 체험하셨고,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등 민족 격동기를 헤쳐 오셨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유신독재의 체험 등을 치르시며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사셨는데, 이제는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니 집안에서도 자식들이 내다버리는 처참한 꼴을 보셔야 하고, 성당에서마저도 찬밥 신세가 되셨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주임신부님께 졸라 어르신들을 위한 성서대학을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곳에서 참고서적을 구하여 책을 만들고, 글을 모르시는 어르신들도 재미있게 색칠공부를 할 수 있도록 먹지를 구해 성서 그림을 베껴 교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르신 성서대학이라는 명칭으로 학생들을 모집하였더니 백 명 가까운 어르신들이 함께하셨습니다. 대학을 나오신 분들부터 초등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까막눈의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학력을 갖춘 분들이 모이셨습니다.

 

그 뒤 십이 년째 성서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해가 갈수록 깨닫는 것은 우리 어르신들이 성당에서는 가장 기쁘게 공부하시는 분들이며, 제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주시는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학력 차이가 그토록 크게 나는 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과목은 성서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성서공부이기에 대학을 나온 분이나 글을 모르시는 분들이 모두 함께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서를 공부하지 못하신 것은 모두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이 가장 기뻐하셨던 성서공부는 그림을 색칠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 내용으로 꾸며진 밑그림에 색칠을 하시면서 모든 분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이런 것을 다 해볼 줄이야!” 하시며 연방 동심의 세계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게다가 가방까지 준비해 드리니 학교에 다니시는 기쁨도 만끽하셨습니다.

 

 

성서대학이 가져다준 변화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가정에서의 변화였습니다. 늘 보아오던 어머니는, 또 할머니는 우두커니 앉아계시든 텔레비전을 보시든 표정에 생동감이 없으셨는데, 성당에서 성서공부를 하시면서 변화를 보이셨습니다. 무엇인가에 몰두하시어 열심이신 모습을 처음 보기에 가족들도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가르치는 저 자신도, 가족들도, 나눔과 실천의 과제를 통하여 조금씩 변화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도 차츰 해소되고 있다고 가족들이 증언해 주었습니다. 

 

보통은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수업을 하였습니다. 한 시간은 강의를 하고, 나머지 한 시간은 그림 색칠하기, 나눔, 숙제, 문제 풀기 등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눔의 시간(식사시간)은 꼭 필요한 듯싶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한솥밥, 한 식구 개념이 뿌리 깊게 내려있어서 식사시간은 그야말로 잔칫집의 기쁨을 연상케 합니다. 처음에는 음식을 준비하시는 젊은 자매님들이 힘들다고 불평도 하셨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분들 역시 희생의 큰 보람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면서 봉사하시는 자매님들도 잔칫집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한몫하셨습니다. 점심식사 조 편성에 따라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수고를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수학여행에서 성서대학원까지

 

어르신 성서대학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모습들, 변화되는 모습들을 끊임없이 발견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게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전에 있었던 본당에서는 학기마다 한 번은 꼭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명동성당과 평화방송을 견학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수원 가톨릭 대학교와 아산만을 관광했는데, 신학교 교수 신부님께 짧은 성서 강의를 부탁드린 것도 성과가 좋았습니다.

 

신학교를 방문하게 되면 주변 관광지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대전 가톨릭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에는 한국과학기술원과 독립기념관을, 인천 가톨릭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에는 인천국제공항, 월미도, 강화도 성지순례 등을 함께했습니다. 모든 여행이 그야말로 어르신 성서대학 ‘수학여행’이 되었고, 어르신들의 새로운 기쁨은 두 배로 더 커졌습니다. 작은 본당인데도 그 모든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교우들과 가족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름방학 때에는 어르신들에게 알맞은 방학숙제를 내드렸습니다. 물론 모든 어르신들이 빠짐없이 숙제를 제출하셨습니다. 개학이 그리워지는 성서대학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2학기에는 단풍놀이나 작은 운동회 등을 개최하였는데, 그러한 행사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에게서 동화 속 미소를 뵐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쁜 성서공부를 끝내고 정들었던 본당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에는 이웃 대학교에 부탁하여 어르신들 숫자에 맞게 졸업 가운과 사각모를 빌렸습니다. 그래서 멋진 졸업사진도 찍었습니다. 단체 사진도 찍고, 개인 사진은 훗날 영정 사진으로 쓰시도록 크게 찍어 액자에 넣어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떠난 뒤에도 성서공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성서대학원(?)을 마련하였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계실 모습을 상상하면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였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그렇게 시작한 어르신 성서공부가 이제는 수많은 본당에서도 실시되고 있어 이 땅의 어르신들께 작은 생의 보람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성서대학 다양하게 꾸미기

 

어떤 본당에서는 여름방학 때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신앙학교를 어르신들에게 적용하여 실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성탄 무렵에는 어르신 성서공부 반에서 각 반마다 준비한 성극을 발표하여 어르신들의 재능을 뽐내고 계신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봉사하시는 자매님들과 본당 수녀님들의 체험 사례는 기쁨 그 자체입니다. 어르신들이 아름답게 변화하는 모습이나 기뻐하시는 삶이 봉사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르신 성서공부를 하다 보면 의외로 글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시대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글을 모르시는 분들도 실망하시거나 열등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글을 모르시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닌, 우리 시대의 희생양이며 그 큰 희생 때문에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글을 모르시는 어르신들을 위하여 새로이 한글반을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성서공부와 별도로 또 다른 한글반을 만들어 가르쳐드렸더니 성서공부가 끝나갈 무렵 대부분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앞을 못 보시던 분들이 새로이 눈을 떠 새 세상을 보게 된 것과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성서공부만 하는 것이 무료하다 싶으면 한 달에 한 번 특활수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특별수업 강사로는 지역에 계시는 그 누구도 초빙할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의 오락, 율동, 소창 수업, 국악하시는 선생님들의 국악 강의, 재주 많으신 수녀님들의 종이접기, 찰흙공예, 미용사 선생님의 미용 강의, 의사 선생님의 건강 강의 등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주변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초빙할 수 있는 선생님들입니다. 군인, 경찰, 청소부, 식당 조리사 등도 훌륭한 일일 강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만 할 수 있는 어르신을 위한 프로그램 찾기

 

그런데 많은 도시 본당에서의 노인대학은 흥미 위주의 오락 프로그램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없는 본당에 비하면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지만 실제로 지방 자치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많은 대도시와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앞 다투어 어르신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교회가 따라갈 수 없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당은 그들이 제공할 수 없는 또 다른 배움의 길을, 삶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서만큼 귀중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성서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 성서공부를 시작하면서 줄곧 느낀 것은 어르신들과 삶의 기쁨, 하느님의 가르침, 인생의 정리 등을 나누면서 저도 배운다는 생각입니다. 

 

성서공부도 따분하고 어렵게 느끼시지 않도록, 성서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드려, 살아있는 말씀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어르신들이 기쁘고 쉽게 성서에 맛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자주 서점에 들렀습니다. 매달 쏟아져 나오는 아름다운 예화집이나 유익한 이야기책들은 실로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성서공부의 보조자료가 되어 어르신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큰 구실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성바오로 딸 수도회와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제가 가르쳤던 성서공부 교재를 구약, 복음, 사도행전에서 요한 묵시록까지 세 권의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어르신은 내일의 나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믿음은, 이 일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본당은 안 된다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도 열악한 본당에서도 이 일을 시작했고, 제가 사목하던 본당보다도 더 작고 어려운 본당에서도 훌륭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여기저기에서 듣습니다. 오늘의 어르신들의 모습은 내일의 내 모습입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의 신앙교육도 교회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긴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어르신들에게는 그분들이 슬프게 겪으셨던 참혹한 과거에 비하여 보상받으셔야 할 시간이 너무도 짧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신다면 제가 그랬듯이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명쾌한 해답에서 힌트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한국 천주교회의 여건으로 볼 때 이 일은 반드시 본당 주임신부님들께서 앞장 서야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다면 미리 시작해 보았던 소인에게 문의하시면 좋겠습니다. 친절히 답해 올리고, 찾아가서 시작이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본당의 어르신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의 삶에 주님의 참된 신명(神冥)이 가득하시길 축원하여 봅니다.

 

[사목, 2005년 1월호, 배광하(춘천교구 게쎄마니 피정의 집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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