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회복지] 자선의 영성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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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14

자선의 영성적 의미

 

 

1. 글을 시작하면서 

 

자선(慈善)이란 우리 교회나 신자들 그리고 선의의 사람들이 자주 말하고 실천하는 선행이므로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주 예수님의 성탄일이 가까이 올 때 구세군 신도들이 거리에서 자선 냄비를 차려 놓고 종소리를 울리는데, 그것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가톨릭에도 자선주일이 있어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특별 헌금을 하며 가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자선한 사람들의 명단이나 사진이 공개되기도 한다. 

 

자선은 선행인데, 특별히 고난, 불행, 재해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선행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자선은 권고 사항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이다. 본 글에서는 영성적인 차원에서 자선의 의미를 약술하고자 한다. 

 

 

2. 자선은 하느님의 길을 걷는 행위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었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이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서 나온 결과였다. 성실한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그분께만 충성과 효성을 다하도록 노력하였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그들은 실생활에서뿐 아니라 의식적인 면에서도 모든 불완전함과 불결한 것에서 떠나려고 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주님 안에서 거닐어야 한다.”라는 가르침과 “주님의 뒤를 걷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너희의 하느님 야훼만 따르고 그분만을 공경하여라. 그의 명령만 지키고 그의 말씀만 들어라. 그분만 섬기고 그에게만 충성을 바쳐라”(신명 13,4).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효성은 여러 가지로 드러나지만 그 중의 하나는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의 실천은 자선과 연민으로 드러날 때가 많다.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보고 외면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 기회를 등한시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안에 걷는 행위”가 아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실천 사항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었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신명기의 가르침이 대단히 돋보인다. “동족으로서 가난한 사람이 있거든 너희는 인색한 마음으로 돈을 움켜잡거나 그 가난한 형제를 못 본 체하지 마라. 손을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어라. 시원스럽게 꾸어 주어라. 주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15,7-10). 

 

이삭줍기와 외국인에 대한 규정은 토라에서 드러나는 자선의 좋은 본보기들이다. 

 

이스라엘인들은 곤궁 중에 있는 이웃 사람들을 생각해서 추수가 끝난 다음 이삭을 줍지 말아야 했다. 그것은 추수할 것이 없는 가난한 이웃들도 이삭이라도 주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한 사랑의 계명이었다. “너희의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 놓아라”(레위 19,9-10). 

 

나그네 살이 하는 외국인들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들에게 잘해 주는 것 역시 자선의 한 방법이었다. “너의 땅에 함께 사는 외국인을 괴롭히지 마라. 너에게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을 네 나라 사람처럼 대접하고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 19,33-34). 

 

하느님의 길을 걷는 이들은 행복하게 살며 천 대에 이르도록 축복 받는다(신명 7,9)는 사상이 그들에게 깔려 있었다. 그 축복은 장수와 부귀 그리고 자녀들로 드러났다. 후손들이 많고 부귀 영화를 누리며 오래 사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졌으므로 복을 받기 위해서도 사랑의 실천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길을 걷는 것”이며 축복의 대상이었다.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야훼께 빚을 주는 셈. 야훼께서 그 은혜를 갚아 주신다”(잠언 19,17).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토지는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소산물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고 이웃 사랑이 권장되었다(레위 19,18 참조). 이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따른 규정이었다. 신정 정치에서 자선 행위는 율법에 충실함이었으므로 하느님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신명 10,17-18 참조). 이는 곤궁한 이들에게 “손을 뻗어 도와 주는” 행위였다(신명 15,11). 히브리어의 야드(yad)는 손을 편다는 뜻인데, 단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의미한다(신명 15,8; 시편 104,28; 145,16; 잠언 31,20). 

 

자선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실천되어야 했다. 그것은 땅의 안식년으로 드러났는데, 농경 시대에 사회 정의와 복지를 실천하는 것이었다(이사 58,6-7 참조.). 그 규정은 육년 동안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칠년째에는 땅을 놀리며 소출을 그대로 밭에 남겨 놓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사랑의 실천이었다. “너희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남은 것은 들짐승이나 먹게 하여라”(출애 23,11). 이와 같이 자선의 행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짐승들에게도 베푸는 사랑의 행위였다. 

 

신약성서 이후에 기록된 소수의 랍비 문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의 길을 걷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Abba Saul은 이렇게 천명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본받을 것이다. 그분이 자비롭고 연민이 많으시므로 나도 자비롭고 연민이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 너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분이 연민이 많으시니 너도 연민이 많은 사람이 되어라.”1) 

 

 

3. 자선은 희년의 정신 

 

구세주 강생 2천년의 대희년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자선의 의미를 희년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를 근원적인 의미에서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희년은 요벨의 해로서(shenath hayyo-bel, year of jubilee, annus jubilii) 안식의 해를 일곱 번 거듭한 후에 오는 제50년째의 해 또는 이스라엘에게 50년째마다 찾아오는 자유와 해방의 해였다. 

 

요벨은, 레위기 25장과 민수기 36장에 나오는데, ‘숫양의 뿔’이란 의미가 있는 악기(나팔)의 일종인데, 50년째 해의 ‘속죄일’에 요벨을 불어, 그 해가 온 것을 알렸기 때문에, ‘요벨의 해’로 불리었다. 이 해에는 팔렸던 토지는 원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노예는 모두 해방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사회 정의를 이상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는데, 동족에게 억울하게 하지 말고, 심지어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자선 그 자체이다. 

 

 

4. 자선은 공로를 쌓는 수단 

 

교회는 전통적으로, 공로란 은총과 성덕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며 여기에는 영적이며 물질적 자선 행위나 사도직 또는 봉사직이 속한다고 가르쳐 왔다. 공로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은총 상태에서 사랑으로 행한 것은 무엇이나 공로가 된다. 그러므로 외적 선행은 타당한 내적 준비에서 나와야 하며 순수한 초자연적 동기에서 행해질 때 공로가 되며 성덕의 성장을 가져온다.2)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자선을 반기신다. “하느님께서 너의 기도와 자선을 받아들이시고 너를 기억하신다”(사도 10,4; 잠언 22,9). 따라서 자선은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1디모 6,18-19).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한 고별사에서 여러 가지 당부를 한 다음 자선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이를 주님의 말씀이라고 전제하고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 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고 하였다. 

 

사도 야고보도 자선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이 말씀을 깊게 묵상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더욱더 구체적으로 “가서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 주며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시오.”라고 권고하였다.3) 

 

주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만큼 자선에 대한 아름다운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마태 25,31-46).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옷을 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하는 것은 축복받는 조건이며 양 우리에 들 사람들이다. 이 여섯 가지 가르침에 수덕 신학은 집도 절도 없이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내 주는 것을 삽입하여 일곱 가지 선행으로 가르쳐 왔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우리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해 주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이 지구상의 헐벗고 굶주리는 작은 그리스도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큰 그리스도님께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이기주의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참고로 반쯤 죽었다가 소생한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그리고 자신이 믿는 종교와 개인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산다는 통계는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5. 자선은 포기를 통한 이웃 사랑 실천 

 

물질에 대한 욕망은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 특히 재산의 원 주인도 하느님이시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느님의 것을 잠시 관리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선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린다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물욕에 대한 강한 욕구를 억제하여 가진 것을 포기함으로써 곤궁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덕행이다. 인간의 삶에 재물은 대단히 중요하나 신앙의 정신으로 이를 포기함은 사랑의 실천이자 수행의 한 방법이므로 성덕을 쌓는 좋은 수단이 된다. 

 

 

6. 자선은 죄 사함의 방법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토비 12,9; 4,7-11)라는 말씀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가르침은 자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고 하겠다. 죄는 인간을 자신과 이 세속과 악령의 지배에 놓이게 한다. 죄의 상태에서 발길을 돌려 사랑이신 하느님께 나아감은 회개이며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앙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한다. 이는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교회는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전통적으로 보속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었다.4) 교황 성 대 레오는 관대한 마음으로 희사하는 것을 강조하여 “희사로 자기 재산이 줄어들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관대함 그 자체가 큰 재산입니다.”라고 하였다.5) 

 

 

7. 자선은 가식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훌륭한 수행이자 선행인 자선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가식은 속이는 것이고 속임은 악령이 첫 여인을 속여 원죄를 범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가 다 그렇지만 자선 또한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행할 때만 공로가 되고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며 하늘 나라를 얻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자선은 이미 지상에서 상급을 받기 때문에 하느님 보시기에 큰 공로가 되지 못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고 주님의 행복선언으로 족하다고 본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2-4). 

 

 

8. 자선을 실천한 신앙인 

 

자선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필자의 사목 생활 중 자선을 성실히 실천한 신앙인이 생각나서 그분(김용태 아돌포스)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초등 학교 밖에 못 나온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장가들어 따로 살림을 날 때 부모에게 쌀 한 가마니를 받아 소도시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재산이라곤 건강한 체력과 어릴 때부터 구교우 가정에서 익힌 신앙뿐이었고 조금 뛰어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돌을 다듬는 솜씨였다. 단칸방을 얻은 후 공터에 외상으로 돌을 공급받아 비석과 상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돌보심이 있었는지 물질의 축복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돌 집이 돌 공장이 되었다. 그 때는 거지들이 많았다. 거지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 밤에는 돌 공장을 찾아와서 돌 위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잠을 잤다. 워낙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 그냥 두었다. 그런데 거지들이 동냥한 돈으로 술을 사서 마시고는 저녁마다 소란을 피우니까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그래서 점잖게 이 사람에게 “저녁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으니 거지들을 못 오게 하시오.”라는 건의가 들어왔다. 그들의 속셈은 혹시 한밤중에 도둑을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지들을 모아 놓고 마을 주민들의 뜻을 전했다. 일장 훈시를 한 것이다. 그러자 거지들이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더니 밤마다 떠드는 사람들을 내쫓아버렸다. 주민들은 거지들이 안 가고 그냥 있으니 불안해했지만 밤이 조용해지니까 더 이상 건의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거지들은 봄 여름 초가을까지 돌 위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잠을 자다가 날씨가 쌀쌀해지자 겨울을 나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노인 거지 한 사람이 서리가 오는데도 돌 위에서 자는 것이 아닌가? 그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 저 노인이 저 위에서 잠을 자다가 동사하지는 않을까?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노인장은 돌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노인장에게 가서 물어 보았더니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워낙 신심이 깊고 연민의 정이 많은 신자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인장을 돌 위에서 죽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인과 상의하여 결단을 내렸다. 노인장을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 자기 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단칸방에서 그 거지 노인을 마치 집안의 어른처럼 모시고 한겨울을 지냈다. 부인과 아들 하나 그리고 그 거지 노인네, 모두 네 식구가 한 방에서 넉 달을 지낸 것이다. 한 상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 그 불편이 오죽 했을까? 그래도 잘 지냈다. 봄이 되니 그 노인네도 생각이 있었던지 “한겨울 잘 지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작년에 갔던 각설이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돌 공장에서 또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는 그냥 두었다. 이런 식이 해마다 계속되었다. 추석이 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지들이 쇠고기 한 근씩을 사 와서는 그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그 신자가 필자에게 “신부님, 거지한테 선물 받아본 적 있습니까?”라고 묻기에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거지한테는 우리가 주어야지 선물을 받다니요.”라고 했더니 그 신자는 “저는 추석 때마다 거지들한테 선물을 받습니다.”라고 했다. 이 신자는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한 산 증인이다. 

 

 

9. 글을 마치면서 

 

자선은 고통, 곤궁, 재해 등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선행이며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정신을 본받는 것이다(마태 5,45). 그러므로 자선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낼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보신다는 순수한 마음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정신으로 행할 때 참다운 자선이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선은 하느님의 길을 걷는 행위이자 죄 용서의 조건이며 물질에 대한 욕망을 초월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덕행인 동시에 이미 지상에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선행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다투어서 이를 실천하여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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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douard Cothenet, Imitating Christ, The Religious Experience Series, 5권, Anthony Clarke, England, 1974년, 4면. 

2) Summa Theol.,II-II,q.182,a.2 참조. 

3) Oratio 14, De Pauperum amore, 38,40. 

4) St. Petrus Chrysologus, Sermo 43 참조. 

5) Sermo 10 de Quadragesima,3-5.

 

[사목, 2000년 12월호, 전달수(안동교구 다인본당 주임 신부, 영성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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