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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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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문화비평: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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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91

[문화비평]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요 근래에 참으로 유쾌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를 봤다. 바로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이다. 베테랑 중년 배우인 잭 니콜슨과 다이앤 키튼의 연기력으로 더더욱 즐거웠던 영화다. 특히 에리카(다이앤 키튼 분)가 해리 샌본(잭 니콜슨 분)에게 사랑의 상처를 입고, 울다가 글을 쓰다가, 또 울다가 글 쓰다가를 반복하면서, 희곡을 완성해 가는 장면은 사랑에 상처입은 여인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의 줄거리

 

부유한 독신남인 해리 샌본은 20대의 젊은 아가씨들만 사귀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플레이보이다. 미모의 경매사인 마린과 오붓한 주말을 보내려고 마린 엄마의 해변 별장에 놀러간 해리는 성관계를 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신세가 된다. 나이를 잊고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이다. 동생 조와 주말을 보내려고 별장에 온 마린의 엄마 에리카는 엉겁결에 해리의 건강이 좋아질 때까지 그를 돌봐줘야 할 처지가 된다. 저명한 희곡작가이며, 강인하고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이혼녀 에리카는 한창 나이의 딸이 남성 우월적인데다 나이도 훨씬 많은 남자와 사귀는 걸 못마땅해하며 은근히 해리를 경멸한다. 그러나 단둘이 며칠을 지내면서 같은 연배인 두 사람은 조금씩 친구가 되어가며 묘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한편 해리의 주치의인 젊은 미남 의사 줄리안은 평소에 흠모하던 희곡작가 에리카를 만나자 나이가 20여 년 정도나 차이가 나는데도 그녀에게 매료되고 만다. 줄리안의 저돌적인 구애에 당황하는 에리카. 해리는 묘하게도 줄리안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에리카는 자신이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늙은 여자가 아닌가? 게다가 아직 성관계까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딸과 한창 사귀던 중이었기에 해리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에리카 역시 줄리안보다 해리에게 끌리는 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자신의 엄마와 남자친구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 챈 마린은 깨끗하게 해리와 끝낼 것을 선언하고 해리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또다시 별장에 둘만 남은 해리와 에리카. 어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간 둘은 실로 오랜만에 몸과 마음을 충족시키는 아름다운 성관계를 나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유로운 독신생활을 즐겨온 해리는 자신에게 ‘정조’를 기대하지 말 것을 선언하고, 에리카는 해리와 자신의 기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뒤늦은 나이에 실연의 상처로 아파하게 되는데……. 해리 또한 에리카를 사랑함을 느낀다. 그러나 오랜 플레이보이 기질에 익숙해진 해리는 에리카의 상처와 행동에 당황하다가 끝내 자신이 지금껏 만난 여자들을 찾아가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 여인인 에리카를 만나러 파리로 가는데…….

 

 

하느님과의 사랑에서도 갈등은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어떤 부분을 상대를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해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리가 에리카를 사랑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양 영화의 풍속도가 거의 그렇듯이 해리는 에리카와 성관계를 하고는 사랑에 빠진다. 사실 이 부분은 신자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다. 여하튼 다만 동서양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자.

 

해리는 심장발작 중에도 힘든 성관계를 무사히(?) 마친 것과, 더구나 무엇보다도 행복할 정도로 흡족했다는 것에 처음엔 어리둥절해한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몇십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늙은 여인인 에리카에게 묘한 감정이 생겨나는 해리는 스스로의 감정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갖게 된다. 더구나 에리카에게 접근하는 주치의인 젊은 미남 줄리안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도 놀랍다. 그러나 젊은 여인들과 즐기며 살아온 독신자인 해리는 에리카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무척 편한 여인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해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에리카가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에리카는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해리를 용납할 수 없다. 이러한 팽팽한 긴장관계는 해리에게 다시 심장발작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그 심장발작은 어쩌면 해리 안에서의 싸움이다. 심장발작은 에리카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해리가 겪는 내적 갈등의 외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남녀간의 사랑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의 삶에서도, 하느님과 갈등구도에 놓이게 된다. 그냥 액세서리처럼 신자생활을 한다면(플레이보이로서의 해리처럼) 그러한 갈등은 적겠지만, 진정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그것은 ‘사회의 가치’와 ‘신앙의 가치’의 충돌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사회의 가치에 어느 정도 젖어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느님은 다른 가치를 들이대시며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 마치 에리카와 사랑에 빠지는 해리처럼…….

 

하느님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해리가 그랬듯이 자신의 방식을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심장발작을 일으킨다.

 

 

신앙생활에서도 ‘과거 여행’이 필요하다

 

갈등에 빠진 해리는 ‘과거 여행’을 시작한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 안에서 만난 사랑스런(?) 젊은 여인들을 만나보는 것이다. 해리는 몇 개월의 과거 여행을 통해 스스로가 자기도취에 빠져 여인들을 상대해 왔음을 느낀다. 몇몇 여인들은 해리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지만, 대부분의 여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해리는 신사였지만, 과거의 여인들에게 냉대를 당한다. 여인들의 무엇을 유린한 것일까? 해리는 여인들과 만날 때, 진지하고, 매너 있고, 품위 있게 대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결여된 만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져 갈등의 구도에 놓이게 되면, 우리에게도 과거로의 여행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다. 성찰의 시간이다. 해리는 수 개월 동안 과거 여행을 통해 만났던 젊은 여인들이 보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비록 상대 여인에게 매너 있게 행동했었지만, 해리는 자신의 방식에 취해서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반드시 옳고, 좋은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사회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나에게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좋은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고, 반면에 돈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은 짐승처럼 취급당하는 사회방식이 진정 인간의 존엄성에 걸맞은 방식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한 사회방식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참된 인간의 모습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이 돈과 명예를 활용하는 주체인지, 아니면 돈과 명예가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주체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존중하셨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홀대받고 버림받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창녀가 그랬고, 세리 짓을 한다고 민족의 배반자인 양 취급받던 자캐오에게 베푸신 은혜는 순간 자캐오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하느님의 방식은 그래서 우리의 방식과 다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지 않는 한, 우리는 사회의 그릇된 가치 속에서 노예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돈을 활용하는 주체이고, 자신의 힘으로 권력과 명예를 움켜잡았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살아간다지만, 그것은 해리가 자신의 가치관으로 젊은 여인들을 유린한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단적으로 해리가 부유하지 않았다면, 젊은 여인들이 거들떠보기나 했겠는가?

 

해리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다가, 에리카와의 사랑이 계기가 되어 과거 여인들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과거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다. 곧 자신의 삶의 방식을 타인들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해리가 과거 여인들과 직면하였듯이, 자신의 모든 모습에 진지하게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성찰의 시간이 있어야 해리처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여인인 에리카를 파리의 식당에서 찾아낸 해리는 지난 수개월간 겪은 자신의 과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에리카와의 만남 속에서 공유한 사소한 것들이라도 그것은 서로를 알게 하는 요소였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서로가 공유한 시간과 생각, 가치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해리는 에리카에게 사랑을 고백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식탁에 등장하는 젊은 의사 줄리안과 만나게 되고, 그 둘이 함께 파리에 왔음을 알게 된다. 자리를 일어나려는 해리를 붙잡는 두 사람. 세 사람은 즐겁게 식탁에서 만담을 나누며 식사를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찬찬히 보면, 에리카는 젊은 의사와 대화할 때보다는 해리와 대화할 때 더 유쾌하게 웃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계산서를 읽으려고 해리와 에리카는 안경을 꺼낸다. 각자의 품 안에서 나오는 안경은 상대방의 안경이었다. 안경을 맞바꾸는 그들의 모습에서 영화의 결말을 향하는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식당을 나온 줄리안과 에리카는 택시를 타고 그들의 숙소로 가고, 해리는 길을 걷다가 다리에 서서 에리카와의 만남이 너무 늦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런 해리에게 택시에서 내려 다가오는 에리카. 에리카는 해리에게 말한다. “줄리안이 그러더군요. 내가 그보다는 당신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같은 관점을 지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년에 만들어진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도 이와 같은 관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 영화는 12년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두고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를 거듭하며 우여곡절 끝에 우정을 바탕으로 참된 사랑을 찾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이다. 개봉 당시 솔직하면서도 건강한 신세대 미국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그려내 신선한 충격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 영화에는 여섯 쌍의 노부부들의 결혼 이야기가 곁들여져, 인간의 다양한 사랑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우정으로 다져간 끝에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고서야 결합하는 젊은이들의 진지한 자세가 아름답게 보인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가치관 때문에 싸우다가 헤어지고 몇년 뒤 우연히 만나기를 반복하다가, 서로 남녀의 차이를 발견하고 인정함으로써 우정을 키워나가던 두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결혼과 사랑, 남녀간의 우정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남녀간의 사랑과 하느님과의 사랑은 같은 점이 있다

 

에리카와 쥴리안, 에리카와 해리의 관계를 보면서 사랑에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사랑의 관계란, 먼저 공유하는 것이 많을수록 더 친밀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사랑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할 때, 사랑은 깨지기 십상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작업에는 반드시 자신을 내어주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를 참으로 아프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으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겠는가? 더구나 그 외아들은 2000년 전 현실에 오셔서 가장 고통받고, 아파하고, 냉대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 신의 권능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무지와 이기심에 찬 인간의 희생제물이 되셨다. 이러한 내어줌으로 당신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그런 것처럼…….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아까운 것을 버려야 사랑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소중한 것을 영영 잃어버린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사랑은 더 소중한 것을 얻게 하니까…….

 

이 여름에 유쾌하지만, 진지한 묵상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소개했다. 시간이 된다면, 이제 고전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곁들여서 보아도 좋겠다.

 

[사목, 2004년 7월호, 황광우(꼰벤뚜알 프란치스꼬 피정의 집 책임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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