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병원사목] 임종자에 대한 사목적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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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248

임종자에 대한 사목적 배려

 

 

1. 들어가는 말

 

신학과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로서의 인간에 대한 질문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나'는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물론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살아 있던 모든 이가 결국 죽어 가는 모습 속에서 확인된 진리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며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사건이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종말이나 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 존재하며 일상 생활을 통해 인간 존재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것이다. 곧 인간 삶을 에워싸고 있는 질병, 고독, 실패, 방치, 이별, 은퇴, 노화, 실직, 기아 등은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죽음의 모습들로서 이런 간접적인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궁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1) 이것이 인간 현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이해는 실존적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임종자에게 죽음은 불가피하게 자신이 겪어야 하는 가장 두려운 사건이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임종자는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그리고 분노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하지만 짧은 시간마저 낭비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사목자는 죽음을 앞둔 당사자가 그동안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던 간에 그에게 지금 주어진 이 시간들을 소중하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이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 곧 구원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돕고 이어서 죽음 앞에 선 인간(임종자와 보내는 이 그리고 사목자)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이들에 대한 사목적인 관심과 배려에 관해서 논해 보고자 한다.

 

 

2.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 명제는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느님께서 악과 생명의 적으로서 죽음의 원조가 될 수 없다는 표현이다.

 

인간은 삶 속에서 자신을 소모시키고, 이러한 가운데 성숙한 인격체로 승화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죽음은 '다른 생명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한 인간이 점거하고 있었기에 차단되었던 역사의 한 공간을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자연스럽게 비워 주는 일이 죽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세상의 쾌락이나 부, 성공, 권력 등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궁극에 가서는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죽음의 심연에서 구원해 주지 못함을 깨닫는다. 무조건 소유하고자 하는 원의로 살던 이들에게 죽음은 자아의 상실을 의미하며, 따라서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기게 된다. 곧 자기만을 위하던 자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집착보다는 자신에게서 이탈하려는 자세를, 자신을 내세우고 높이기보다는 자신을 감추고 낮추는 자세를,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나 이기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자세를 가진 이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한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온 선물과 과제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아가면 죽음이 희망의 장으로,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옮겨 가는 복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곧 이러한 사람은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죽음의 체험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결실이며, 특히 절대적 어둠이요 절망이며 삶의 단절로 체험되는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의 결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죽음의 참된 극복은 우리의 삶에서 죽음을 제거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양할 수 없는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최종적 결정을 이루는 생물학적 죽음은 자기 존재의 끝장도 아니요, 한 존재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겨 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영원의 시작이다. 죽음은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의 현존재를 전체적으로 완성하는 최고의 행위이다. 인간은 단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종결되는 생물학적 죽음으로써 자신의 최종적 결정을 이룬다. 죽음은 삶을 마무리하고 완성이냐, 실패냐를 마지막으로 결단하는 교차점이요, 유한성에서 영원성으로, 초월로, 유한 시간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교차점이다.

 

 

3. 죽음 앞에 선 인간

 

1) 임종자(떠나는 이)

 

(1) 인간의 존엄성 - imago Dei

 

인간 이해에 있어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어 고귀한 존엄성을 지니는 존재라고 선포해 왔다.2) 성서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감탄받는 대상이며 하느님의 입김을 받아 숨쉬는 존재로서 하느님의 강생을 받아들일 만큼 고귀한 존재임(요한 1,14)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가 가능하다.3)

 

인간 창조에 있어서 구약성서는 다른 창조물들과 비교하여 매우 특별한 신적 결의(神的決意)를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은 단지 한마디의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반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우리의 모습대로 만들자."(창세 1,26)라고 하는 의지(意志)를 표명하신다. 또한 창세기 2장 7절에는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노동을 바탕으로―땀의 결실로―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입김을 받아 숨을 쉬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입김(ruah)이다. 루아(ruah)란 인간이 영과 육의 복합체,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시켜 주는 활력, 곧 하느님에게서 부여된 '정신 실재'이다. 루아(ruah)는 바람, 숨, 입김, 생명력, 숨결을 뜻한다. 인간의 루아 곧 바람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호흡(숨)을 나타낸다. 바람처럼 가냘픈 인간의 숨(ruah)은 육체를 움직이고 활기 있게 하는 힘이다. 비록 숨이 없이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숨의 주인은 아니다. 영혼이나 육체와는 구별되는 바람으로서 대체로 주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권세이며 강력한 현상이다. 인간의 숨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오는 것이며(창세 2,7; 6,3; 욥기 33,4) 죽을 때 그분께 돌려드려야 한다. 숨은 인간 생명의 숨결을 끌고 가는 힘이다. 따라서 루아(ruah)는 인간의 초월적이고 초의식적인 인격 중심으로서,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작용을 수용할 수 있는 요체이다.4)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한 의지의 표현으로 당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땀 흘림을 통해 창조되고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하고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함이 드러난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당신께서 지니신 자유를 인간에게 선물해 주시면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당신의 내적 역동성을 함께 부여하셨다. 세상을 다스려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지만 그 역할을 인간에게 맡겨 주셨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사용하여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적 주체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을 당신의 대화와 사귐의 상대자로, 당신께 대응하는 자로 삼고자 하셨다.5)

 

이러한 인간은 그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인간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비록 그가 이제 병으로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해도 특별히 임종을 앞두고 심한 통증에 짓눌려 몰골이 심하게 상하여 보기 흉하게 되었다 해도, 또는 의식 없이 침대에 누워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2) 임종자의 상태-불안과 두려움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고귀하고 인간의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환자의 경우는 그런 사실을 인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사라져 가는 자신의 가느다란 생명에 대한 애착뿐이다.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어떤 신학적 논리로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해도 그에게는 공허한 말 잔치일 뿐이다. 그것은 죽음의 법칙이 만인에게 공통된 보편적 역사이기는 하지만 당사자인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이 가지는 특수한 종말(지상 삶의 끝)이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가 보편되다고 해서 각 사람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자세마저도 공통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신만이 지닌 특수한 상황,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도 일면 비슷해 보이긴 해도 그와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수많은 사연들은 헤아릴 수 없는 다름이 있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보편적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6) 그러므로 임종자는 영적, 사회·심리적인 두려움과 불안 속에 머물며 괴로워한다. 바로 이곳에 사목적 접근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목적 접근을 위해 임종자들의 영적, 사회·심리적 두려움의 상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의 방법이 마련되리라 본다.

 

① 고통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흔히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직결되어 있다. 죽어간다는 것, 그 자체가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임상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상당히 많은 환자들이 마지막 죽는 단계에서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육체적인 고통

 

말기 환자(임종에 가까운 환자)들에게서 육체적으로 다가오는 고통은 실재적(實在的)이며 실제적(實際的)인 것이다. 이들이 겪는 최대의 육체적 고통은 의학적으로 통증이라 불리는데 이는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조직 손상과 관련된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이다. 이 통증은 주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다. 통증 조절이 안 되면 말기 환자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심하게 고통받으며 환자의 일상 생활 능력과 식욕이 떨어지고 불면증이 생기고 기분이 나빠져서 삶의 질이 저하된다.7) 통증은 여러 가지의 신체적 증상을 말한다. 피로, 배뇨 곤란, 부종, 구토, 식욕 감퇴, 체중 감소, 탈모, 빈혈, 구내염, 설사, 발열, 소화 장애,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이때 환자는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보통 경하거나 중등도 통증에는 입으로 먹는 진통제를 사용하지만 통증이 심한 경우에는 몰핀을 투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암세포가 뼈로 전이되었거나 호흡기에 전이되었을 경우 이런 마약성 진통제로도 조절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환자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며 고통을 피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보호자(가족)들은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피하거나 이렇게 고통받느니 차라리 빨리 임종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환자 앞에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무력감을 느껴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통에 짓눌려 소리치며 죽어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고통 그 자체이다. 이러한 고통이나 통증은 수술 후의 통증과는 다르다. 환자가 통증 후에 완화될 수 있음을 알면 아픔을 덜 느낀다. 그러나 죽음의 고통은 완화가 없는 것이다. 즐거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고 왜 이런 고통 속에서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 속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통증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고통 중에 홀로 남게 되지 않고 통증이 완화될 수 있음을 알면 환자는 훨씬 고통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의 고통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괴로운 것이다.8)

 

㉡ 정신(精神)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더 크고 더 강도가 높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고통이다.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실로 엄청나고 끔찍한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 사회(社會)적인 고통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에서 오는 고통이다. '내가 떠나면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또는 내가 더 이상 사회 활동을 못함으로써 가족들이 받게 될 시간과 감정, 경제적, 어려움으로 '내가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는구나'고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임종자가 느끼는 무기력감에서 오는 고통을 의미한다.

 

㉣ 영적(靈的)인 고통

 

환자들은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많아지게 되어 고통을 받게 된다. 자신의 인생에서 성취한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고 너무 빨리 죽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②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임종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가장 큰 고통은 마지막 죽음의 단계에서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때이다. 죽음에 다가가는 그 순간에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간은 매우 큰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 죽음에 대한 고통을 자신이 혼자 외롭게 겪고 있음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한다.

 

③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이 때부터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이른다. 임종자는 가까운 장래에 자신이 죽는다고 하는 두려움과 공포를 갖는다. 죽음에 대한 무지(unknown of death)는 다음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온다. '이 세상 후에는 어떤 운명이 될 것인가?' '죽은 후에 나의 육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이들은 나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의 목표와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등이다.9)

 

④ 상선벌악에 대한 두려움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생각은 모든 인간이 죽고 나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좋은 일을 했으면 보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하는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천국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장소이고 지옥은 벌을 받는 장소라고 하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죽고 나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절대로 복수하시는 하느님, 벌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이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모두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 탕자의 비유 ― 이심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절대로 심판하시고 벌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다. 용서하시고 모든 것을 감싸주시고 이해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임종자들에게 주지시켜 주어야 한다.

 

⑤ 개인적 소멸에 대한 두려움

 

이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기본적인 두려움이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일 수 있다. 죽음을 직면한다는 것은 바로 한 개인이 지닌 모든 것 존재 자체를 잃어 버린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보존하고자 하는 이 같은 본능 때문에 죽음에 앞서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생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사후에 영생이 있다, 영원한 미래가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자세는 죽어 가는 환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3) 임종의 5단계

 

이어서 죽음에 직면한 이가 이제 어떤 방식으로 예기치 못하고 원치도 않았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시카고 대학 병원에서 부원장을 역임하고 20여 년간 임종 환자들을 돌보는 데 세계적인 권위자인 퀴블러 로스(Kubler Ross)는 자신의 수많은 임상 경험을 통해 임종에 가까워진 환자들이 다양하면서도 특정한 슬픔과 상실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임종의 다섯 단계를 설명한다.

 

여기서는 부정과 고립, 분노, 흥정, 우울, 수용의 퀴블러 로스가 말하는 임종의 다섯 단계를 살펴보도록 하고 이에 따른 어떤 사목적 배려가 필요한지도 알아보기로 하자.

 

① 부정과 고립(denial and isolation)

 

죽음에 가까운 중대한 병이라는 것을 안 첫 반응이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하며 부인한다. 환자는 치명적으로 진행되는 자신의 병을 의식하면서도 이러한 사실에 대해 충격적으로 반응하면서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환자는 진단이 잘못 내려진 것은 아닌가 해서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며 좀 더 나은 진단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10) 사목자는 이러한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환자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그 부정을 인정하지 말고 환자 스스로 자신의 병에 대해 좀 더 적절한 견해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때 누군가 대화할 수 있고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환자에게 정작 임종이 닥치기 훨씬 전에 죽음과 임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다. 물론 환자가 원할 때이다. 죽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때보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무서움을 덜 느낀다고 한다.

 

② 분노(anger)

 

두 번째 단계에서 환자는 자신의 감정을 반항이나 분노로 나타낸다. 이 분노는 환자 자신에게나 가족, 의료진, 방문하는 사제, 더 나아가 하느님께로 폭발한다. 이런 경우 사제는 충격을 받고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환자의 분노를 참고 받아주어야 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며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분노일지라도 털어놓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환자의 분노나 질투심을 이해한다는 태도로 "나라도 그럴 경우 화가 났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말씀하십시오."라고 위로하면서 그의 분노를 정상적으로 폭발하도록 도와주면 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환자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지나친 설교도 피해야 한다.

 

③ 타협(bargaining)

 

이 단계에서 환자는 타협을 시도한다. 그래서 불가피한 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는 시도를 한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착실한 행동을 보이고 특별한 헌신을 하기로 맹세함으로써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망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며칠이라도 좋으니 통증이나 신체적 불편 없이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타협은 대개 절대자와 하는 타협이다. 그래서 그 언약은 비밀로 붙여지거나 지나가는 말 속에서 사목자와의 만남에서 그 속뜻을 비추기도 한다. 이때 자기 몸의 일부나 전체를 의학 발전을 위해 기증(장기 기증, 시신 기증)하겠다고 언약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환자들의 이런 타협적인 태도와 내용에 비합리적인 면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때 사목자는 타협의 내용을 거절하거나 묵살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소리나 행동은 사실 정상적인 반응이며 환자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임을 기억하고 사제는 환자들의 애원을 귀담아들어 주어야 한다. 환자를 정신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한다.

 

④ 우울(depression)

 

네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병의 상태를 알게 되고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묻는다. 가족을 걱정하고 자기가 죽고 나면 누가 돌볼 것인지 근심하며 인생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생각하고 울기도 한다. 이때 인생의 밝은 면을 보라든가 슬퍼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별 효과가 없다. 그렇게 되면 그의 절박한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수용의 단계로 넘어가는 데 방해가 된다. 차라리 슬픔에 젖도록 놓아두든지 말없이 손을 토닥거려 주거나 머리를 쓸어 주거나 조용히 곁에 앉아 마음과 마음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우울증이 있을 때 환자는 대화를 별로 원하지 않는다.

 

⑤ 수용(acceptance)

 

이 단계에서 환자는 자포자기한 사람과는 달리 비교적 평화를 누린다. 혼자 있고 싶어하고 바깥 세상의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누가 가만히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있길 바란다. 의사나 가족이나 사제는 환자의 삶을 연장시켜야 한다고 함으로써 흔히 이 평화를 파괴하고 희망을 강요하여 환자를 우울과 분노의 단계로 퇴보시킬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병자성사는 이 단계에 수행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모든 환자가 위에서 말한 다섯 단계를 반드시 다 거치는 것은 아니며 한 단계를 지나는 데 몇 시간, 또는 며칠이 걸린다고 예견할 수 없다. 사람에 따라 몇 단계를 건너뛸 수도 있고 몇 분 안에 수용의 단계에 도달할 수도 있으며 몇 년이 걸려도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신앙이 얼마나 깊으냐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특히 죽음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환자들의 심리적 변화를 주시하면서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하고 기도하며 안수하거나 강복을 줌으로써 환자나 그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로스도 책보다는 자유로운 기도, 자연스럽고 정직한 기도가 진정제보다도 더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11)

 

2) 보내는 이

 

우리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의 가족들을 함께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 환자들을 실질적으로 돕는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투병 기간 중 가족들은 막중한 역할을 하며, 가족의 반응은 환자가 가진 병에 응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12)

 

보내는 이의 고통 또한 떠나는 이가 겪게 되는 두려움과 고통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임종의 과정을 함께 걸어간다.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 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간다는 상실의 고통에 시달린다. 이들 또한 떠나는 이가 느끼는 것과 같은 두려움과 거부 반응을 나타내며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해 온 이들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때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임종자를 위한 사목에서는 그래서 보내는 이, 곧 가족들에 대한 사목적 관심과 배려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3) 사목자 - 사목자의 신앙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을 통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성실성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곧 부활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인간의 승리이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간의 승리이다. 죽기까지 성부를 사랑하셨고 순명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타락된 상태를 스스로 선택하시기까지 겸손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만큼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충실하셨다. 그런 그리스도의 충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부활이라면 사목자로서 가져야 할 신앙은 생활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위해, 죄에 떨어진 인간의 추악한 상태에서 해방하기 위해, 잃었던 하느님 백성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셨고 고통을 받으셨으며 수모를 당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광 속에 부활시키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만민의 왕으로서 구세주로서 성부 오른편에 앉게 되심으로써 영광 받은 자로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성실한 생활로써 증명해야 하는 것이 사목자의 임무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의 원형이시고 샘이시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또한 그리스도의 전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목자가 증거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아니라 그 영광 이전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수난과 죽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복음의 전부를 받아들였다면 죽음 또한 하느님의 은총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의 뜻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생명을 낳게 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며 구원받기 위해 회개로 초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생명의 시작이며 우리를 영광스럽게 신화(神化)하는 것이다.13)

 

 

4. 사목적 배려


1) 임종자에 대한 배려

 

(1) 경청자로서의 역할

 

사목자는 임종자들의 고통에 함께하며 그들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사목자는 고통 중에 있는 임종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이 외치는 '고통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음으로써 임종자를 가장 잘 돌보게 된다. 죽음의 고통 중에 있는 임종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슬퍼하고 호소하며, 괴로워하고, 희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목자와의 이러한 만남을 통한 개입은 임종자들 마음 안에 기원과 운명, 존재와 소멸과 관련 있는 질문들을 불러일으키며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의지와 강한 삶에 대한 희망을 불붙게 한다. 사목자는 임종자의 투병에 참여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문제들을 식별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성의 한계 속에서 사목자는 사람들을 고통의 신비에 참여시킨다.

 

또한 임종자들은 사목자를 향해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 펼쳐 놓는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 부모나 아내나 자식에게도 ― 이야기할 수 없었던, 자신만이 아는 까마득히 깊은 곳에 묻어둔 비밀스런 이야기를 사목자에게 털어놓는다. 사목자는 그들의 고독 어린 목소리를 성심 성의껏 귀담아듣고 그 자신을 인정하며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임종자들은 얽혔던 매듭이 풀리듯이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음이 가벼워짐을 표현한다. 성심껏 들어주는 사목자들에게 임종자들은 위로를 받으며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사회 심리적 소외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그들은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2) 지지자로서의 역할

 

사목자의 중대한 소명 중에 하나는 인간의 이야기와 하느님의 이야기를 부단히 연결시키는 일이다. 사목자는 전해야 할 이야기를 부여받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매일 듣게 되는 수많은 아픔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고 그것이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의 일부로서 제시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기억(ANAMNESIS)하면서 이러한 하느님의 위대하신 역사에 참여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현재 안에 재현시켜 그것을 '지금 여기서' 사랑이 충만하신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은 참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현재에 ― 지금 여기에 ― 우리와 함께 계신다. 모든 것이 캄캄하고 절망의 소리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리고 출구를 발견할 수 없을 때, 우리 안에 기억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기억을 통해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고 우리의 삶의 어느 순간에도 희망을 제공한다. 사목자들은 임종자들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삶 속에 개입함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있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임종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 여정에 동행할 차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임종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또 다른 나, 저 자리에 누워 있을 가능성을 지닌 나와 동일시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스러워할 때 함께 고통받고 그들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말벗을 필요로 할 때 말벗이 되어 주어야 한다. 사목자는 언제나 그들 곁에 서 있는다. 그들 곁에 서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표지로서 사목자는 존재한다. 임종자들은 사목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리스도께서 ―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 베풀어 주시는 그 무한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3) 인도자로서의 역할

 

모든 사목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심판과 자비를 떠나서는 무(無)라는, 절대적인 무(無)라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사목적 과제는, 구체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 곧 죽음 앞에 서서 고통받고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끊임없는 구속 사업의 일부로서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과 체험을 통해 임종자들의 고통이 치유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세계와 하느님 간의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일치를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목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지금까지 다만 파괴적인 것으로만 보이던 기억이 이제는 구속 사건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임종자들은 사목자와의 만남을 통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난다. 사목자들은 임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인도자이다. 이렇게 하느님께로 나아가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 만남을 통해 임종자들은 위안을 받으며 이 위안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치유자이신 하느님과 내면 깊숙히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수용하며 새로운 희망을 얻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게 된다.14)

 

(4) 성사적 배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약한 자, 병자, 억압받는 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항상 특별한 배려를 해 오셨다. 그 중에서도 병자들에 대해서 그 육체와 영혼 사정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셨는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병자들에게 도유(塗油)함으로써 병을 고쳐 줄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며(마르 6,13), 병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병자성사를 제정하셨다. 따라서 교회는 병자들을 돌볼 때 신비체의 고통받는 지체들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을 섬기는 것이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병든 이들을 돌보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마르 16,18; 사도 10,38). 병자성사는 성령의 은혜로서 그 성령의 도유는 아직 속죄해야 할 어떤 죄과가 있다면 그 죄과와 죄의 결과를 씻어 주어 병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해 주며 그로써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줌으로써 병자가 그 도움을 받아 병고를 더 쉽게 참으며 마귀의 유혹에 더 잘 대항하게 해 준다.15) 이 성사는 제2단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정화시켜 제3단계 인생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며 눈물을 닦아 주는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다. 병자성사는 고해성사가 선행되므로 일생을 정리하고 심리적으로도 카타르시스 현상을 일으켜 환자가 평화를 누리게 한다.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편안하고 죄를 용서받았기에 평화로우며 주님의 은총으로 유혹을 이기고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는 병자성사를 통해 현재의 병고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편안하다. 그러므로 죽음의 위험에 있는 임종자에게 병자성사는 반드시 집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성사를 세우신 것이기에 사목자는 병자가 비록 일생을 평탄하게 신앙 생활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죽을 위험이 임박했다고 판단될 경우 서슴지 말고 병자성사를 집행해야 한다.

 

두 번째 성사적 배려는 노자 성체를 잘 영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죽음은 사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이 만남의 기쁨은 성체를 통해서 어느 정도 미리 실현되고 또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니 성체를 모심은 생명을 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35.55)라고 약속하셨다. 잘 준비하여 성체를 모시고 눈을 감는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다.16)

 

2) 남는 이들에 대한 배려

 

(1) 떠나 보낼 준비

 

임종자를 보내는 이들도 우리 사목의 대상이며, 임종자 사목이 임종자가 세상을 떠난 후 종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목은 임종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임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그들도 함께 참여해야만 한다.

 

임상 경험으로 보아 떠나는 이들과 남는 이들의 관계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세상을 살면서 서로가 주고받은 수많은 상처들 그리고 치유의 흔적들이 바로 이 시간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과제가 주어진다. 이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짧은 시간에 그들은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목자의 역할은 여기서 발휘될 수 있다. 떠나는 이와 남는 이의 중간에 서서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들 안에 함께하심을 알려 주고 그들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떠나가는 이들이 결코 헛되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들을 마련해 놓고 떠난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사랑하는 이를 행복하게 떠나 보낼 수 있으며 떠나가는 사람도 행복한 가운데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그들은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서로 주고받은 선물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2) 떠남의 현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임(To accept the reality of the loss):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임종했다고 하는 현실에 적응을 하고 그것이 사실임을 믿게 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며, "이것은 아마 악몽일거야", "그 말을 믿을 수 없어, 사실 일 리 없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라고 반응하기도 한다.

 

이후 점차적으로 이러한 부정(denial)을 멈추고,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진행은 정상적이다. 이러한 단계가 될 때까지는 비통을 해결하기 위한 그 무엇도 실제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내는 이를 위한 사목에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죽음과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와는 다시는 재회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가끔씩 우리는 죽은 지가 수년이 지난 후에도 아직 그가 살아 있다며 죽은 자를 찾아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퇴행의 길을 걸음으로써 매우 큰 고통을 당한다.

 

사별 이후에 망자와의 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거나 망자는 완전히 떠나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위와 같은 착각은 잠깐 동안만 나타난다. 이에 사목자는 남은 이들의 반응에 주목하고 적절한 배려를 해 주어야 할 것이다.

 

(3) 남은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은 남은 가족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기진맥진해 있으며 "강렬한 죄책감과 분노감, 또는 거의 고뇌에 싸인 회한과 극렬한 투쟁을 벌인다. 그래서 현실 부정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17) 임상 경험에 따르면 사별 가족들에게는 장례식을 모두 치른 직후에 이들에 대한 배려와 봉사가 가장 필요하며 사목적 배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는 장례식에서 선행하던 혼란과 충격은 지나가고 상심의 고통이 가장 심할 때이기 때문이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남게 되면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그리고 외로움이 엄습한다. 변화된 생활에 적응해야 하므로 상(喪)을 당한 사람은 누구든 자기 손을 붙잡아줄 사람을 갈망한다. 이때 사목자의 조그마한 도움은 상실의 고통을 체험하고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된다. 사목자는 임종 때 환자의 손을 잡아주는 것 못지않게 남은 유가족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준다든지 장례 예절에서 이들이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또한 교회 봉사자들을 통해 함께 기도하고 교회가 그들을―떠난 이와 남은 이들―기억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줄 때 이들이 겪는 상실의 고통 또한 치유의 효과가 클 것이다.

 

 

5. 맺음말

 

"인간의 생명은 어느 시기 어느 상황에서든 신성불가침이다. 인간은 육체적 심리적 상황이나 그가 놓인 환경에 상관없이 언제나 존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임종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무조건적으로 존중받을 가치와 권리가 있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해서나 죽을 때에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을 찬미하고 찬양하게 된다. 자연스런 임종을 맞는 사람들의 생명은 충분히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하며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비록 임종자가 고통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형제적 사랑과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임종자는 그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가족들과 사람들의 위로뿐 아니라 그들의 여러 가지 아낌없는 인간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18)라고 교회는 말한다.

 

죽음 앞에 선 인간으로서 이들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사회 심리적으로 소외된 이들이요, 가난한 이들이다. 존재의 소멸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린 임종자들은 자신을 위로해 줄 누군가를 원하고 자신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또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임종자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귀하며 존엄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바로 그 자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표지로서의 사제가 서 있을 자리이다. 그래서 사목자들이 내미는 손이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표지가 되고 사목자들이 들려주는 목소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이다. 임종자들에 대한 사목적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 앞에 선 그들은 사목자들의 관심과 배려에 감사할 것이며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행복 속에 주님의 품에 편안히 안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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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상태, [인간], 서광사, 1999년, 274면.

2) 조규만, "교의 신학 관점에서의 인간 생명 존엄성의 문제 고찰", [가톨릭 신학과 사상] 7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2년, 9면.

3) 최혜영, [몸과 얼], 가톨릭대학교 인간학 연구소, 2000년, 82면.

4) 위의 책, 90-91면.

5) G. von Rad, [창세기], 한국신학연구소, 1981년, 62면.

6) 김영환, "죽음에 대한 사목적 배려", [신학전망] 31호, 1975년, 29면.

7) 최숙경,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말기 암 환자의 통증 관리], 가톨릭대학교 산업보건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7년, 3면.

8) 노유자 외, [호스피스와 죽음], 현문사, 1994년, 98면.

9) 위의 책, 96면.

10) 이승찬, "인간 죽음과 임종에서의 문제", [가톨릭 신학과 사상] 21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년, 122면.

11) 퀴블러 로스, [인간의 죽음],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1997년, 57-147면.

12) 위의 책, 22면.

13) 김영환, 앞의 책, 27-28면.

14) 로렌스 E. 홀스트, [병원 사목], 가톨릭 중앙의료원 원목실 옮김,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년, 23-79면.

15) 김영환,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병자성사", [사목] 82호, 1982년, 8-10면.

16) 배문한, "임종자를 위한 사목", [사목] 70호, 1980년, 35-37면.

17) 위의 책, 37-38면.

18) 교황청 생명학술원, [임종자들의 존엄], 1999년.

 

[사목, 2001년 11월호, 지영현(강남성모병원 원목실 부실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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