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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회복지] 성서에 나타난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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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15

성서에 나타난 ‘장애인’1)

 

 

1. 이끄는 말

 

성서에는 장애인과 장애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 다양하고도 폭넓게 묘사되어 있다.2) ‘약한 사람, 듣지 못하는 이, 보지 못하는 이, 발을 저는 이, 옥에 갇힌 이, 버림받은 이, 공동체에서 쫓겨난 이, 고통당하는 이’ 등이 그 예이다. 성서 저자들은 장애인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적 사랑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언급한다. 

 

이 글의 목표는 섬세한 성서 주석학에 있지 않다. 다만 장애인에 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주요 구절과 단락을 살펴보는 가운데3) 성서에 나타난 장애인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배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얻고자 할 뿐이다. 그분의 뜻대로 ‘장애인’을 ‘장애우’(障碍友)로 맞아 주며 ‘나누는 삶’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성서에 나타나는 ‘영적(靈的) 장애’에 대하여 좀 더 숙고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 성서에 나타난 ‘장애인’

 

구약에 나타나는 장애인에 대하여, 이어서 신약성서에 언급된 장애인 관련 본문을 살펴보는 가운데 점차적으로 성서 안에 다양하게 묘사된 ‘장애인’ 이해에 접근하리라 본다.

 

1) 구약성서의 ‘장애인’

 

(1) 장애인을 보호하도록 명하는 본문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회중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너는 듣지 못하는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주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2.14).4)

 

레위기에서 모세는 단 두 번에 걸쳐서 하느님에게서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중개할 사제 축성 때이고(8,3-5),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의 일치와 관련지어 이스라엘 백성의 윤리적 자세에 대한 계명을 내리는 때이다(19장). 여기에 장애인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배려가 잘 묘사되어있다. 레위기 19`─`24장에는 이른바 성결법(聖潔法)이 나온다. 레위기 19장 안에는 구약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하느님의 성성(聖性), 곧 그분의 거룩하심에 대한 가르침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이와 같이 초월적·신비적인 분으로서 비교·분석·파악조차 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직접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뭇 민족에 앞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다. 이는 선민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여 그에게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하시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분과 통교하는 가운데 뭇 민족들에게 그분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 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뭇 민족의 본보기로서 앞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그분의 성성을 만방에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먼저 또 끊임없이 성화시켜 가야 한다. 율법서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곧 그분의 거룩하심을 밝히는 행위이며 주님 경외 행위에 속한다(레위 19,14).

 

“눈먼 이를 길에서 잘못 인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온 백성이 “아멘.” 하고 말해야 한다”(신명 27,18).

 

신명기 27장 15-26절에는 이와 같은 식으로 ‘열두 가지 저주’가 나열되어 있다. 이 저주문의 배경에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요청이 깔려 있으며 이러한 요청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이 구절들은 본디 성성(聖性)의 요구를 저주 형식으로 표현하던 옛 전례문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혹 인간의 처벌은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벌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8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눈먼 이를 잘 인도해 주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매우 인도주의적이며 인본적인 ‘장애인 보호 사상’이다. 더구나 “눈먼 이를 잘못 인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는 말은 최선의 노력으로 장애인을 돌보아 주지 않으면 주님의 벌을 피할 수 없다는 단호한 표현이다. 이는 뒤따르는 구절과 아주 잘 어우러진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왜곡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온 백성이 ‘아멘.’ 하고 말해야 한다”(19절). 이들 두 구절(18-19절) 안에서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배려가 명료하게 제시된다. 아울러 그분께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 그리고 “장애인”을 따뜻하게 돌보시듯이 이스라엘 백성 또한 이들을 그렇게 각별한 사랑으로 돌보기를 명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인 사랑’은 율법서의 근본 정신에 속한다.

 

(2) 장애인과 힘없는 이의 수호자가 되어 준 욥

 

나는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 주었지(욥 29,15).

 

이 구절은 욥의 독백 장면이다. 여기서 그는 지난날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위와 같이 고백한다. 시각 장애인에게 ‘눈’이 되어 주었으며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 주었다는 욥의 비유적인 묘사는 단순히 일상 생활 속에서 만나는 장애인에 대한 동정 어린 마음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욥은 이로써 법정이나 삶의 현장에서 이들 장애인의 관심사를 헤아려 주고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며 나아가 짓밟히고 억눌린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약자의 대변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쉽사리 비양심적인 이들이나 파렴치한 이들의 먹이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욥의 독백은 계속된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버지였고 알지 못하는 이의 소송도 살폈으며 불의한 자의 이를 부수고 그 입에서 약탈물을 내뱉게 하였지(욥 29,16-17).

 

이는 욥이 단순히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위한 소극적 삶의 영역을 뛰어넘어 사회 정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을 “가난한 이들에게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이는 법정에서 아무도 대변해 줄 이가 없는 불쌍한 이들, 긴급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대변인이며 변호인이 되어 주었음을 밝히는 장면이다. 

 

(3) 장애인에 대한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는 이사야

 

그때에 맹인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를 저는 사람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ㄱ).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민족들에 대한 복수를 주제로 한 34장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35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복음이 선포된다. 예언자 이사야는 에돔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멸망 선언으로부터(이사 35,4) 방향을 바꾸어 곧 다가올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 “눈먼 이의 눈이 밝아진다. 전혀 듣지 못하는 이의 귀가 활짝 열린다. 절룩거리며 걷기도 힘들었던 이가 껑충껑충 뛰어다니게 된다. 말 못하던 이가 노래하게 된다”(이사 35,5-6ㄱ). 이보다 더 확실한 복음 선포가 또 어디 있으랴! 

 

(4) 비유적·상징적 표현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제2·제3 이사야5) 

 

나는 맹인들을 그들이 모르는 길에서 이끌고 그들이 모르는 행로에서 걷게 하며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리라. 이것들이 내가 할 일 나는 그 일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이사 42,16). 

 

이른바 제2 이사야도 장애인에 대한 희망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는 은유적 표현을 통하여 더욱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물론 위 본문 안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지로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을 향해 귀향하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친히 앞 못 보는 이들을 이끄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앞서 길을 밝히시리라는 희망이 선포된다(이사 42,7 참조). 왜냐하면 벙어리, 귀머거리 그리고 맹인 모두가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듣게 되고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그분께서 몸소 개입하신다. 

 

그렇다면 제2 이사야 예언자가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 곧 듣게 되고 보게 될’ 내용은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육신의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려 세상 사물을 보고 그 소리를 듣는다는 내용 이상을 의미한다. 제2 이사야는 정신적·영적으로 볼 수 있게 되며 들을 수 있게 됨을 말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영적 장애인’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들에게 마음의 장애, 영적 장애를 극복하고 ‘영원하신 분’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도록 촉구한다. 위 본문(이사 42,16)에서 ‘맹인’과 ‘어둠’은 예언자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모습, 영적으로 눈먼 상태를 은유적으로 묘사해 준다(이사 9,1 참조).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은 이렇게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나를 반드시 당신 백성에게서 떼어 버리시리라.” 그리고 고자도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며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고자들에게는 나의 집과 나의 울 안에 아들딸들보다 나은 기념비와 이름을 마련해 주리라. 나는 그들에게 결코 끊이지 않는 영원한 이름을 주리라(이사 56,3-5; 이어지는 6-7절 참조).

 

고대 왕궁에서는 흔히 ‘궁중 질서 유지’ 차원에서 환관(宦官)으로 불리는 거세된 남자들이 활동했다. 그들은 어떤 전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으며(신명 23,2) 사제직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레위 21,20). 그러나 제3 이사야는 ‘이방인’도 ‘장애인’도 이제 더 이상 소외 계층으로 머물 필요가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위 단락은(이사 56,3-7) 장애인(여기서는 환관)을 하느님 공동체 전례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도록 명하는 신명기(23,2-7)와 레위기(21,16-23)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말은 바로 전례에 참여할 수 없는 장애의 처지를 두고 하는 환관의 탄식이다. 그러나 위 본문은 바빌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다음 새 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크게 바뀌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난날처럼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문을 닫아걸 것인가 아니면 선교를 위해 과감하게 공동체를 개방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있었던 것 같다. 

 

자녀를 출산할 수 없어 탄식하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창세 15,2), 고자된 장애인 역시 후손을 얻지 못해 축복받지 못한 존재로 머문다고 보는 것이다.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이는 축복을 나누어 받지 못하므로 그는 자동적으로 공동체 전례에 참여할 자격을 상실한다(신명 23,2). 사실 이 같은 규정을 바꾸는 일은 당시로서는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제3 이사야의 선포는 엄청난 ‘희망 창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5) 장애인의 귀향길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려오고 땅 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는 눈먼 이와 다리를 저는 이, 아이 밴 여인과 아이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예레 31,8).

 

이 본문에서 그분께서 몸소 먼 유배지로부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한데 모으시어 귀향시키시리라고 약속하신다.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바는 귀향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무리에 장애인들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자비를 듬뿍 받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무리에 장애인이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 본문은 하느님 친히 개입하여 손수 성취시키시는 구원 위업(偉業)의 놀라운 측면과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밝혀 주고자 한다. 

 

하느님께서는 한번 시작하신 일을 결코 잊으시거나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이사 55,11 참조).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모아, ‘나머지 이스라엘’을 주축으로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신다.

 

(6) 장애인에 대한 제한적·소극적·비유적 표현

 

지금까지 장애인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와 긍정적·적극적 내용을 담은 본문을 보았다. 그러나 구약성서 안에는 장애인의 활동이나 지위를 엄격히 제한할 뿐 아니라 부정적 비유로 서술한 본문도 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론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의 후손 대대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하느님께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못한다. 정녕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한다. 곧,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저는 사람, 얼굴이 일그러졌거나 몸이 기형인 사람, 다리가 부러지거나 팔이 부러진 사람, 곱사등이, 난쟁이, 눈에 백태 낀 사람, 가려움증이 있거나 수포진에 걸린 사람, 고환이 상한 사람은 가까이 오지 못한다’”(레위 21,16-20).

 

이 본문의 직접적 수신인은 이스라엘의 사제들이다. 특히 사제계 전승에 따르면,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은 사제들에게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너희는 죽은 이를 위하여 너희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 너희 몸에 문신을 새겨서도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28). 이스라엘의 사제들은 살아 계시며 거룩하신 하느님 대리자이므로 죽음은 물론 이와 관련된 부정(不淨)과도 결부될 수 없다고 보았다(레위 10,3 참조). 그들은 속된 것은 물론 속화된 것까지도 피해야 했다(레위 21,1-5 참조). 이러한 이해의 지평 아래, 사제 집안의 구성원이라 할지라도 장애인은 누구나 사제직 수행에서 제외되어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의 손의 작품이로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는도다. 그들의 손은 만지지 못하고 그들의 발은 걷지 못하며 그들의 목구멍으로는 소리 내지 못하는도다.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그것들과 같도다(시편 115,4-8).

 

위 본문에서 시편 저자는 하느님만이 전능하신 힘을 발휘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민족의 우상들은 무능할 뿐임을 만방에 명명백백히 선언하고자 한다. 시편 저자는 불에 달구어져 신상(神像)이 된 우상(偶像), 자신들을 빚어낸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러한 우상들(115,8)을,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대조시키고 있다(115,15).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결국 ‘참 신(神)’이요 ‘능력 있는 신’이 아니라 ‘시각·청각·후각 장애’를 비롯한 갖가지 장애의 신으로 머물 뿐이라고 시편 저자는 고백한다. 

 

너희 귀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먼 자들아, 눈을 뜨고 보아라. 눈먼 자가 누구냐? 나의 종이 아니냐! 귀먹은 자가 누구냐? 내가 보내는 사자가 아니냐! 하느님께 봉헌된 이자처럼 눈먼 자 누가 있느냐? 주님의 종처럼 눈먼 자 누가 있느냐? 그는 많이 보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귀가 열려 있으면서도 듣지 못한다(이사 42,18-20).

 

제2 이사야는 이 단락에서 직설적 표현이 아니라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질책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백성 이스라엘을 시·청각 장애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분의 구원 의지는 분명하다. “눈이 있어도 눈먼 이 백성을, 귀가 있어도 귀먹은 이자들을 나오게 하여라”(이사 43,8). 제2 이사야에게 시급한 일은 영원하신 분을 외면하고 다른 길을 가는, 곧 영적 장애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는 일이었다. 

 

그의 파수꾼들은 모두 눈이 먼 자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 그들 모두가 벙어리 개들 짖지도 못하는 것들. 드러누워 꿈이나 꾸고 졸기나 좋아하는 자들이다(이사 56,10).

 

장애인에게 위로를 선포하는 이사야서 56장 3절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10절에서 제3 이사야는 부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눈먼 이들’ 그리고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들’에 비유한다. 예언자는 꾸짖는다. 국가 지도자들은 민족의 파수꾼으로서 그들에게 닥쳐오는 갖가지 위험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위험에 직면한 민족의 처지를 바로 보지 못하였으니 ‘시각 장애인’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또한 제때에 필요한 경종을 울리지 못했으니 결국 입이 있어도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 곧 ‘장애 파수꾼’이 된 셈이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한심한 현 위치를 직시하며 조롱조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제3 이사야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2) 신약성서의 ‘장애인’

 

(1) 장애인에 대한 복음 선포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임승필 옮김, 신약성서 새 번역 「루가 복음서」 4,18-19). 

 

나자렛에서의 희년 선포 장면이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회적 궁극적 희년을 선포하셨다.7) 그리고 그 내용이 성취되었음을 만방에 선언하셨다.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구약성서 ‘장애인’ 단락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눈먼 이가 현실적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데 강조점이 놓여 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이적 행위 곧 갖가지 병자 치유를 비롯하여 악령 퇴치와 장애인 치유 기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행적들이 희년 선포와 그 성취 선언을 뒤따르는 여러 단락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다.8)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는 장면(루가 4,31-37), 시몬의 장모 치유(4,38-39), 갖가지 병자 치유(4,40-41), 나병 환자 치유(5,12-14), 중풍 병자 치유(5,17-26), 손이 오그라든 이 치유(6,6-11), 눈먼 이 치유(18,35-43), 잘려 나간 귀 치유(22,50-51) 등.

 

위에 열거한 단락들 안에는 시각 장애인을 비롯한 중풍 병자, 그 밖의 갖가지 병자, 악령 들린 사람과 죄인에 이르기까지 내·외적, 정신적·영적·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모든 이 치유 기적이 총체적으로 들어 있다. 장애인은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병자들과 더불어 그들 한가운데서 치유 받고 있다(루가 7,22). 

 

‘벙어리 마귀’를 쫓아 낸 사건을 계기로 군중 가운데 갈등이 일어나자(루가 11,14-18)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하고 답하신다.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장면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병마, 마귀, 신체적·영적 장애의 사슬에 얽매여 고생하는 이들을 그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바로 그때 그곳에 곧 “우리 한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현존한다”(루가 17,21 참조).

 

루가 복음에 따르면 이해 관계를 떠나서 순수하게 자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장애인들이다. 장애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우선적 초대 손님으로 등장한다(루가 14,13.21).

 

(2) 일시적 장애 상태에 머문 즈가리야, 바오로, 대사제의 종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가 1,20).

 

즈가리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신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일정한 기간 동안 벙어리가 된다. 이는 그의 불신에 대한 한시적 징벌이면서 동시에 즈가리야 자신이 요청한 표징 제시로 이해된다(창세 15,8 참조).9)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 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8-9).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주님을 만난다. 그분을 뵙기는 하지만(사도 9,27) 그 순간부터 그는 사흘 동안 시각 장애인이 된다. 그가 일시적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징벌 때문이 아니라 천상적 광채 곧 발현하시는 주님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사도 22,11 참조). 그의 눈을 멀게 했던 빛은 영적인 장애 상태에서 그를 구해 준 결과를 낳는다(사도 9,18 참조).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시어 고쳐 주셨다”(루가 22,49-51).

 

이 본문에는 긴장감뿐 아니라 흥미로운 내용도 담겨 있다. 얼마나 칼을 잘 썼으면 단번에 한 쪽 귀만을 칠 수 있었을까? 본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검술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는 즉석에서 그를 고쳐 주신다. 잘려 나간 귀를 주워서 고쳐 주시지 않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시어 고쳐 주셨다.”라고 루가는 전한다.10) 여기 묘사된 자비심 가득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계시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신앙인은 누구나 어려운 이들, 장애의 처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그렇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복음서의 교훈이 아닌가!

 

(3) ‘태생 소경’의 치유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랍비, 누가 죄를 지어서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입니까? 혹은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들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한 것입니다.’”(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요한 9,2-3).

 

인간의 질병과 장애 현상의 불합리성과 부조리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보는 유다인의 입장이 반영된 듯 보이는 단락이다(요한 5,14; 루가 13,1-5 참조).11) 그러나 실상 한 인간이 출생 전에 죄를 저지른다는 생각은 유다인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부모의 죄 탓으로 자녀가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생각 또한 건전한 혼인 생활을 독려하거나 경고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을 뿐이다(출애 20,5; 신명 5,9; 토비 3,3-5 참조). 예언자들은 자녀가 부모의 죄를 물려받는다는 사상을 거부한다(예레 31,29-35; 에제 18,1-4.18-20 참조).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인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바라본 예수님의 응답이 흥미롭다.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예수님 안에서 환히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 곧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분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표징을 통하여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만인 앞에 계시하신다. 바로 그 표징 안에서 그분의 정체와 더불어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계시된다(요한 2,11; 5,17.36; 6,29 등 참조). 예수님의 치유를 체험한 젊은이, 지금까지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오던 그는 이제 환한 세상을 보게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이 세상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천상 세계까지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갖게 되었다. 

 

(4) 영적으로 눈먼 상태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들이 이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말했다. “우리도 소경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당신들에게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금 우리는 본다고 말하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요한 9,39-41).

 

요한이 말하는 ‘볼 수 있음’과 ‘소경 됨’은 우의적 표현으로서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과 영적으로 보는 것 등 두 가지를 의미한다. 이 단락에 언급된 바리사이들은 육안으로, 외적으로는 볼 수 있었지만, 신앙의 눈으로, 영적으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요한에 따르면 이들은 눈에 보이는 빛을 못 보거나 거절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자들,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영적 장애인’이었다. 빛을 보고도 하느님 계시자인 예수님을 거부하니 그들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요한 3,18; 15,24 참조).

 

 

3.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장애인에 대한 한결같은 배려와 사랑은 구약과 신약성서의 근본 사상이다. 율법서에 따를 때 장애인 보호는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성결법’(聖潔法)에 속한다. 그분께서 살아 계시며 거룩하신 것같이 그 백성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의 아버지가 되어 준 욥의 예에서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야 할 바가 무엇인지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이웃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이, ‘법정에서 대변인’이 되어 줄 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약자와 장애인에 대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본다. 나자렛에서의 희년 선포는 예언자들의 꿈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증해 준다.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라는 예수님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올랐다. 나병을 비롯한 온갖 질병과 장애 그리고 악령의 사슬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해방시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신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성취였다.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인류 역사 한가운데서 움터 온 것이다(루가 11,20; 17,21 참조).

 

더욱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영적 장애에 대한 경고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영원하신 분을 등지는 행위나 삶, 창조주와 그분의 질서로부터 멀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예언자들과 현인은 ‘우상 숭배 행위’에 비유한다.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우상, 곧 ‘장애신’(障碍神)을 섬기는 어리석은 행위를 일삼는 이들을 꾸짖는다(시편 115,4-8).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분을 찬미하는 가운데 마음의 눈, 영의 눈까지 열린 시각 장애인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이들’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가 된다(요한 9장). 그는 이미 복음을 전하는 이로 탈바꿈해 있다(요한 9,27.30-33 참조).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음 두 가지 물음을 던지며 이 글을 맺고 싶다.

 

- 우리는 장애인의 벗이 되어 주고 있는가?

- 우리의 ‘장애신’은 무엇이며 우리의 어느 부분이 ‘영적 장애’ 처지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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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문, “‘장애인’의 성서적 이해”, 「누리와 말씀」 제11호(2002.6.),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참조. 장애인 관련 구절이나 본문이 워낙 광범위하여 이 글에서는 ‘장애인’ 이해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주요 단락만을 다루고자 한다.

2) O. Speck, “Heilspad땑ogik”, TRE 14, 756면 참조.

3)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장애인’에 대한 주요 장면을 한 눈에 보기 위해서는, 차동엽·홍승모, 「말씀의 네트 워크」, 풀빛 미디어, 2001년, 1174-1175면 참조.

4) 구약성서 인용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나온 ‘구약성서 새 번역’(1992-1999년)을 따른다.

5) 이 글에서도 대부분의 구약 학자들의 예를 따라 이사 1―39장을 제1 이사야, 40`─`55장을 제2 이사야, 56`─`66장을 제3 이사야로 분류한다.

6) 여기서는 루가 복음서를 중심으로 본다. 그 밖에 마르 2,1-12 및 병행구 등 참조.

7) 이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졸저, 「예수의 궁극적 희년 선포―루가 4,16-30에 대한 성서 신학적 연구」,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2년. 

8) 여기서는 몇 가지 기적들만 열거한다.

9) 이웃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손과 발, 눈의 장애까지도 감수하라는 말씀으로 마르 9,43-47와 병행구 참조.

10) 이와 병행하는 마태오·마르코·요한의 경우에는 귀가 잘려 나간 이의 귀를 치유해 주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11) “요한 복음서”,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이영헌 옮김, 분도출판사, 1991년, 198-199면 참조.

 

[사목, 2002년 7월호, 신교선(인천가톨릭대학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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