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문화의 복음화2: 구시대적 문화개념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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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237

문화의 복음화 (2) 구시대적 문화 개념을 버려라!

 

 

1. 왜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한가?

 

지난 호에서는 한국 교회가 현재 겪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서 문화의 복음화가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였다. 이번 호는 문화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문화의 복음화 이념과 실천도 달라진다. 더 나아가 문화의 복음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시대의 문화 개념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필요하다.

 

문화를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시대, 장소, 사람에 따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카멜레온처럼 변하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에서는 고유한 민족 문화가 대접을 받았지만, 오늘날 세계화된 정보 사회에서는 맥도널드와 코카콜라와 같은 ‘글로벌 문화’나 국적이 없는 ‘혼성 문화’가 유행한다. 성직자들 가운데 연령이 높을수록 성음악이나 성미술과 같은 고급 문화만을 문화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또는 문화를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라고 바람직한 진술을 하는 성직자라도 실제 사목 현장에서 신앙과 삶을 연결시키는 문화적 실천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의’와 ‘대화’를, 199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복음화’와 ‘문화’를 새로운 용어로 수용해 왔다. 현재 교회 내에서 문화가 새로운 중심축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의 복음화’, ‘죽음의 문화’, ‘생명의 문화’ 또는 ‘영성 문화’ 등 다양하게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문화는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사상이나 예술적 표현, 또는 의식적인 인간 발전을 뜻하고 있다. 과연 문화의 영역은 정신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과 삶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숨어 있는 통제 메커니즘으로서의 ‘문화 권력’이라는 알맹이는 놓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비록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어렵지만 다각적인 접근을 통하여 문화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본적인 문화 이해에 접근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에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것이 문화의 영역이다.” 이것은 매우 포괄적인 문화 개념일지 모르지만 일단 문화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점차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으로 정리될 것이다. 우선 문화가 이 시대에 새로운 중심축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신데렐라가 된 문화

 

20세기 말까지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에 따른 냉전 구도를 견지해 왔다. 이 당시에 문화는 마치 부엌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데렐라와 같았다. 그녀의 가치는 소수에게만 인식될 뿐이었지 공적 영향력은 별로 없었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이데올로기 투쟁에 가려 못생긴 자매인 정치와 경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유라는 요정이 찾아오고 근대성의 종말을 경축하는 연회에 역사라는 왕자가 초청했을 때 비로소 문화라는 신데렐라는 빛을 보게 되었다.

 

문화가 부상하면서 사람들을 빈번히 갈라놓는 가치관의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서 문화는 의미나 가치를 생성하기 때문에 문화의 다양성은 결국 의미 투쟁이나 가치 충돌로 이어진다. 국제 정치학 교수인 사무엘 헌팅톤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의 지배적인 원천이 되는 것이 문화”1)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는 일상에서 미시적으로,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거시적으로 문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쉽게 경험한다.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이, 2002년은 우리 사회에서 세대 간 문화적 차이와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한 해였다. 지난해 6월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수백만의 거리 응원, 최근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한 대규모 촛불 시위, 그리고 대선에서 20-30대의 위력은 사회적 중심축과 권력이 기성 세대에서 신세대 문화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 사건들이었다.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가치관과 아날로그 문화를 살아온 기성 세대와 수평적이고 쌍방적인 가치관과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신세대 간에 사회적 헤게모니를 거머쥐려는 끊임없는 문화 투쟁 또는 문화 전쟁인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다시 써 왔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을 필두로 문화의 새로운 개념과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특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문화가 우리의 운명이 달린 매우 중요한 영역임을 자주 언급해 왔다. 교황청은 1982년에 ‘문화평의회’를 설립하였고, 1999년에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이라는 문헌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국 가톨릭 교회 역시 문화의 복음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2002년에는 교구로서는 유일하게 인천교구에서 ‘문화복음화원’을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는 ‘문화 사목을 위한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문화의 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아직까지 미약한 움직임이지만 점점 확산될 수 있다고 기대된다.

 

 

3. 문화의 개념

 

문화는 단순히 한 가지로 정의되기 힘들기 때문에 여기서는 역사적, 교회적, 신학적, 그리고 성서적인 네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문화는 여러 단계에 걸쳐 의미가 변화되어 왔다. 교회적으로, 시대에 따라 교회는 문화를 달리 보아 왔다. 신학적으로, 문화는 종교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성서적으로, 문화는 구원사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1) 역사적 고찰:윌리엄즈의 다섯 단계

 

제 1 단계: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것

 

영어 culture의 어원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행위”(1983년, 87면)로써 농경 사회에서의 작업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문화는 자연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간은 편리한 삶을 위해 자연을 가공하여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문화 환경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대부분이 너무 인위적이고 인공적이기 때문에 자주 가정과 일터를 떠나 자연을 찾고자 한다. 또한 자연은 희소 가치로 변하면서 상품화되고, 자연의 시뮬라시옹(모사)조차 보편화되고 있다. 농경과 관련된 문화 개념이 인간의 삶에 적용되면서 두 번째 의미를 낳게 된다.

 

제 2 단계: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 발전의 일반 과정”2)으로 인간 본성을 구현하는 핵심이 된다. 이 개념은 서구의 계몽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계몽주의의 완성이 곧 문화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인식되면서 유럽 중심적 문명화가 득세하게 된다. 문화는 문명이라는 개념과 연결되거나 혼용되고, 서구 중심의 진화론적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유럽 문화만 유일한 문화로 인정하고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 사건 배후에 탈레반 정권이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된 이후 미국은 서구 대 이슬람의 대결 구도로 압축시켜 ‘선 대 악’, ‘문명 대 야만’, ‘진보 대 보수’, ‘자유 대 억압’이라는 흑백 논리에 따른 이데올로기를 CNN과 같은 글로벌 매체를 이용하여 다른 국가에 전파함으로써 은연중에 서구 문화 논리를 강요해 왔다. 이러한 문화 제국주의적 태도는 서방에 우호적인 대부분의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에 의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며 제3세계의 언론들은 이것을 다시 재생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방 언론들은 ‘탈레반 정권 아래 여성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되는 현실’과 전쟁 후 그와 같은 ‘억압된 현실에서의 여성 해방’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 전쟁을 정당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보도의 모습은 단순히 탈레반의 여성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선악 대결을 그림으로써 미국에게 ‘슈퍼맨’의 지위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유럽 중심주의적이고 문화 제국주의적 태도는 문화 인류학적 관점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제 3 단계:‘문화’에서 ‘문화들’로

 

문화는 “특정 민족이나 시대, 집단이 공유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3)이라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저마다 각기 다른 역사를 거치면서 고유한 삶의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고 보기 때문에 단 한 가지만의 유일한 문화를 주장하는 대신에 다양한 문화, 서로 동등한 문화의 존재를 인정한다.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정착은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원칙이 되고 있다. 특정 문화의 우월성이 허용되지 않고, 다만 문화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화 인류학적 개념은 일차적으로 모든 학문 분야에서 그리고 실천 분야에서 토착화 작업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 왔다. 서구 문화의 침투로부터 전통적이고 고유한 민족 문화를 보호, 육성하려는 제3세계의 노력이 이론과 실천의 토착화 과정으로 표출되었다. 오랜 기간 서구 세계는 비서구 세계의 발전에 관해 시간적 차이만 인정하였을 뿐, 공간적 또는 지역적 차이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 4 단계:사회와 동떨어진 순수한 영역

 

문화의 개념은 지배 계급의 의식 생활과 연관되어 점차 그 계급이 누리는 예술 분야를 가리키게 되었다. 곧 문화는 “지적, 특히 예술적 활동의 산물이나 실천”4)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부문인 음악, 무용, 연극 등 구체적인 장르를 지칭하는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문화는 일반적으로 특별한 예술 행위들과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심미주의적 문화관에는 자연스럽게 상류 또는 고급 문화적인 시각이 내포되어 20세기에 들어와 고급/저급 문화로 양분되는 계급 문화 간의 갈등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클래식이나 오페라 공연을 가는 것은 고상한 취미이고, 대중 음악 공연을 가는 것은 수준이 낮다는 사고는 개인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발상이고 대중 문화는 하류층의 문화라는 고정 관념이 만들어 낸 편견이다.

 

제 5 단계:의미화의 실천

 

마지막으로 문화의 개념은 편협하고 고착된 의미에서 벗어나 우리의 일상사, 그리고 상징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문화는 하나의 사회적 질서가 반드시 그것을 통해 전달, 재생산되고 체험, 탐구되는 의미화 체계이다.”5) 따라서 문화는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의미화 실천이다.

 

코드, 기호, 상징, 브랜드, 이미지는 현실을 해석하는 의미 체계들이다.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미 체계들의 계열은 의미 투쟁을 통해 생성 소멸한다 유행은 문화의 변동 과정이다. 가치관끼리도 서로 투쟁한다. 문화는 의미 투쟁의 장이다. 따라서 문화는 권력과 자본을 수반한다. 문화를 통해 권력이 형성되고 유지되며,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진다.

 

인간과 인간 관계, 집단과 집단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투쟁이 문화적으로 해석되고 해결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초장부터 며느리의 기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한 시어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불렀다. “새아가! 나는 긴 말하는 거 싫어한다. 손가락을 이렇게 까닥하면 오라는 신호니까. 그리 알고 잽싸게 오너라!” 이에 대해 며느리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예, 어머니. 저도 긴 말하는 거 싫어해요. 제가 이렇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못 간다는 신호니까 그리 아세요.”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얼마큼 변화되었는지 잘 알려 주는 이야기이다. 전통적인 ‘시집살이 문화’도 지속되고 있지만 반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며느리 살이 문화’도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곧 당대의 가치관의 변화이다. 이제 일상 안에서 우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남과 여, 자본가와 노동자, 교사와 학생 간에 가치관의 혼돈 또는 문화의 충돌로 갈등과 대립을 수시로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다섯 단계의 변천을 통해 문화 개념이 하나의 문화만이 아니라 점차 여러 문화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고, 획일화된 문화가 갈등이나 경쟁을 야기하는 역동적 문화로 관점이 이동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문화 개념의 변천사를 통해 과연 가톨릭 교회는 문화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 왔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문제점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2) 교회적 고찰:가톨릭 교회의 기존 문화 개념과 비판6)

 

문화 개념의 변천사에 따라, 문화를 대하는 가톨릭 교회의 관점이 두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에 걸쳐 유럽 중심적, 인류학적, 그리고 고급 예술적 문화관으로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 유럽 중심주의적 문화관

 

과거 유럽 교회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교양이나 철학과 같은 좁은 영역만을 문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따라서 유럽만이 성숙하고 교양을 갖춘 문화를 향유하는 문명 사회로 인정되었고, 반면에 비유럽 지역의 문명들은 야만적인 자연 상태로 규정되면서 문화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근대 유럽 가톨릭 교회가 선교사를 비그리스도교 지역 또는 제3세계에 파견한 역사적 선례를 볼 때 유럽 중심주의적 선교 활동은 지역 문화가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유럽 문화가 강요되고 주입되었던 과정으로 이해되어 왔다.

 

예를 들어, 과거 한국 교회가 겪은 박해의 경우에도 그 원인이 한국 전통 문화와 천주교회의 문화 충돌 현상에 대해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동양 문화 경시와 단죄라는 교황청의 자세 때문이었음을 최기복 신부의 논문은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문화에 대한 제국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언어 사용이나 그 밖의 형태로 교회 안에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에 총본부를 두고 있는 수도회가 세계적 회의를 할 때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의 서구적 언어만을 사용할 뿐, 실제적으로 숫자상 월등히 많은 한국 수도회 회원들이 참석했는데도 한국어는 주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식민주의적 문화관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립 국가의 출현으로 쇠퇴되었지만 그것의 잔여 문화가 제3세계의 복음의 토착화 노력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곧 제3세계 교회에 대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화의 우위 상태는 교회 행정이나 법, 전례, 신심 행위 등 여러 분야에서 아직도 남아 있어서 지역 교회의 토착화 작업이 더욱 요청된다.

 

(2) 인류학적 문화관

 

가톨릭 교회는 유럽 중심적 문화관을 불식시키고 더욱더 폭넓은 문화 개념을 수용하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사목 헌장”을 통해 인류학적 문화관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례 헌장”은 새로운 문화관을 토대로 획기적인 전례의 개혁 내용을 담아내기도 했다.

 

“사목 헌장”에서 “‘문화’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다양한 자질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을 가리킨다.”(53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의 문화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다양한 문화가 전제되고 있다. 이러한 인류학적 개념은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제도에서 각 인간 공동체에 고유한 전통, 또는 각 민족과 시대의 사람들이 속하는 역사적 특정 환경이 형성됨을 전제한다. 문화는 유럽의 문화만이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 문화도 존재한다. 다수의 문화를 논할 수 있는 이 관점은 현대 사회의 시대적 감각을 역행하는 기존의 유럽 중심적 문화관을 벗어나 복음의 토착화가 제대로 논의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한 셈이다.

 

“전례 헌장”에서는 전례의 토착화를 실천하는 면에서 라틴어 대신에 모국어 사용을 허용하였다. “미사 또는 성사 집전 또는 전례의 다른 부분에서 드물지 않게 모국어의 사용이 백성에게 크게 유익할 수 있으므로, 더 많은 여지가 거기에 부여될 수 있다”(36항). 모국어의 사용은 미사에 참여한 회중들을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면에서 다른 사람, 지역, 종교의 문화를 인정하고 대화를 모색하려고 했던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인류학적 관점은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있지만 ‘문화가 무엇을 하는 것인가?’라는 상징적 차원에 대한 관심은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이 관점은 민족적이고 고유한 문화를 강조한 나머지 최근의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서 지구 문화와 지역 문화가 서로 섞여 변용되는 대중 문화의 역동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과거에 축적되고 유산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 문화나 민족 문화를 바탕으로 신학, 전례, 복음 등 여러 영역에 대한 토착화 작업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고정되어 있거나 이미 형성된 문화를 단순히 사용하는 ‘수동적 수용자’인 경우도 있지만 문화를 생산하고 창조하는 ‘pro-sumer(producer + consumer)’로도 살아 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구성원들을 수동적인 문화 수용자로만 보지 말고 문화를 선택하거나 만들어 내는 ‘문화 생산자’로도 보아야 한다. 토착화 작업도 이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 곧 대중 문화를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며, 그럼으로써 개인과 집단에서 숨어 있는 미시적인 문화 권력을 인식하고 올바로 배치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3) 고급 예술 문화관

 

최근 이 관점이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일 것이다. 교회 안에서 문화를 논할 때 흔히 성음악, 성미술, 성당 건축 등을 일컫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화는 성속 이원론(聖俗二元論)의 사고방식에 따라 거룩함을 표현하기 때문에 고급 문화로 분류되고 그것의 생산자와 향유자는 특정 계층 또는 엘리트층으로 제한된다. 자연적으로 대중 문화는 무지한 대중이 즐기는 것이고, 내용이 저속하고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저급 문화 또는 하류 문화로 분류된다. 사실 가톨릭 교회는 대중 문화를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편협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로 예술과 일상 생활 간의 경계가 소멸하고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의 경계가 무너졌다. 고급 문화가 문화 산업에 힘입어 대중화되었고, 대중 문화는 일상 생활의 미학화로 고급 문화를 지향하는 상호 작용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KBS1 TV의 “열린 음악회”라는 대중적인 음악회에서 고전 음악을 전공한 성악가가 대중 가요 가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른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광고와 어우러져 새로운 광고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고급 브랜드를 통한 소비자의 사회 신분 상승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명품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 음식 문화는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닌 “좀 더 맛있는 것을 즐기며 먹는” 풍조가 늘어나고 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식탁은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음식 색깔과 향기, 그릇 배치, 테이블보 무늬, 조명 질감, 주변 장식과의 조화 등을 고려해 음식을 차려 조형 예술로 변해 가는 추세이다. 이제 대중 문화에 대한 엘리트적인 평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과거와 달리 일상화된 대중 문화에 대해 교회는 더 이상 고급 예술 문화관에 안주할 수 없다. 신앙과 영성이 자라고 열매 맺을 자리는 일상을 둘러싼 문화 환경이다. 교회는 오늘날 지배적인 문화인 대중 문화를 더 이상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거부하지 말고, 더욱더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하여 복음적 실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신학적 고찰:문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

 

(1) 왜 문화 신학이 필요한가?

 

한국 가톨릭 교회로서는 ‘문화 신학’이라는 말이 매우 낯설다. 우리가 아는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이지 문화를 다루는 신학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문화에 대해 신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종교와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교회는 막강한 문화적 영향력을 국가와 사회에 행사해 왔지만,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세속화 현상에 의해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문화적 역할에 있어 규범과 가치를 매개했던 독보성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위축되면서 신학에서는 ‘문화’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다. 문화 개념은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나가서, 교회와 대립되어 있는 모든 형태의 현상들을 대면하게 해 주는 열쇠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학이 이렇게 문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교회와 세상과의 내적인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7)문화는 분명 교회와 사회를 매개시켜 주는 다리 역할을 수행한다. 매스미디어 문헌인 “일치와 발전”(1971년)에서도 “매스미디어는 가끔 교회와 세상 간의 유일한 지름길일진대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리는 셈이다.”(123항)라고 역설하고 있다. 문화의 교회에 대한 중요한 역할을 인식한다면 문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2) 문화 신학의 이해

 

문화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분과로서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계, 더 넓게는 문화와 종교의 상관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다.8) 문화와 종교의 관계는 성과 속, 문화 이념에 대한 신학적 비평, 신앙의 토착화, 신앙의 문화 예술, 상징 문제, 그리고 다양한 종교 간의 대화를 담고 있다. 문화 신학의 개념과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인데, 그 이유는 문화 개념 자체의 포괄성과 다양성에서 유래한다.

 

인간은 문화 활동과 예술적 행위 안에서 초월을 경험하고 또 표현한다. 문화가 궁극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며, 문화의 각 장르는 종교적 계시의 훌륭한 매개체, 담지자가 된다. 문화신학자 틸리히의 “종교란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란 종교의 형태이다.”라는 명제는 매우 유명하다. 본질적으로 종교란 인간 정신 기능의 한 특수한 영역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적 삶 전체의 “깊이의 차원”이기 때문에 종교 신앙은 문화적 삶의 현상과 활동 전 영역과 관련된다.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 문화 신학은 과거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그리스도교적 비전이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에서 왜 그 의미를 상실해 왔는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 신학의 과제는 유명한 신학자 버나드 로너간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문화 변동이 신학의 의제 설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학은 문화적 틀과 그 틀 안에 있는 종교의 의미와 역할 사이를 중재한다.”9)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현대 세계는 “믿음의 위기가 아닌 문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강조한다.10)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환경에서 문화 신학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실천이 요청되고 있다.

 

4) 성서적 고찰:문화적 시각에서 본 구원의 역사

 

(1) 문화의 근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자연 상태에 있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11) 이제 인간은 죄의 결과로 땅을 개간하는 노동의 수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문화 개념이 나타난다.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창세 3,23). 땅을 가는 행위가 곧 문화의 어원에 해당된다.

 

(2) 문화의 발전과 반성

 

카인과 아벨은 각각 농군과 목자로서 ‘농경 문화’와 ‘유목 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두 형제의 갈등과 살인 사건은 두 문화 간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농경 문화의 우월성을 암시하고 있다. 뒤 이어서 노아 사건은 상당히 발전된 농경 문화 속에 썩어 가는 인간 문화들에 대해 홍수라는 자연을 통한 하느님의 응징을 기술하고 있다. 바벨탑 사건은 매우 발달된 기술 문화와 도시 문화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집단적 물신화라는 죄의 대가로 언어 문화의 다양화라는 하느님의 응징이다. 이 사건은 인간이 만들고 생산한 문화에 대한 반성의 소재를 제공한다.

 

(3) 새로운 문화로서 계약의 역사의 시작

 

하느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계약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계약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몸소 당신 백성 안에 일으키신 문화의 발전에 대한 역사이다”(「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 1999년, 3항). 아브라함이 받은 부르심은 매우 의미가 깊은 것이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창세 12,1). 그러고는 그에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해 주신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은 고향의 이교도적 지역 문화에서 즐겨 왔던 ‘모든 문화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문화적 단절은 새로운 땅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문화의 시작을 뜻한다. 곧 신앙과 문화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신앙의 토착화 과정으로 형성된다.

 

(4) 지는 문화와 뜨는 문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계약의 역사는 야곱과 에사오 형제 이야기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에사오는 사냥꾼으로서 수렵 문화를, 야곱은 유목, 농경 문화를 대표한다. 두 형제 간의 관계는 두 가지 문화 간의 공존, 갈등, 투쟁을 시사하는 것이며, 장자권 이양으로 낡은 형태는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 시대인 야곱의 시대가 옴을 보여 준다. “에사오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창세 25, 33).

 

이 이야기의 배후에는 콩 등 작물을 재배하고 양을 치는 유목, 농경 문화가 사냥을 주로 하는 수렵 문화를 능가했다는 문명의 발전 단계가 내포되어, 농경 문화의 경제적인 우위가 뚜렷이 드러난다. 수렵 문화에서 유목, 또는 농경 생활로 공동체의 형태가 바뀌면서 에사오로 대표되는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대두되는 변화를 알려 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을 계승하는 후계자로 야곱을 선택하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 자유이며 은총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인간 역사를 이끄시고 주도하시는 분이시다.

 

현 교회 역시 에사오가 맏아들로서 장자권을 당연히 상속받는 시대를 보내 왔다. 교회는 에사오의 수렵 문화와 같이 문자 문화, 생산과 노동의 문화,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교회는 계속 상속권이 맏아들에게 있다는 구시대의 사상과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다. 수렵 문화가 농경 문화로 바뀌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듯이, 교회도 문자 문화나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통해 행해 온 복음화와 사목의 형태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

 

(5) 요셉의 해몽과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 현상의 비판

 

처음에 요셉은 은전 30량에 이집트로 팔리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요셉을 선택하여 해몽의 대가로 이끌어 주신다. 요셉의 꿈은 미래지향적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현재에 대처하는 것이다. 미리 알기 위해 꿈을 정확히 해석해야 한다. “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복된 말씀을 일러주실 이는 하느님뿐이십니다.”(창세 41,16)라고 고백하는 요셉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늘 깨어 있던 요셉과 같은 인물들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

 

인간의 꿈은 현실화되고 있다. 정보화, 디지털화로 모든 사회 체제와 인간이 서로 거미줄처럼 네트워크화되어 있으며, 인터넷과 인공 위성은 시공간을 압축시키면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넘나드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요셉의 꿈에 나타난 풍작과 흉작의 현상은 고도로 발달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인류에 대한 유익성과 해악성이라는 양면성의 메타포이다. 요셉이 꿈의 해몽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언적이며 합리적으로 대처했듯이, 오늘날도 신학적 반성을 통해 새로운 문화 현상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판단하고 윤리적 차원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후기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서 각종 이미지와 기호로 혼합된 문화적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미래를 건설하는 데 올바른 방향과 대처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자세는 현 교회 안에서 복음화와 사목의 영역에서 대단히 요청되는 것이다.

 

(6) 율법 문화의 일상적 파시즘을 깬 예수

 

예수님 시대를 지배하던 틀은 유대주의였다. 유대주의는 일부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소수를 위한 문화,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지닌 지배 문화를 형성하여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배 문화의 코드가 율법과 예언서였으며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인간을 정한 자와 부정한 자, 선인과 죄인으로 구별하고, 더 나아가 인간 차별로 이어지면서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압박할 수 있는 권력 수단이 되어 버렸다. 당시의 율법주의는 궁극적으로 ‘일상의 파시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는 율법이란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인간의 필요와 진정한 관심사에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마르 2,27). 예수님께서는 권력화된 율법주의자들, 지배와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사회적 안전망으로 유지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기존 문화의 단절과 새로운 문화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유일회적 사건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통해 기존 문화에 대한 식별력 기준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그 문화의 비판과 정화, 그리고 대안으로의 새로운 문화 창조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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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muel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 Foreign Affairs, Vol. 72, No. 3, 1993년, 22면.

2) J. Baudrillard, “Ecstasy of Communication”, The Anti-Aesthetic : Essays on Postmodern Culture, Ed., H. Foster, Pot Townsend, Washington : Bay Press, 1983년, 90면.

3) 위와 같음.

4) 위와 같음.

5) I.A. Sch뾨el, Trenta Salmi:Poesia e preghiera, Bologna, 1982년, 13면.

6) 필자는 “가톨릭의 기존 문화 개념 비판”을 「사목」 245호(1999.6.), 57-59면에서 이미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그 내용을 다소 수정하여 좀 더 깊이 있게 보완하였음을 밝힌다.

7) 최인식, 「다원주의 시대의 교회와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년, 158면.

8) 김경재, 「문화 신학 담론」, 대한기독교서회, 1997년, 25면.

9) 버나드 로너간, Method in Theology, Darton, Longman &Todd:London, 1972년, 11면.

10) 버나드 로너간, Collection, ed F.E. Crowe, Darton, Longman &Todd:London, 1967년, 266면.

11) 에덴 동산이 완전 자연 상태로만 보여질 수는 없다. 물론 아담과 이브는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았지만 하느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아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임으로써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28)

 

[사목, 2003년 2월호, 김민수(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서울대교구 신수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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