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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문화의 복음화3: 아직도 생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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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238

문화의 복음화 (3) 아직도 생소합니까?

 

 

지난 호에서는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이 시대에 교회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인식해야 할 적합한 문화의 개념은 '의미화의 실천'이다. 상징, 기호, 코드, 이미지 등이 이제는 자본과 권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의미나 가치를 내포한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이나 집단의 해석에 따라 여러 의미나 가치로 생성될 수 있다. 이 과정이 '의미화' 또는 '의미의 생성'이다. 따라서 하나의 상징, 기호에 다양한 의미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의미의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투쟁이 바로 문화 권력을 획득하려는 헤게모니 실천이다.

 

예를 들어, '교회'라는 기호에 대해 성직자와 평신도 간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는 시대가 되었다. 무의식 중에 '제도적 교회관'에 따라 성직자 중심주의나 권위주의를 실천하는 성직자들은 '친교와 봉사의 교회관'을 선호하며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평신도들과 갈등과 마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최근 몇몇 본당에서 발생했던 사례나 인터넷이라는 온라인(on-line) 상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논란처럼 '성직자 대 평신도'의 갈등과 대립의 구도는 서로 간의 다른 가치와 의미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1) 과거에는 하향적이고 획일적인 사목 실천에 바탕이 된 성직자 권위주의가 평신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나, 현재는 성직자의 권력에 대해 평신도의 끊임없는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평신도는 더 이상 '병신도'가 아님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 자각은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쌍방향 관계 구조를 먹고 살아온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역시 자신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의미 생산자로 전환하기 시작한 과정의 산물이자 그 원동력이다.

 

문화는 고급 문화관, 관념론적 입장, 문화 인류학적 입장을 뛰어넘어 상징, 기호, 코드 그리고 이미지 등을 통해서 항상 변화하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의미 생성 내지 의미화의 실천으로써의 문화는 분명 의미의 투쟁 장소가 되어 있다. 교회 안팎으로도 문화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한 '문화 정치'2)가 존재한다. 교회는 성직자나 평신도, 남성이나 여성, 백인이나 흑인, 기성 세대나 신세대, 지배 계급이나 피지배 계급 누구에게나 인간 존엄성에 입각하여 동등하고 공평하게 권력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사회적 관심], 42항)이라는 기본적 노선에 따른 권력의 분배를 위해 한층 더 노력해야 한다.

 

이제 이 시대에 적합한 문화 이해의 틀을 바탕으로 문화 복음화의 개념에 대한 개괄적인 서술을 행할 단계이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는 '문화의 복음화'라는 용어의 사용과 확산이 최근의 일이라 아직도 생소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다. 더군다나 '전교'나 '복음 선교'(선포)라는 용어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교회로서는 '복음화'라는 말의 인식 수준이 아직 걸음마 단계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우선적으로 복음화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수반된 다음에 문화의 복음화에 대한 개념 및 방법론을 서술하고자 한다.

 

 

1. 복음화의 이해

 

1) 선교인가? 복음화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루가 4,43 참조) 의무가 있다. 곧 복음 선교는 교회의 근본적인 소명이며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 교령"을 통해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2항)라고 천명한 바 있다. 또한 이 교령은 선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 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활동을 일반적으로 '선교'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개념은 근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몇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3) 첫째로,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식민지주의가 끝날 무렵에 '선교'가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주의와 때로 해로운 방식으로 보조를 맞추어 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로써 선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둘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타종교들에 대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현대 신학은 하느님의 구원 은총이 비그리스도교인에게도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로, 선교사들이 백인 그리스도교 국가에 종속된 영토로 서구 열강의 대사나 대표로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나라마다 외국 선교사를 유럽 국가의 대사나 대표로 받아주지도 않고, 또한 방인 사제나 수도자들의 증가로 외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점차 줄어 왔다. 선교에 대한 이 같은 부정적 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는 1975년에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를 통해 '복음화'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마틴 웨핑(Martin Ueffing)4)에 따르면, 복음화와 선교가 상호 공존하기도 하며, 넓은 의미에서 복음화가 선교의 내용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주교 대의원 회의뿐만 아니라 [현대의 복음 선교]와 [교회의 선교 사명](1991년)은 이러한 관계를 명백히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는 '복음화'와 '선교 활동'을 명백히 구분하여 사용하였는데, 교회 사명의 일반적인 의미로서 '복음화'를, 특별히 선교 활동으로서 '선교'를 사용하였다.

 

2) 복음화의 차원

 

사회가 시공간의 제한 속에 유지되던 과거의 복음화는 단순히 비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교세 확장과 수적인 팽창에 주된 목적을 두었지만, 정보화와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시공간의 압축'(time-space compression)5)과 '시공간 거리화'(time-space distantiation)6)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의 복음화는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분화되고 있다. 새로운 사회 체계가 생겨나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따라 일상 세계가 재구성되면서, 교회는 복음의 통시성에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양화된 복음화의 부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화의 다양한 차원은 복음화의 활동 영역과 지향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1) 복음화의 활동 영역

 

[교회의 선교 사명](33항)은 복음화의 관점에서 복음화의 활동 영역을 세 분야로 구분하고 있다.

 

① 외방 선교:아직 그리스도와 복음이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여 그들의 환경에서 신앙을 가꾸거나 다른 집단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가 선교 활동을 전개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외방 선교적 복음화는 일차적으로 복음을 뿌리 내리게 하는 선교적 과정이다.

 

② 사목적 선교:적합하고 견고한 교회 구조를 갖추고 신앙과 생활에 열성적이고 자기 지역에 복음의 증거를 확산시키면서 보편적 선교 의무를 느끼는 교회 공동체가 있다. 여기서의 교회 활동은 주로 사목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사목 실천 자체가 선교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③ 새로운 복음화(재복음화):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진 나라들과 일부 신생 교회들 중에는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렸거나, 때로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서 유리된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새로운 복음화 또는 재복음화가 요청된다.

 

외방 선교는 교회 외적인 활동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사목적 선교와 새로운 복음화는 교회 내적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자가 밖을 향하는 '원심력'이라면 후자는 안으로 향하는 '구심력'에 해당된다. 자기 밖에 있는 타인의 복음화가 이루어지려면 '자기 복음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는 "교회가 전세계를 참으로 복음화하려면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교회 자체가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15항)라고 천명한 바 있다. 특히 세 번째로 언급된 새로운 복음화는 신학자들 간의 논쟁으로 그 개념에 있어서 상당한 편차를 지니고 있지만, 이 시대의 교회 쇄신과 오늘날의 새로운 사목을 위한 핵심적 개념이 될 수 있다.7) 교황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이 전래된 지 500주년을 기리는 뜻 깊은 기회에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복음화'의 시작을 선포하였다.8) 사실 이러한 복음화는 그리스도교적 전통 속에 살아온 서구 국가들에서 종교의 세속화와 도덕적 위기에서 비롯된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의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문화 안에 살아 온 유럽 교회와는 달리, 한국 교회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제시한 '새로운 복음화'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 왔다. 인천교구 소속 오경환 신부는 '새로운 복음화'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있다.9) 곧 외방 선교를 새 복음화로, 개인이나 교회의 회개와 쇄신을 재복음화로, 그리고 교회 밖을 향한 복음화로써 사회 복음화를 언급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의 '새로운 복음화'는 유럽 교회의 '재복음화'라는 의미보다는 '진정한', '참된' 복음화 또는 '참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교회로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새로운 열의, 방법 그리고 표현으로 실천하는 '새로운 복음화'인 '참복음화'가 다름 아닌 '문화의 복음화'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2) 복음화의 내용

 

복음화는 선포되는 내용에 따라 양적 선교와 질적 선교로 나눌 수 있다.

 

① 양적 선교:양적 선교의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28,19-20). 이러한 마태오 복음의 선교 명령은 말씀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데 강조를 두고 있다.

 

교회는 지속적 성장을 위해 외부에서 새로운 구성원과 집단을 입교시키도록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현대의 복음 선교], 19항)을 자신의 고유한 사명과 의무로 여긴다. 복음화의 활동 영역 중에 '외방 선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선교의 내용은 자연스레 개인의 영혼 구원에 집중되어 왔다. 교회의 필요성은 개인 구원을 위해 있다고 보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교회관이 지배적이었다. 이 교회관에 따르면, 하느님 은총은 오로지 세례를 받은 자들만 받을 수 있다.

 

직접적인 선교로써 외적인 교세 확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에 이의가 없다. 한국 교회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신자 증가의 현저한 둔화 상태에 놓이면서 양적 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과거의 '기다리는 교회'를 탈피하여 직접 '찾아가는 교회'로 변신하면서 가두 선교나 거리 선교의 형태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양적 선교는 복잡하고 다원화된 이 시대에 그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가) "거리 선교는 씨를 뿌리는 것일 뿐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라고 가두 선교단 지도 신부인 이판석 신부는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리 선교는 생활과 동떨어진 교의적 예비신자 교리 형식과 내용, 새 영세자 관리의 미비, 재교육 프로그램의 부족 등 열매를 거두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질적 복음화와는 연결되지 못해 그 실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거리 선교로 500여 명을 입교시킨 놀라운 선교의 성과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다시 미사 참례자 수가 예전과 같아졌다고 하면서, 참으로 오묘한 신비라고 어느 본당 신부가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 양적 선교는 공간과 장소의 고유성과 다양성보다는 동질성과 획일성에 강조를 두는 편이다. 공간과 장소는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과거, 체험과 기억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은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복음이 문화와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양적 선교는 서양인이나 동양인, 남자와 여자, 기성 세대와 신세대, 한국인 근로자와 외국인 근로자, 상층 계급과 서민 계급이라는 차이에 따른 고유한 상황과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복음의 토착화가 거론될 여지가 없다. 다) 양적 선교는 지나치게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차원이 배제된 개인 구원관은 신앙의 역사성이 무시된 초월성에 치우쳐 상선벌악의 신관과 교회 중심주의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예수는 없다](2001년)의 저자 오강남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근본주의적 태도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주의적이며 종교적 제국주의에 대해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② 질적 선교:요한 복음은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중개 기도 속에서 질적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17,21-23).

 

여기서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믿음 사이의 관계성이다. 복음 선포의 진정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서로 일치하는 데 있다. 삶 안에서 사랑, 용서, 평화, 나눔 등을 실천함으로써 일치가 이루어질 때 신앙은 구체화되고 육화되는 것이다.

 

[현대의 복음 선교]는 이 점을 좀 더 명백히 하고 있다.

 

복음 선교의 목적은 이 내적 변화의 성취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복음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8항).

 

이처럼 질적 선교는 개인, 단체, 교회의 쇄신이라는 '자기 복음화'를 포함한다. 신자 개개인이 복음을 투철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따르는 관심의 부족, 교회의 지나친 세속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전통적 사목 형태, 신자 재교육의 미흡, 교회의 폐쇄적인 권위주의 등이 오늘날 복음화의 내용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신앙인과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을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되도록 변화시키려는 '사회 복음화'도 여기에 속한다. 요즘 시대가 급변하면서 첨예화되고 있는 환경, 복지, 생명, 언론, 통일 등의 현안 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비판, 저항하고 나아가 대안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질적 선교에도 함정은 존재한다. 교회의 수적 성장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거나 신앙 실천의 역사성에 몰두함으로써 세속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양적, 질적 선교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보다는 이 둘을 동시적이고 상호보완적 관계로 볼 때 올바른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2. '문화의 복음화'에 대한 개념화

 

'문화의 복음화'는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적합한 선교와 사목의 형식이며 내용이다. 그것은 양적, 질적 선교에서부터 외방 선교, 새로운 복음화, 사회 복음화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복음 선포를 함축하는 용어이다. 이 시대의 선교와 사목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문화의 복음화임에도 이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개념화 작업이 한국 교회에서는 전무한 실정이다. 세계 가톨릭 교회 차원에서조차 일부 교회 문헌에서 문화의 복음화를 언급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이해보다는 부분적이고 구시대적 개념에 머물러 있다.10)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면서, 필자는 문화의 복음화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시도해 본다. 문화의 복음화를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문화적 접근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문화의 복음화는 세 가지 차원, 곧 '문화에 의한 복음화', '문화를 통한 복음화', 그리고 '문화에 대한 복음화'를 동시적이며 포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전체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1) 문화에 의한 복음화

 

문화의 복음화는 복음 선포를 주도하는 주체적인 문화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곧 주체가 되는 문화에 의해 복음화되는 차원을 '문화에 의한 복음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주체적이고 지배적인 문화는 '교회 문화'이다. 교회 문화는 성음악, 성미술, 조각, 교회 건축, 철학, 신학, 문학 등의 형태를 띠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전통적이고 주요한 역할을 해 왔음을 교회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문화는 전통적인 선교의 내용이며 형식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교회 문화에 의한 복음화가 탈근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성전, 유명한 중세 예술가들의 성화와 전례 음악 등은 신앙과 구원으로 인도해 줄 만큼 압도적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유럽의 전통적인 교회 문화는 획기적으로 비유럽 세계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토착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실,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와 조우하는 가운데 신앙의 틀 안에서 그 문화를 수용하였고, 더 나아가 교회 문화로 전환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Ecclesia)는 원래 "불려 나온 사람들" 또는 "불려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며 "백성들의 집회"의 뜻을 지닌 세속적인 그리스 용어를 신앙 안에서 토착화시킨 말이다. 그러나 세속적 에클레시아는 정치적 집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들의 모임이며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모임을 뜻하는 종교적 에클레시아와는 분명히 다르다.11) 이를테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의 세속적 모임을 설명하는 언어를 자신들의 신앙 모임을 개념화하는 데 전용하면서 토착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비유럽 교회들의 유럽 교회 문화에 대한 토착화가 요청되어 왔다. 한 예로써, 교회 내 문화 부문 관계자들은 한국 교회가 유럽의 종교 문화를 교회 문화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국 교회 안에서 민족적 전통과 정서에 뿌리내린 한국 가톨릭 문화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신앙과 복음의 토착화 작업을 추진해 왔다. 그 작업은 한국 가톨릭 문화 형성에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왔지만, 아직도 신앙 생활의 토착화 작업은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전례 음악에서부터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가톨릭 용어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종교를 서양 종교로서 낯설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상황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전통 문화와 한국 교회의 관계가 역사적 의미에서 한국인의 가톨릭 신앙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면, 대중 문화가 교회의 현재와 미래 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통 문화가 어제의 우리 선조들이 신앙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면, 대중 문화는 오늘의 사람들이 신앙을 해석하고 살아가는 데에 점차 큰 변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정보화와 멀티미디어 시대에 걸맞게 첨단 기술과 매체를 활용하는 대중 문화 영역에서도 토착화를 통해 교회의 정신이 담긴 새로운 교회 문화가 창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새로운 토착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대중 문화 또는 전통 문화의 토착화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교회 문화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선교와 사목을 이끌어 갈 수 있다. 현재까지 교회는 전통 문화의 토착화에 많은 시간, 인력, 재정을 투자해 왔지만, 사실 우리 삶의 지배적인 문화인 대중 문화의 토착화에는 거의 무관심한 실정이다.

 

2) 문화를 통한 복음화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를 통한 복음화' 또는 '문화와 함께하는 복음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문화를 복음화의 수단과 방법으로 인식하면서 지배 문화 또는 기존의 문화를 선용하는 복음화이다. 이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는 대중 문화이다. 대중 문화는 일상 세계에까지 침투하여 총체적인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 문화 없이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의사 소통, 정체성의 형성과 유지, 인간의 욕망과 쾌락 충족, 자본과 권력 실천이 불가능하다. 또한 대중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그것의 상징, 기호, 코드가 변하는 통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 사람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대중 문화가 복음화를 위해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 사목 훈령인 [일치와 발전](1971년)에서는 교회가 매스 미디어를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사회 커뮤니케이션이 가끔 교회와 세상 간의 유일한 지름길일진대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리는 셈이다(123항) ......현대 매스 미디어의 장점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명령을 충실히 지킨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126항).

 

대중 문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매스 미디어는 위의 문헌에서 강조하듯이 복음 선포를 위해 선택의 여지 없이 반드시 활용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선물"12)이다. 사목자나 평신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명이다. 문화를 통한 접근은 미디어 환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다. 특히 영상 매체는 이 시대에 새로운 언어로 자리매김하여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사고의 패턴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한편의 영화, 드라마 또는 다큐멘터리 등에서 깊은 감명과 함께 간접적으로 복음적 가치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극, 음악, 영화, 비디오, 정지 영상, 동영상 등이 교리 교육이나 전례, 강론에 사용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로써 대중 문화는 특히 신세대인 청소년들과 쉽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대중 문화의 활용은 환경, 복지, 생명, 사회 정의, 민족 화해의 영역에서 사회 복음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이러한 영역들에서 문화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의식화 교육과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는 사회 복음화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을 무시하고 대중적이고 획일적으로 실행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개인의 다양성과 상대성이 고려되면서 일상의 문화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계발되고 있다.

 

3) 문화에 대한 복음화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를 복음화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문화에 대한 복음화'로 나타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 문화 또는 대중 문화는 밭에서 "밀과 가라지"(마태 13, 24-30)가 자라듯 우리 삶에 유익한 면이 있는 반면,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해로운 가치관을 제공하기도 한다. 대중 문화는 우리 몸에 좋은 밀과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가톨릭 사회학자인 앤드류 그릴리(Andrew Greeley)는 "대중 문화는 하느님을 만나는 신학적인 장소, 곧 하느님을 경험하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고 배우는 기회를 제공한다."13)라고 주장한다. 대중 문화는 참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장소이며 길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다루면서 7성사가 담고 있는 인생길을 보여 주기도 한다.

 

대중 문화는 반면에 가라지와 같은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시장 원리에 따라 상업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성을 상품화하거나 폭력을 미화하는 경향이 짙다. 더 나아가 권력화된 언론은 잘못된 사회 여론이나 조작된 의제 설정 등의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허위 의식을 유포하기도 한다. 오늘날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각종 문화물(특히 대중 문화물)들은 시장 경제 및 경제 논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최대의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복잡한 장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으로 대중 문화는 성의 상품화, 물질주의적 가치관, 비인간화를 더욱 조장하는 죽음의 문화를 양산하는 역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 환경이 오염되고 부패될 때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정화의 노력이 바로 문화에 대한 복음화 작업이다. 이 점에 대해 [현대의 복음 선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가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 넓은 지역에서 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19항).

 

곧 복음화는 비신자의 입교로 교세를 확장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문화 환경이 죽음의 문화로 변해 갈 때 여기에 대한 정화의 노력 역시 복음화의 내용임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화에서 중요한 점은 "복음화가 문화를 마치 겉치장하는 것처럼 장식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의 깊은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복음화하는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20항).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교회는 기쁜 소식을 제시함으로써 문화 속에 현존하는 죄를 고발하고 죄에서 문화를 해방시킨다. 교회는 무가치한 것들을 단죄하고 그것들을 몰아낸다. 이렇게 교회는 문화에 비판적 요소를 제공한다.14)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직간접적으로 생명의 문화보다는 죽음의 문화를 지향하는 듯하다. 낙태, 안락사, 사형 제도, 지역 이기주의, 연고주의, 학력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한탕주의, 물질 만능주의, 외모 지상주의, 쾌락주의. 외국인이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주의 등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존재하고 있다. 대중 문화는 상징적 힘을 발휘하여 인간과 사회에 위에서 언급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나아가 확대 재생산한다. 교회는 이 같은 죽음의 문화 또는 '죽임의 문화'에 대해 예언자적 태도를 가지고 비판과 저항, 고발과 정화의 작업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의 문화라는 대안을 상황에 맞게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까지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를 복음화의 주체요, 도구로 보는 관점과 문화를 복음화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통해 정의되었다. 이 세 가지 차원은 현실적으로 서로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지 않고, 동시적이거나 혼합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대중 문화를 활용하거나 비판하는 과정에서 문화에 의한 복음화라는 새로운 토착화에 따라 교회 문화가 이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창조되고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세 가지 차원을 지닌 문화의 복음화가 올바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 문화 교육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교회나 그 구성원들이 복음화를 위해 문화를 잘 활용하게 하고, 대중 문화를 비판하는 식별력을 길러 주며, 교회 문화를 창조할 수 있도록 능동적인 문화 생산자로 길러내는 역할을 한다.

 

 

3. 문화의 복음화의 세 가지 근거

 

위에서 다룬 문화의 복음화에 대한 정의 및 개념 정리는 다음의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역사적인 근거에 의거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근거는 문화의 복음화의 당위성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1) 성서적 고찰

 

문화의 복음화는 다음의 두 가지 성서적 배경에 바탕을 깔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sion)이고, 다른 하나는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첫 인간에게 주신 '문화 명령'(the Cultural Mandate)이다.

 

'지상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남겨 주신 사명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라.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마르 16,15-18; 루가 24,46-49; 요한 20,21-23 참조). 이 명령은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가장 기본적인 복음 선포의 사명이다. 이 지상 명령 서술에는 보편적 성격의 내용들이 발견된다([교회의 선교 사명], 23항). "모든 사람에게"(마태 28,19),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마르 16,15), "모든 사람에게"(루가 24,47), "땅 끝까지"(사도 1,8) 사도들은 파견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유추 해석한다면 "온 세상"이나 "땅 끝"은 지리적 공간 개념으로서의 평면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 인종, 문화 등을 포함하는 입체적 삶의 공간이며, 모든 사람이란 성, 연령, 직업, 계층, 취향에 따른 다양성을 수용하는 개념이다. 입체적 삶의 공간과 그 안에서 영위하는 다양한 부류의 인간을 복음화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적 접근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문화의 복음화의 두 번째 성서적 배경은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28) 하신 하느님의 문화 명령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신 최초 명령으로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돌보고 책임 있게 계발하라는 요청이다.15) 관리, 계발, 그리고 재창조하는 행위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행위이다.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은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최초의 문화적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창세 2,19). 흥미로운 것은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홍수가 끝난 다음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문화 명령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너희는 많이 낳고 불어나거라. 땅 가득히 퍼져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9,7).

 

여기서 '정복하다', '부리다'는 말을 "서양에서는 착취와 정복의 뜻으로 해석하여 자연을 철저하게 이용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근대에 와서 서구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16) 정복과 착취는 오늘날에도 '제국주의' 또는 '신제국주의'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옹호하는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강대국들은 문화 제국주의나 방어적 제국주의의 형태로 제3세계 국가들과 이해 관계를 맺고 있다. 더 나아가서 최근에는 '합리성의 쇠감옥'17)에 빠진 기술 과학으로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죽음의 문화가 양산되는 결과를 빚어 왔다. 땅은 지상의 모든 것, 삶을 둘러싼 생활 환경을 말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땅에 대한 착취와 정복이 아니라 관리, 보존, 계발, 그리고 재창조하라는 책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문화적인 책임이다. 하느님의 생명이 담겨 있는 창조물을 잘 관리하고 계발하여 생명의 문화를 창조 또는 재창조하는 문화의 복음화야말로 하느님의 문화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 명령은 지상 명령의 배경이다."18)

 

2) 신학적 고찰

 

문화의 복음화의 세 가지 차원은 각각의 고유한 신학적 틀을 지니고 있다. '문화에 의한 복음화'는 '계시 신학'을, '문화를 통한 복음화'는 '대화 신학'을, 그리고 '문화에 대한 복음화'는 '해방 신학'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19)

 

(1) 계시 신학

 

하느님께서는 '위로부터' 단 한 번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해 오셨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문화는 인간의 구성물이기 때문에 약점이 있고 부차적이다. 따라서 고유한 복음의 빛으로 인간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적 형태로 문화가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계시적 접근은 문화에 의한 복음화를 촉진시킨다. 곧 전통 문화의 토착화를 통해 교회 문화가 창조된다. 또는 대중 문화에서 세속적 가치가 신앙의 견지에서 정화된 후 새로운 교회 문화로 토착화되기도 한다.

 

(2) 대화 신학

 

대화 모델에 따라, 오늘날 인간적 탐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밑으로부터' 출발한다. 깊이와 외관에서조차 문화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들음이 없다면 비현실적이고 관계없는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된다. 들음을 통한 대화의 자세는 '문화를 통한 복음화'에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다양하고 중층을 이루는 문화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들을 주의 깊게 경청함으로써 교회는 복음화를 위한 더욱더 효과적인 길을 찾게 된다.

 

(3) 해방 신학

 

해방주의자들에게 신앙은 투신과 실천을 통해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투신과 실천이 없다면 성서의 핵심적인 예언자적 소명을 불신하고 지구상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외면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해방 신학은 급진적인 문화 비판과 대안을 제공하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복음화'의 원천이 된다.

 

3) 역사적 고찰

 

(1) 외방 선교로서의 전교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재 정권 하에 억압과 조작의 대상으로서의 국민들이 존재했고, 경제적으로는 노동과 생산을 위주로 하는 대중 산업 사회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착취의 대상이 되어 개미처럼 일해 왔다. "잘살아 보세!"라는 근대화의 기치를 내세우며 근검 절약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근대화 과정과 맞물려 선교는 급속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한국 가톨릭 교회는 지난 70-80년대를 거치며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사회 정의 실천을 통해 복음화에 많은 기여를 해 왔다. 따라서 이 당시의 선교란 비그리스도인을 상대로 하는 외방 선교, 곧 양적 선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2) 전교에서 문화의 복음화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일인당 국민 소득 1만 달러라는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면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개인의 다양한 취향이나 자율적 선택이 허용되는 다원주의와 개인주의는 문화적 실천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노동과 생산보다는 여가와 소비를 위주로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권위주의보다는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평등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과거에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의 계급 투쟁으로 일관했던 사회 운동에 이제 성, 세대, 지역, 생명, 환경 등을 축으로 하는 '신사회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고 더불어 우리 사회가 시민 사회로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외적 성장에 따른 중산층화, 보수화의 길을 걸으며 이에 합당한 대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왔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쉬는 교우의 증가, 주일 미사 참석자의 감소, 그리고 신자 증가율의 감소라는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어 선교 사목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20)사실 전세계 교회는 제삼천년기의 문턱에서 새로운 문화 상황, 새로운 복음화 영역에 직면하여 있다. 과거의 양적인 선교는 광범위한 지역적 범위, 새로운 사회 현상, 문화 분야 또는 현대의 아레오파고에 관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교회의 선교 사명], 37항). 세계적으로 볼 때 모든 지역을 복음화시키기 어려운 이유는 다수가 되지 못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 지리적 방대함, 또는 문화적, 정치적 충돌과 제한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적극적인 양적 선교를 통한 가톨릭 신자 수의 증가가 이미 선교의 포화 현상을 보이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와의 세력 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구나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사회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노인,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장애인, 실업자, 가난한 사람, 피난민, 이주 노동자, 양심수 등의 소외된 계층과 집단에 대한 구원의 선포는 교세 확장을 지향하는 외방 선교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정보 사회에서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출현해 왔고, 문화를 통해서 자본과 권력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왔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복음 선포의 새로운 분야를 출현시켰는데, [교회의 선교 사명]은 이 분야의 상징으로 '아레오파고'를 언급한다. 아레오파고는 아테네 식자들의 '문화 현장'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그곳에서 그 지방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합한 말로써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7,22 - 32). [교회의 선교 사명]은 가장 첫째가는 아레오파고를 대중매체로 꼽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막대하여 문화의 복음화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밖에도 다른 아레오파고들에 대한 복음화를 수행해야 한다. 민족들의 평화, 발전, 통일, 해방, 소수 집단의 인권 옹호,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의 향상, 환경 보호, 국제 관계 등의 분야에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투신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여러 분야의 아레오파고의 복음화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질적 선교로써의 문화의 복음화가 이 시대에 필수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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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서울대교구 인터넷 굿뉴스의 자유 게시판에 게재된 글 하나를 소개해 본다. "이런 것이 사제의 힘?" ...... 저의 직장 생활에 미칠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고, 저의 본당에 해가 될지도 모르지만 알릴 것은 알려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제야 여러 선생님들께 우리 본당 소식을 전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현실이니까요. 엊그제, 그러니까 12월 7일. 우리 본당 중고등부 교사들이 13명 중 11명이 그만두게 되었답니다. 미사 시간에 말이지요. 우리 본당 보좌 신부님의 소개말과 학생회 친구들의 송사(보좌 신부님께서 적어 주신 듯한), 간단한 선물과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게 되었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우리 본당 보좌 신부님의 사목 목표에 따라 "새 술은 새 부대에......" 1:1 개인 면담을 통해 성탄절을 앞둔 상황에서 교사들에게 권고 사직을 명하신 것이랍니다. 보좌 신부님, 부임하신 지 3개월 되었답니다. 보좌 신부님이 새 술이라고 묵은 술인 교사들까지 새 부대에 담고 싶으셨나 봅니다. 작년에 서품 받으시고 첫 부임하신 본당에서도 교사들을 한판 뒤엎어 버리셨답니다. 심지어는 부제 때도 그러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 신학교에 처음 입학하면서 배우는 권위 의식, 특권 의식 말입니다...... ※`이에 대한 어느 교리교사의 답 글 ...... 글을 읽으면서 참 북받쳐 오르는 분노가 일어나네요. 전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여지껏 성당의 문제점은 사제의 권위주의였고 지금 가톨릭 발전의 가장 큰 저해 요인도 권위주의라고요......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게시일:2002.12.24, 번호:45908).

 

2) "누구의 문화가 공식적인 것이 되고, 누구의 것이 이에 종속되는가? 어떤 문화가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또한 어떤 것이 사회로부터 은폐되는가? 누구의 역사가 기억되고, 누구의 것이 잊혀지는가? 왜 어떤 사회적 삶은 그 이미지가 크게 투사되는 반면, 어떤 이미지는 변화되는가? 어떤 목소리는 들을 수 있고, 어떤 목소리는 왜 침묵을 강요당하는가? 누가 누구를 어떠한 근거로 표상화하는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문화 정치의 영역이 된다"(J. Jordan &C. Weedon, Cultural Politics:Class, Gender, Race and the Postmodern World, Blackwell, Oxford &Cambridge, 1995년, 4면).

 

3) 박금옥, [오늘의 복음화:회개, 친교, 전달], 가톨릭 교리 신학원, 28면; D. Bosch, Transforming Mission, 1991년, 363면; 김용기, [멀티미디어 시대의 복음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학원 석사 논문, 2000년, 4-5면 참조.

 

4) Martin Ueffing, SVD, "Evangelization and Mission:The Phluppine perspective and Beyond", Evangeliation and Social Communication, ed. Mario Saturnino Dias, St. Pauls, Bandra·Mumbai, 2000년, 66면.

 

5) '시공간의 압축'은 공간을 정복하고 통일시키는 운송과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기술에 의존한다. 넓은 지역에 전개되는 활동에 필요한 시간이 경이적으로 단축됨에 따라 실제로는 같은 규모의 공간일지라도 훨씬 작은 것으로 경험하게 되는 경향이다(데이비드 하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 박영민 옮김, 한울, 1995년, 295-316면 참조.).

 

6) '시공간 거리화'는 일상 생활의 범위가 지역적인 제한을 넘어 전지구적 규모로 확대되는 현상이다. 시공간의 분리로 근대 사회가 출현하고, 이것은 '탈맥락'(disembedding)의 전제가 된다. 탈맥락은 사회적 관계를 지방적 맥락으로부터 끌어 내어 광범위한 시공간상에 재구조화시키는 현상을 이끈다(Anthony Giddens, The Consequences of Modernity, Polity, Cambridge, 1990년, 21면 참조.).

 

7) 심상태, "새로운 복음화의 의미 연구," [한국 그리스도 사상] 제3집,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1995년, 166-202면.

 

8) 요한 바오로 2세,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연합회(CELAM) 정기 총회에서의 연설", AAS LXXXV, 1983년, 778면 참조.

 

9) 오경환, "새로운 천년대의 선교",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 기념 선교 심포지엄](1999. 8.21.),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9-15면.

 

10) [현대의 복음 선교](1975년)에서는 문화의 복음화가 오로지 '문화에 대한 복음화'라는 부분적 의미에 국한되어 있다(19항). 다시 말해서, 문화의 복음화 내용이 문화를 복음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정화시켜야 될 대상으로 국한시키는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를 객관적으로 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체적이고 과정적 측면도 복음화의 중요한 내용임을 교회 문헌이 간과한 사실은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문헌이 선포된 시기인 1975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대중 매체의 부정적 효과(예:대중 조작의 수단이나 유해한 내용 유포 혐의)에 많은 비판이 있던 대중 사회였던 만큼, 문화를 정화의 대상으로 취급한 문헌의 태도는 이해할 만하다. 또한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1999년)은 위의 문헌보다 좀 더 성숙한 문화 의식을 가지고 문화의 복음화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헌은 인류학적 문화 개념을 바탕으로 복음화와 사목에 접근하기 때문에, 최근에 문화 자본과 문화 권력 현상에 관련된 문화의 복음화 이해가 미비하다.

 

11)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분도출판사, 2000년, 62-66면.

 

12) Miranda Prorsus, AAS XXIV(1957년), 765면.

 

13) Andrew M. Greeley, God in Popular Culture, The Thomas More Association, Illinois, 1988년, 9면.

 

14)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연합회 제3차 총회, "푸에블라, 라틴 아메리카의 현재와 미래의 복음화", 1979년, 405항 참조.

 

15) 퀀틴 슐츠, [거듭난 텔레비전], 김성웅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1995년, 32면.

 

16) [보시니 참 좋았다:성서 가족을 위한 창세기 해설서], 성서와 함께, 2001년, 60면.

 

17) 고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유명한 용어이다. 지나친 합리성의 추구가 결국 비합리성이 되어 비인간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하시오. Lawrence Scaff, Fleeting The Iron Cage:Culture, Politics, and Modernity in the Thought of Max Webe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1989년.

 

18) 퀀틴 슐츠, 앞의 책, 31면.

 

19) 이하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여 유추 해석하였음. Michael Paul Gallagherm S.J., Clashing Symbols:An Introduction to Faith and Culture, Paulist Press, New York, 140-141면.

 

20)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2000년 12월 31일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 수는 전체 인구 4612만5376명 중에서 407만1560명으로 신자 수 400만을 돌파했고, 총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8.8%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자 수 증감률(전년도 신자 총수 대비 금년도 신자 총수 증감 비율)은 3.2%에 그쳐 98년 3.5%, 99년 3.8%로 소폭 증가세를 보이던 데서 다시 하락세를 보였다. 또한 통계에 따르면, 냉담자의 경우, 총 113만여 명(주소 확인 49만여 명, 주소 불명 64만여 명)으로, 1999년의 31.7%에서 1.7%가 늘어난 33.4%를 기록했다. 주일 미사 참례자는 전년도 29.5%에서 다시 0.5%가 떨어진 29%로 집계되었다.

 

[사목, 2003년 3월호, 김민수(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서울대교구 신수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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